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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아 Aug 24. 2024

보란듯이 vs 당당하게

                               사진출처 https://m.post.naver.com/ 저작권자 애니멀플래닛




"엄마. 다음부턴 그럴 당당하게 하면 돼. 보란듯이 하지 말고."

"....으응???....그거 같은 말 아닌가?"

"다르지.완전."

"어떻게 다른데??"

"에이~ 그것도 몰라? 그건 말이지..."




몇 주간 아이 머리가 아침마다 까치 한 가족이 모두 들어앉을 지경의 더벅머리가 된 걸 보면서도 미장원에 데리고 갈 시간을 내지 못해 ‘머리가 이게 뭐니..’ 쯧쯧 혀만 차고 있었다.  그러나 실은.. 일터에서 속 시끄러운 일들의 연속에 아이의 덥수룩한 머리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던 것이 더 솔직한 고백일지도 모르겠다.


모처럼 시간이 난 토요일 오후, 까치집을 단정하게 정리하고 미장원에서 돌아오는 길, 차안 조수석에서 핸드폰에 눈을 박고 있는 아이에게 혼잣말처럼 말을 걸었다.      

“00야... 엄마 있지.... 팀장님 앞에서 보란 듯이 아이들에게 햄버거 하나씩 들려보내고, 이제 그만 두겠다고 얘기했다?”      

아직 초등학생인 아이에게 친구한테 털어놓듯 툭 던졌다. 어디 가서 얘기할데도 없이 답답한 속마음을 그냥 말하고 싶었을 뿐, 아이가 나의 속상한 맘을 다 이해해줄 거라고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저, 엄마한테 그런 일이 있었어.. 넋두리처럼 털어놓은 것이었을 뿐.  그런데, 아이에게 돌아온 답변이 의외였다.     

“엄마, 다음부터는 그럴 때 보란 듯이 하지 말고 당당하게 해.”

“응?”

“엄마가 잘못한 것도 없잖아.”

“‘보란 듯이’ 랑 ‘당당하게’ 가 뭐가 달라? 같은 말 아닌가?”

“당연히 다르지. 보란 듯이 하는 건...의도를 가지고 다른 사람 보라고 하는거. 그건 진짜 당당한게 아니야. 약간 비겁한?”

“...그럼... 당당한 건?”

“당당한 거는... 그냥 당당한 거지. 그 상황에서는 당당한 게 맞는 거니까.”

할 말이 없다. 정곡을 찔린 느낌?

“엄마가 맞다고 생각하면 당당하게 하면 되지.”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며 마치, 아무도 안보겠지 하면서 책장 맨 아랫단 구석에 꽂아놓은 일기장 한 페이지를 들킨 기분이 들었다.

‘가르치는 아이들을 위한 나의 진심’이라고 포장하긴 했지만, 실은 다른 선생님들과의 형평성에 어긋나니 자제해주면 좋겠다는, 사실상  하지 말라는 상사의 조언을 듣지 않고 강행한 일이었기에, 일부러 계획에도 없던 손 편지까지 ‘보란 듯이’ 겉에 보이게 붙여 들려 보냈으니까. 이 일을 계기로 더 이상 이 학원에서 일할 수 없겠다 결심을 굳히고, 다음달로 다가온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통보까지 한 상태였기에, ‘내가 얼마나 잘될지 두고 봐라’ 이렇게 나름의 ‘찍소리’를 낸 것이기도 했다. 아무에게도 들키기 싫었던 ‘보란 듯이’ 란 말 속에 숨어 있던 내 맘을 아이가 정확하게 읽어낸 것이다.     

내친 김에 사전을 찾아보니, 유의어라고만 생각했던 두 단어의 정의는 이러하다.


-보란 듯이: 남들 앞에서 자랑스럽거나 당당하게 (여봐란 듯이)

-당당하다: 남 앞에 내세울 만큼 모습이나 태도가 떳떳하다.


이제 자세히 보니, 사전적 정의에서도 두 단어는 분명히 결을 달리하고 있었다.

