나는 생에 첫 시험을 앞둔 중학교 1학년 아이의 엄마이다.
나는 되도록 아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대화를 많이 하려고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내가 살아온, 그리고 지금의 세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마치 하늘이 땅이 되고, 바다가 하늘이 되는, 그런 뒤집힌 세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나는 되도록 나의 가치관을 아이에게 주입시키려 하지 않으며, 나의 생각을 이 아이에게 강요하려 하지 않는다.
문제집을 푸는 대신, 같이 앉아 책을 읽고,
유튜브를 무조건 금지하는 대신, 좋아하는 주제를 찾아보도록 하고,
컴퓨터 게임도 스스로 정한 규칙을 잘 지킨다는 전제하에 허락하고 있다.
교육 관련 동영상을 간혹 시청하며, ‘무한 경쟁 시대에 내 아이의 진짜 경쟁력은 자기 주도력에서 나오며, 그러기 위해서 내가 아이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며 믿어주고 응원하는 것이 유일하게 옳은 길이다’ 라고 하는 교육 멘토들의 말씀에 격하게 공감하고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는다.
그래, 믿어주고 응원하자. 무조건적인 지지와 사랑만이 최고의 교육이다.
요컨데, 나는 이런 노력을 하고 있으며,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 진심.
그런 내 앞에 지금 나의 사랑하는 아이가 앉아있다.
생에 첫 중간고사가 내일로 다가온 이 아이는 천하태평으로 주말에 허용된 게임 시간을 충실히 지키고 있다. 공부하는 시간은 들썩들썩 물 마시랴, 화장실 가랴, 책 가져오랴... 3분, 5분, 10분.. ‘뭉텅뭉텅’ 다 식은 호빵처럼 잘도 베어 먹으면서, 게임 시간은 바늘 하나 샐 틈 없이 칼같이 지켜낸다. 마지막 0.01초까지 쥐어짜는 것도 모자라 아직 이번 판이 안 끝났다는 이유로 3분, 5분, 10분 더위에 개혓바닥처럼 잘도 늘린다.
나는 예전에 시험 전날이면 게임은 고사하고, 밥도 안 넘어갈 정도로 긴장하고 시간이 모자랐는데, 저 물건은 대체, 왜 저러고 있을까. 혹시 내가 시험 날짜를 잘못 안게 아닌가 싶어 학교 달력을 확인해 봐도, 분명히 내일이다.
열받는다.
내 안에서 부글부글 마그마가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당장 컴퓨터 코드를 뽑아버리고 잔소리 폭탄을 날리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이 아이와의 망가진 관계가 히로시마 원폭투하 이후 재건보다 더 오래 걸릴 것 같아 끓어오르는 마그마를 눌러본다. 그것이 입 밖으로 넘쳐흘러 불꽃 용암으로 흘러내리면, 내 앞에 저 녀석을 삼켜 태우고, 나까지 활활 태워 모두가 장렬히 전사하고 말 것이다. 그러고 나면 우리는 영영 말 한마디 못하고 굳어버린 화석으로 남게 되겠지.

앞으로 이 아이는 새털같이 많은 시험을 보게 될 것이고, 이제 시작일 뿐, 엄마의 잔소리, 선생님의 눈초리.. 스스로의 각성이 없는 한 이 아이에겐 그저 멍멍 개소리 일 터. 알을 깨고 스스로 나올 때까지 기다려주자. 나는 할 수 있다.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는 잔소리 마그마를 틀어막고 있자니 코로, 귀로, 땀샘으로 심지어 똥구멍으로...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으로 모조리 김이 풀풀 새어 나와 도저히 안 되겠다. 이대로 있다가는 용이 되어 승천할지도. 온 집안이 연기로 매캐해지기 전에 내가 나가자. 무아지경으로 눈앞에서 게임을 하고 있는 저 시키를 쫓아내느니 내가 떠나야겠다. 가자 가자.
책과 노트북을 챙겨 들고 집 앞에 카페로 도망왔다. 집에 있는 그 물건의 게임이 끝나는 시간은 앞으로 한 시간 반, 그때까지 그 불쾌한 꼬라지를 안 보는 편이 내 정신 건강과 가족 해체의 위기를 지켜줄 유일한 희망일 테니. 아까부터 점점 매캐해지는 집안 공기에 내 눈치를 보던 남편도 읽던 책을 집어 들고 따라왔다.
