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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아 Oct 29. 2024

맞선 2024

소셜 말고 소설


나는 인스타그램,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등 어떤  SNS 도 하지 않는다.온갖 네이버 카페 및 단톡방도 다 탈퇴했다. 오직 브런치북이 유일한 나의 '소셜미디어'이다. '비교지옥'에 빠지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알기에, 아예 스스로 지옥문 앞에 설 일을 만들지 않기로 했다고 해야하나. 그래서 붙여본 제목. 

<소셜 말고 소설> 



2004년 결혼과 함께 낯선 동네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와 설렘보다는 여전히 불투명하고 불안정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우울이 더 컸던 그때. 내 삶에 분명히 뭐가 비어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도 몰랐던 그때, 우연히 들어간 구멍가게에 붙어있는 맥심 커피 광고 전단지에서 <제 7회 동서문학상 공모>를 보았다. 마감 날짜를 보니 남은 기간은 15일. 소설이라곤 써 본적도 없는 주제에 15일 남겨놓고 겁도 없이 끄적거렸다. 마감 당일 마감 시간 직전까지  흔들리는 버스안에서 노트북을 무릎에 올려놓고 수정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한달여가 지났나.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동상' 이라고 했다. 전화를 건 관계자가 하는 말이.

구조도 문체도 작법도 엉성하기 짝이 없는데, 딱 하나,참신하다며. 

"그러니까 이게 불과 몇 분만에 일어난 일, 아니 혼자 생각이라는 거잖아요?" 

얼결에 처음으로 써 본 소설이 당선이 되어 난생 처음 시상식이라는 데도 가보고, 그때 수상하신 분들중에 SG 워너비 멤버의 어머니도 계셨다. 축하무대로 SG워너비의 '살다가'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동서문학상은 대상, 금상, 은상 까지는 등단 작가의 기회가 된다. 만약, 그때 동상이 아니라 은상이었다면, 그래서 <등단>이라는 걸 했다면, 내 인생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글쎄....


벌써 20년전의 이야기다. '비어있는 뭔가'는 아직 채워지지 않았고, 오히려 다른 구멍들이 숭숭 더 뚫려버려 '비어있는 뭔가'들은 훨씬 많아졌다. 채우려고 기를 쓰고 노력해봤자 안되는 거 이제는 안다. 그저.. 구멍 속을 들여다보며 그 속에 웅크리고 있는 나를 그대로 인정하고 조금은 아껴주기. 가끔은 그 구멍 속에 물도 주고, 거름도 주고, 햇빛도 쐬어주고, 혹시나 나올지도 모르는 작은 싹을 기다려주기. 돌고 돌아 깨지고 부숴지며 요만큼 깨달은 것도 장하다. 잘했다. 


오랜만에 다시 읽어볼까. '그들의 소셜' 대신 '나의 소설' 

좀.....쪽팔리지만, 여기는 브런치의 내 방, '보라고 쓰는 일기장' 이니까. 

(** 2004년 응모했던 원고를 24년 버전에 맞게 조금 수정했습니다. 브런치 시작하고 처음에 올렸었는데 브런치북으로 옮겨왔습니다.**)




<맞선 2024>


처음 뵙겠습니다. 제가 조금 늦었죠? 초면에 예의가 아닌 줄은 알지만 사실 일부러 좀 늑장을 부렸답니다. 약속 시간보다 한 10분 먼저 와서 주차장에 차 세워놓고, 백미러를 내려 화장도 고치고, 라디오도 듣고 시간 좀 보내다 왔죠. 여자가 너무 칼같이 시간 딱 맞춰 나타나는 것 보다는 약간은 나중에 등장하는 것이 이런 자리에는 더 어울리지 않나요. 무슨 비즈니스 약속도 아니고 말이예요. 지나치게 무례하지 않을 정도로 약간 늦는 건 오히려 궁금증을 유발하고 기대감을 가지게 하는 좋은 촉진제죠. 등장의 효과를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들 수도 있고요. 아, 하지만 일부러 기다리게 했다고 너무 언짢아 하진 말아주세요. 그 시간이 약 15분을 넘기면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 그래프처럼 점점 효과가 떨어진다는 것 쯤은 제가 더 잘 알고 있으니까요. 아마 10분 이상 기다리지는 않았을 거예요. 맞죠? 주차장에서 호텔 로비까지, 그리고 꼭대기 층의 스카이 라운지 전용 엘리베이터로 올라오는 시간을 계산해서, 93.1 클래식 FM ‘12시의 생생 클래식’의 오프닝 멘트 후 이어지는 아나운서의 멘트,

“오늘의 첫 곡입니다.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제 3악장 들려드리겠습니다”

까지 딱 듣고 내렸거든요. 하필이면 첫 곡이 ‘그 곡’이라 차 문을 여는 제 손이 잠시 멈칫하긴 했어요. 익숙한 첫 소절이 흘러나오는 순간, 잠깐 생각에 잠길 뻔 했지만, 이내 의연하게 라디오를 끄고 힘차게 문을 열었어요. 오늘 나는 ‘당신’을 만나러 온거니까요. 