‘보란 듯이’는 ‘남들 앞’에서 보이는 행동을 전제로 한다. 바꿔 말하면 ‘남들 뒤’에서 나의 진짜 속마음은 다를 수도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게다가 ‘보다’ 라는 동사와 결합해서 만들어진 단어이니, 다른 사람의 시선이 이미 단어 속에 전제가 되어있는 것이다. 그러나 ‘당당하게’는 단어의 정의에서부터 오롯이 내 안에 기준이 있다. ‘남 앞에 내세울 만큼’ 인지 아닌지는 오직 나만이 알고 있을 테니까.

     

어쩌면 살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보란 듯이’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어떻게 볼지, 세상이 정한 잣대와 기준에 견주어 볼 때 내가 너무 작고 부족해 보이진 않을지, 끊임없이 비교하고, 더 나아지려고 안간힘을 쓰고. ‘더 나아짐’ 의 기준이 내가 아니라 남에게 있다보니 늘 안달이 나고 조급해지고 세상에서 내가 제일 못난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게 아닐까.      

돌이켜 생각해보니, 내가 해온 모든 실패의 원인이 다 ‘보란 듯이’ 이 한 단어 속에 들어있다.  내 안의 기준을 명확히 세우지 못하고, 늘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팔랑귀가 되어 줏대없이 흔들거리고, 매사에 만족하지 못하며 남 탓을 하고, 그러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끊임없이 스스로를 자책하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었다.


나 스스로에게 ‘당당하지’ 못하니, 남에게 ‘보란 듯이’ 무엇인가를 하게 되고, 그러니 그 결과가 좋을 수 없었던 것이 지금 보니 너무 당연한 것을, 초등학생인 아이도 아는 이 당연한 진리를 어리석게도 마흔 중반이 훨씬 넘은 엄마는 아이와의 대화를 통해 비로소 깨닫는다.   


지난 몇 년 간, 그야말로 대차게 자빠져 인생 바닥까지 치고, 바닥을 기어다니며 더듬더듬 헤메이는 경험을 하는 중이다. 풍파없이 잘 풀리는 인생인 줄 알고 까불다가 제대로 한방 얻어맞고 이게 뭐지..  정신차리고 보니, 모든 게 엉망진창..사람도 잃고, 전재산을 잃고, 자존감과 자신감마저 다 잃은 채 처절하게 바닥까지 끝이 안보이는 추락을 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남을 향한 원망과 스스로에 대한 자책으로 정말 힘든 몇 년을 보내왔는데. 그 자빠짐의 원인이 그놈의 ‘보란 듯이’ 였음을 이제사 정확히 알겠다. 알고 나니 한편으로는 허탈하고 한편으론 후련하기도 하다.

‘이 나이가 되도록...나 여태 뭐했니..’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라고 하기엔 이제부터 또 갈 길이 너무 험하고 멀어 보여 더럭 겁이 나기도 하지만, 적어도 확실한 것 한가지. ‘보란 듯이’와 ‘당당하게’를 선명하게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의 조금의 혜안은 생겼으니, 그 먼 길 가는 동안 아주 엉뚱하게 영 아닌 길로 들어서는 선택을 좀 덜하게 되진 않을까.


다시 출발선에 선 지금. 나에게 묻는다.

너는 지금 너 보란 듯이. 당당할 수 있니?

그렇다면 자.. 다시 당당하게 나가보자.

그만 쪽팔려하고.

세상 밖으로.     


ps.  아들! 엄마가 길을 잃고 헤메는 동안, 어느새 너는 이렇게 몸도 생각도 자랐구나.

      앞으로 펼쳐질 너의 인생도 당당하게 뚜벅뚜벅 걸어가렴.

      고맙고 사랑한다.   


***이 글은 브런치북 시작할 때 거의 처음 올렸던 글입니다. 이미 발행했던 글을 브런치로 옮기는 방법을 몰라서 같은 글을 브런치북에 다시 올리오니, 양해부탁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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