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틋한 친구에게.
너와 함께 한 세월이 얼마였더라? 어느 순간 세는 걸 잊어버렸을 정도로 오래되었네. 아니, 실은.... 너도, 나도 이미 알고 있는데 애써 기억이 나지 않는 척 하는 거.. 다 알아. 세월이 가면 나이 드는 거 당연한 일인데. 입 밖으로 소리내서 말하지만 않으면 가는 세월이 멈춰지기라도 한다든? 모래 속에 머리를 파묻고 제 눈에만 안보이면 아무 일 없을 줄 안다는 타조랑 우리가 다를게 뭐야. 그래. 맞아. 무려, 47년.... 믿기지 않는 숫자지만, 너랑 나랑 기억 안난다고 우긴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으니 그저... 순하게 받아들이자.
그런데 말야, 우습지? 내 기억 속에 넌 늘... 열 셋, 혹은 스물, 때로는 스물 셋, 가끔은 스물 여덟이거든. 내가 기억하는 너의 가장 찬란한 순간이랄까. 이제 다 컸다고 까불던 연노랑빛의 조숙했던 너, 교복을 벗고 대학 신입생이 된 연두빛의 싱그러운 너, 처음 연애를 시작한 발그레한 핑크빛의 설레던 너, 오월의 신부였던 스물 여덟의 너. 그때의 너는 눈부시게 흰 빛이었지만 그 빛 속에 서늘한 음영이 일렁이고 있었다는 거, 실은 내 눈에는 보였어. 다른 사람들은 몰랐겠지만.
그 긴 세월동안 나는 항상 네 편이었고,누구보다 너와 가깝게 지내길 바랐는데, 너는 나를 잘 안보더라? 실은 나, 디게 섭섭했어.이 기지배야... 너의 시선은, 늘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 다른 세상, 다른 시간을 향해 있었어. 너는 늘 내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나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고, 나는 늘 네가 등을 돌려 바로 뒤에 있는 나와 시선을 맞춰주길 바랬지.
시선을 주지 않는 것도 모자라 한번은 니가 나를 영영 떠나려 마음먹은 걸 알았을 때, 너.... 내가 얼마나 슬프고 황망했는지 알아? 약 병을 움켜쥐고, 작별 인사라도 하듯 그제사 천천히 돌아서 가만히 나를 응시하는 널 보며 나, 너한테 제발 그러지 말라고 외치고 또 외쳤어. 아직 니가 온 우주의 중심인 줄 알고 있는 너의 아이와, 너의 안녕과 평안에 자신의 미래를 걸고 있는 너의 남편과 , 애가 타고 속이 상해 차마 너의 안부를 묻지도 못하는 사랑하는 부모님을 두고 니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이기적이고 못된 년이라고 욕하며 소리도 질렀어. 그걸 니가 들었던 걸까. 넌 다시 천천히 등을 돌리긴 했지만 가버리진 않고 머물러 주었지. 고마웠어.
그때부터였나봐. 니가 조금씩 등을 돌려 나를 응시하는 시간이 길어지기 시작한 게...바깥쪽을 향하던 시선을 안쪽으로 돌리고 마치 처음 만나는 사람을 보듯, 찬찬히 나를 살피기 시작했어. 그럼 나도 그런 너를 가만히 응시하며 너에게 소리없이 말을 걸어. 자.. 찬찬히 봐. 나는, 너는... 지금 이대로도 참 괜찮은 사람이야.
47년만에 처음으로 니가 나를 좀 좋아하기 시작한 것 같아. 예전처럼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좀 다감해졌어. 니가 너의 아이에게, 남편에게,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아낌없는 칭찬과 응원을 보내듯, 나도, 널 언제나 응원하고 지지해. 너를 믿고 사랑해.
그러니까. 나랑 놀자. 이제.
딴데 보지말구.
P.S 니가 제일 좋아하는 따뜻한 바닐라 라떼 한 잔 놓고 브런치 글방에서 기다리고 있을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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