미리 어떤 옷차림으로 오실지 인상 착의를 물어보길 잘했네요. 당신같이 지루하고 특징없는 얼굴은 미리 알아볼 수 있도록 드레스 코드를 약속하지 않으면 어느 장소에서건 쉽게 눈에 들어오기 힘들죠. 당신에게 그냥 마음 편히 만나는 자리로 생각하고 부담없이 편한 차림으로 나와도 좋다고 하는 제게, 오히려 당신은 그래도 첫 만남인데 양복을 입어야 하지 않겠냐고 되물었죠. 하지만 다 비슷비슷한 양복 입은 남자들 사이에서 당신이 누군지 알아보지 못해 일일이 테이블 주위를 기웃거리며 제발 저 사람만은 아니기를 하며 가슴 졸이는 것보다는 이 편이 안전하지 않나요. 만약 제발 당신이 아니기를 하고 바랐던 사람이 당신임을 알았을 때 제가 순간 표정 관리를 못하는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잖아요. 안 그래요? 처음부터 딱 알아볼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가면, 적어도 풍선처럼 기대로 부푼 마음이 바늘에 콕 찔려 뻥 터져버리는 불상사는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테니까요.      


거봐요. 제 말이 맞죠? 당신이 뭘 입고 나올지 미리 알지 못한 채 당신을 만났다면 지금 당신의 그 무표정하고 지리한 생김새와 짤뚱한 목선에 이어지는 바라진 어깨선을 보고 제 표정이 어떻게 변했을지 저 장담 못해요. 그렇지만 기대없이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한 덕에 지금 이렇게 당신에게 늦어서 죄송하다고 인사를 건네며 환하게 웃고 있잖아요. 제게 미리 말해준 대로, ‘황토색 바지. 상의는 소매에 흰 줄무늬 곤색 스웨터, 오른쪽 세 번째 창가’에 앉아있는 당신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멀리서부터 마치 초등학교 동창을 오랜만에 만난 듯이 해사한 미소를 담뿍 머금고 당신에게 첫 인사를 건넬 수 있었던 거죠.     

 

어디... 한번 볼까요? 하나하나의 아이템을 고르는 당신의 감각은 보기보다 나쁘진 않네요.하지만 그게 100퍼센트 당신의 감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바지 한 벌, 니트 한 장에 그 정도의 돈을 투자해서 사는 옷들이라면 누구라도 뭘 골라도 크게 실패하지 않도록 퍼스널 쇼퍼가 피팅 룸 거울 앞에 나란히 서서 부지런히 ‘밀착 코디’를 해 주었을테니까요. 당신이 입은 그 카멜 컬러 코듀로이 팬츠, 그냥 평범한 ‘황토색 골덴 바지’ 같지만 백화점 간이 매대에서 일년 365일 할인 판매를 하는, 혹은 홈쇼핑에서 깔별로 ‘이 가격에 세 벌 모두’로 완판 행진을 하는 그런 바지와는 차원이 다른거죠. 라벨도 안 보고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느냐고요? 그 브랜드에서 뽑아내는 카멜 컬러의 코듀로이 팬츠는 그리 흔치 않은 아이템이거든요. 한 벌에 200만원을 호가하는 양복을 만드는 브랜드에서 만든 캐쥬얼 웨어를 입는 소비자들이라면 내가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걸 남들이 좀 알아봐 줄 수 있도록 해 줘야 하는게 그들의 최우선 과제 아니겠어요? 아, 그렇다고 마치 팬티를 바지 위에 입듯 ‘나 이거 입었소’ 하고 브랜드 라벨이 버젓이 밖으로 나오게 한다거나, 촌스럽게 브랜드 로고를 바지 뒷주머니 엉덩이 돌출 부분에 보란 듯이 박는 짓 따위는 하면 안되죠.