24시간 운영하는 집 앞 상가의 무인 카페에 좌석은 여덟개. 딱 한자리가 비어있었다. 나머지 자리는 모두 책이 올려져 있다. 다섯평 남짓 작은 카페라서 좌석 간의 간격이 좁고, 자리에 앉아서도 모든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책만 덩그러니 놓여 있고 사람은 없는 좌석이 다섯 개, 사람이 있는 두 곳에는 내 아이 또래쯤으로 보이는 여학생들이 앉아 책을 펴고, 공부를.... 이 아니라 한 명은 다꾸(다이어리 꾸미기), 한 명은 카톡, 한 명은 태블릿으로 인강.. 이 아니라 웹툰을 읽고 있다. 책상에 놓여있는 책을 흘깃 보니, 중2-2 인걸로 봐서 인근 중학교 학생인 듯하다. 어쩌면 아이가 다니는 학교일지도. 비어있는 책상의 책들도 모두 자습서나 문제집, 학원에서 받은 듯한 프린트 들인 걸 보니 아마 여기는 지금 카공족(카페에서 공부하는)들의 아지트가 된 듯하다.
내 자리 바로 옆에 앉아 다이어리에 열심히 스티커를 붙이던 중2 여학생이 책가방을 열었다. 아 이제는 공부를 하려나보다.. 했는데 또 다른 스티커 뭉치를 꺼낸다. 이번에는 반짝이 스티커다. 귀여운 글씨체로 빽빽이 쓰여있는 달력 칸칸마다 정성껏 스티커를 붙이고 깨알 같은 글씨로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다. 얘야, 그거 다 지키고 붙이는 거 맞지? 그거 붙일 시간에 공부를 하지 그러..... 소리가 목구녕까지 치솟아오지만 그랬다간 꼰대법 위반으로 경찰에 신고당할 것 같아. 입에 지퍼를 채운다.
아까부터 옆테이블을 흘금거리는 나를 보며 안절부절못하던 남편과 눈이 마주쳤다. 남편은 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조용히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응. 안돼. 하지 마. 그러는 거 아니야.
그 무언의 당부를 알아들었다. 조용히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린다.
나의 시선이 책에서 비껴나 대각선 맞은편 여학생의 태블릿 화면에 내려앉았다. 태블릿 전용 펜으로 화면에 뭔가 열심히 줄을 긋고 있다. 그렇지, 그래도 너는 정신 좀 차린 앤가보구나.. 하는 순간 큭큭큭 ., 웃는다. 웃어? 중학교 2학년 교과서 내용에 웃음이 터질 만큼 재미있는 내용이 있던가?
샤방샤방 일러스트가 보인다. 웹툰이 끝나고 이번에는 웹소설로 넘어갔구나. 무슨 장면이길래 줄까지 쳐가며 읽는 거냐.. 쳐다보는 눈을 의식했는지 여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학원에서라면 지우개나 연필을 던졌을 상황이나, 여기는 카페, 나는 선생님 아닌 옆 테이블 아줌마. 지우개와 연필 대신 생긋 미소를 날린다.
왜 저래.. 하는 표정으로 다시 독서에 몰두하는 그녀. 뉘 집 규수인지.. 쯧쯧...
남편과 다시 눈이 마주쳤다. 조용히 고개를 흔들며 다시 한번 무언의 당부를 한다
-하지 마... 그르지 마..
책에 다시 시선을 고정해 보지만, 집중이 안된다. 그래 이걸 일기로 쓰자. 노트북을 열고 일기장을 꺼냈다.
'나는 생에 첫 시험을 앞둔 중학교 1학년 아이의 엄마이다....' 첫 문장을 시작했다. 한참 쓰고 있는데 문이 열리더니 왁자지껄 여학생 세명이 들어온다.
-아, 여기 zol ra 덥네.
책과 프린트가 어지럽게 놓인 채 비어있던 자리에 앉으며 한 명이 투덜거렸다. 고작해야 스무 걸음 남짓의 작은 카페라 귓속말이 아니면 웬만한 대화가 다 들린다.
-야, 근데 공부는 왜 해야 하는 거야?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나는 다시 태어나면 부잣집 손녀로 태어날 거야.