그쯤은 그들이 더 잘 알지 않겠어요? 1년에만도 홍보,마켓팅으로 얼마나 많은 돈을 퍼붓겠어요. 그런 촌스러운 전략을 쓰면 안된다는 것 쯤은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경영학과 1학년생들도 안다고요. 다린 듯 안 다린 듯 구김조차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드레이프와 아랫단의 독특한 바느질 처리, 복사뼈에서 정확히 한 뼘 올라온 위치에 보일 듯 말 듯 세로로 작게 박힌 브랜드 로고. 당신 역시 다리가 길지 않군요. 앉은 키 보고 설마 했는데, 바짓단을 줄인 탓에 로고가 한 뼘이나 밑으로 내려갔잖아요. 그건 그닥 예쁘지가 않죠. 저 로고는 바짓단을 자르기 전 딱 제자리에 있을 때의 비율이 가장 아름다운데 말이예요. 하지만 뭐, 바지 한 벌에 그만한 가격을 지불 할 엄두를 못내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데, 그나마 줄여서라도 입는 게 어딘가요. 그러니까 ‘레디투웨어’, 기성복이라고 하는 거 아니겠어요? 안 그래요? 


그런데요.. 옷이라고 다 같은 옷이 아닌 것처럼 면이라고 다 같은 면이 아니라는 거 혹시 아시나요. 그 브랜드에서만 사용한다는 면사의 원산지가, 미국의 어느 지방이더라? 아마 캘리포니아였던 것 같네요. 아니, 거긴 아몬드가 더 유명하던가? 아무튼, ‘베스트 퀄리티 코튼’ 생산국이라는 미국 내에서도 특히나 더 좋은 품질의 면을 생산하는 농장이 따로 있다죠 아마? 가도가도 끝이 없는 목화밭이 펼쳐진 그곳에서 특히나 더 좋은 면이 나는 땅엔 황금 똥이라도 거름으로 주는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곳에서 생산된 특별한 면사로 만든 옷을 입으면 입은 듯 안 입은 듯 보들보들 몸에 감기는 감촉이 캐시미어 못지 않더라구요. 설마 당신, 화학 섬유가 섞인 질 나쁜 자투리 천으로 만든 옷을 입으면 두드러기가 나는 예민하고 특이한 체질은 아니겠지요?     


받쳐입은 네이비 니트도 나쁘지 않아요. 당신이 입은 그 옷이 ‘네이비 밀라노 스티치 파인 메리노 울 포 바 브이넥 카디건’ 라는 다소 길지만 엄연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거 혹시 알고 있나요? 자칫 밋밋해 보일 수 있는 평범한 네이비 니트처럼 보이지만 소매의 화이트 스트라이프 엣지가 확실한 존재감을 더해주네요. 저건 그냥 하얀 줄무늬가 아니예요. 옷의 존재감뿐 아니라 입은 사람의 자존감까지 상승시키는 천사의 하얀 날개 같은 것이라고 하면 이해가 되려나요. 당신이 직접 고른 건 아닐 거고, 요즘 만나는 여자가 골라 준 것이라고 하면 안목이 꽤 괜찮은 사람이군요. 혹은 매장 점원이 골라준 거라면 매출 실적을 올리기 위해 제일 비싼 걸 권해준 걸 수도 있구요. 하긴, 100만원이 훌쩍 넘는 그 브랜드의 니트는 뭘 골라도 실패는 없을 거예요. 어차피 하늘 아래 새로운 디자인은 없고 사람들은 옷이 아닌 브랜드를 입는 거니까요. 가끔 패션쇼에서 막 튀어나온 아방가르드한 옷들이 있기도 하지만 그건 어차피 ‘쇼(Show)’를 위한 거지 팔기 위한 건 아니니까 다소 ‘해괴망칙’ 하간 해도 그냥 보고 즐기면 그만이죠. 당신이 입은 건 이번 시즌 신상품이네요. 시즌 신상품은 세일 품목에서 제외되는 건 알고 있죠? 남들보다 먼저 입을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희소성이 있는 만큼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지 않겠어요? 30퍼센트 할인된 가격에 사는 대신 나와 같은 것을 입은 사람을 만날 확률도 30퍼센트 늘어나는 거죠. 그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민망함’ 이잖아요. 안 그런가요.