-야, 나는 그것도 안 바래. 다시 태어나면 부잣집 강아지로 태어날 거야
푸핫! 육성으로 웃음이 터졌다. 나는 책의 내용 때문에 웃은 척, 재빨리 책을 펴고 얼굴을 묻었다. 큭큭큭..... 아 놔.. zol ra 웃긴다.
푸우우웃!!!! 옆에 앉은 남편이 커피를 뿜었다. 나보고 참으라고 눈짓으로 잔소리를 하더니 본인도 다 듣고 있었나 보다. 그쪽을 흘깃 보니, 원형 테이블에 쩍벌자세로 앉은 여학생들 세 명이 굵은 빨대로 뭔가를 마시고 있다. 책과 프린트 위에 먹던 음료를 올려놓는다. 저러면 종이가 젖을 텐데. 얘들아.... 하긴, 환생하면 부잣집 강아지가 되고 싶다는데, 프린트 젖는 게 뭐 대수겠니...
나와 남편의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는 같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집에 있는 녀석이 보고 싶어지기 시작했다. 게임은 잘하고 있으려나. 남편이 조용히 시계를 가리키며 이제 그만 일어나자는 시늉을 한다.
아직 게임 시간이 남았다. 되도록이면 게임하는 꼬락서니를 안 보고 싶은데... 글을 좀 더 써야겠다.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중2 여학생 두 명이 주섬주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아, 아무래도 집에서 더 집중이 잘 되는 거 같아.
-응, 여기는 음악소리 때문에 집중이 안된다.
얘들아, 이렇게 잔잔한 음악이 집중이 안된다니. 스티커 붙일 때 보니 응급수술하는 외과의사 저리가라던데...
-가자, 집에 가서 저녁 먹어야겠다.
-나는 저녁 안 먹을래. 여기서 디엠(Direct Message)이랑 다꾸만 3시간 했어.
-양심은 있냐. 이년아.
-시끄러. 너는!
웹툰과 다꾸 여학생이 나가고 조금 있다가 엄정화의 '몰라, 알 수가 없어'를 연상케 하는 헤드셋을 쓴 남학생이 춤을 추듯 들어와 두꺼운 수험서로 보이는 책을 펴놓은 자리에 앉았다. 음악의 여운이 가시지 않는 듯, 앉아서 눈을 감더니 그루브를 타기 시작한다. 그리고, 부잣집 손녀와 부잣집 강아지가 되고 싶다던 여학생들은 일어나 무인 판매대의 간식 자판기 앞에서 뭘 먹을지 고민하고 있다. 그때, 마지막까지 비어있던 100발100중 2-2 수학책이 놓인 자리의 주인인 듯한 학생이 들어와 가방을 턱턱 싸더니 휘리릭 나갔다. 너는 자리에 앉지도 않고 가방을 싸는구나. 오늘 저 책을 펴보기는 했니.
얼추 게임이 끝날 시간이 되어 남편과 나는 말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말은 안 했지만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입가에 비집어 나오는 묘한 웃음을 통해 알 수 있었다. 현관문 앞에서 기어이 남편이 한마디 했다.
"거봐. 애들 다 그렇지 뭐."
나는 말없이 눈을 흘긴다.
현관문을 여니, 우리집 그 물건은 아까의 그 자세로 흐트러짐도 없이 여전히 게임을 하고 있다. 일분일초도 허투루 낭비하지 않고 다 쓴 치약처럼 끝까지 시간을 쥐어짜내겠지. 예상대로 알람이 울리고 나서도 '엄마, 딱 이 판만' 이라는 전용 어구와 함께 기어이 시간을 더 쓰고 끝이 났다.
-엄마 배고파.
두시간이나 한 자세로 게임을 했으니 허리도 아프고 배도 고프겠지.
-비빔면을 끓여달라, 끓여줬다.
-매우니 우유를 한 컵 달라, 따라줬다.
-디저트가 필요하다. 복숭아를 깎아달라, 돌려까고 싶었지만, 말없이 깎아줬다.
저녁 7시 30분.
드디어 장중딩이 책을 폈다. 그리고 곧 묻는다.
-엄마, 먹으면 뭐 집중 잘되는 그런 거 없어?
-예를 들면, 뭐?
-뭐. 카페인 음료나, 젤리 같은 거 있잖아.
-있어.
-뭐?
-엄마 욕. 많이 처먹어. 본 아페티! (Bon Appeti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