한가지 당신이 놓친 부분이 있네요. 당신같이 작고 배가 나온 체형에는 니트는 어울리지 않아요. 나온 배를 더 부각시켜 보이게 하거든요. 차라리 같은 브랜드의 라이트 그레이 린넨 셔츠가 나을 뻔 했어요. 프리미엄 린넨 원단의 자연스러운 드레이프가 흐르듯이 내려오면서 나온 배를 자연스럽게 감추어 주거든요. 어차피 옷에 체형을 맞출 수 없는 거라면 투자한 가격 대비 최상의 효과를 볼 수 있는 옷을 고르는 게 이익이지 않겠어요? 만나는 여자가, 혹은 백화점 샵의 점원이 브이넥 카디건이 당신의 실제보다 좀 더 나이들어보이는 인상을 커버할 수 있다고 조언을 주었나보죠? 하지만 그 사람은 당신의 볼록 튀어나온 배가 당신을 더 나이들어 보이게 할 수 있다는 점은 간과한 것 같네요. 하지만 뭐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니트건, 셔츠건, 바지건 난 그 브랜드의 옷이라면 다 좋으니까요. 사실 체형에 맞아도 돈이 없어서 입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잖아요 Off The Rack으로 체형에 맞는 옷을 골라입거나 아님 비스포크로 체형에 맞게 주문해서 입으면 되죠 뭐. 비싸서 입지도 못하는 옷이 맞춘 듯이 내 옷처럼 딱 맞으면 그게 더 억울하지 않겠어요?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요?     


저를 맞이하러 일어난 당신. 역시나 제 예상이 맞군요. 바지단의 브랜드 로고 위치를 보고 이미 짐작했다니까요. 만약을 대비해 신발장에서 신었던 힐을 벗어 도로 넣고, 메리제인 플랫 슈즈로 바꿔 신고 온 게 천만다행이네요. 첫 만남에서 여자를 올려다보는 기분은 그리 유쾌하지 않겠죠. 주말 저녁 어느 바에서 우연히 저를 만난 거라면 제 키가 당신보다 한 뼘이든 두 뼘이든 커도 뭐 그리 상관없겠지만, 지금 우리 만남은 그런게 아니잖아요? 적어도 당신이 날 올려다보는 일은 없어야죠. 그래도 정말 다행스럽게도 내가 굽이 없는 구두를 신고서도 해결이 안되는 정도는 아니니, 앞으로 당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날 때만 힐을 신는 것으로 만족해야죠. 옷태가 나도록 스타일을 살리려면 힐이 제격인데 아쉽긴 하네요. 힐 위에 딱 올라서면 허리가 곧추세워지고 가슴이 봉긋하게 내밀어지는 동시에 여자의 자존감도 힐의 높이만큼 올라가는 느낌이 들거든요. 앞으로 당신을 만날 때는 뭘 입을지 고민이 좀 되겠군요. 땅에 붙은 듯 납작한 구두에 어울리는 옷은 제게 그리 많지 않거든요. 아무튼 최대한 당신의 눈높이에 맞춰 드릴테니 걱정 마세요. 도저히 어울리는 옷을 고르지 못해서 힐을 포기 못한 날에는 얼른 차에서 내려 룸에서 식사를 하는 곳으로 가도 되고, 이참에 납작한 구두에 어울리는 옷을 몇 벌 새로 사도 되고요. 쇼핑은 언제나 최고의 유희니까요.     


아.. 사진보다 실물이 더 낫다고요. 칭찬으로 들어도 되겠죠? 솔직히 듣기 싫지는 않네요. 사실.. 당신에게 보낸 사진을 찍고 나서 김박사님께 한번 더 다녀왔거든요. 조금씩 조금씩 스스로를 업그레이드 시키는 ‘자기 계발’의 과정이라고 해둘까요. 눈에 너무 띄지 않게 천천히요. 막 졸업한 고3처럼 벌겋게 퉁퉁 부은 붉은 라인을 그대로 드러낸 채 보란 듯이 거리를 활보하는 건, 브랜드 로고를 촌스럽게 엉덩이에 큼지막하게 박은 싸구려 면바지를 입고 돌아다니는 것과 다를 게 없죠. 당신 바지 아랫단에 은근히 숨어 있는 그 작은 로고처럼 보일 듯 말 듯 하지만 분명히 이전보다는 더 업그레이드 되는거예요. 은근히, 그러나 눈에 띄게요. 시간이 더 오래 걸리고. 투자 비용도 더 높아지지만, 이 편이 오래 가고 안전하니까요. 김박사님은 제 얼굴의 단점과 장점을 세상에서 제일 잘 아는 분이거든요. 아마 이제는 우리 엄마보다 더 정확하실 걸요? 지금 당신도 사진 속의 저와 지금의 제가 어디가 다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그냥 실물이 더 낫다고 느끼잖아요. 


다른 사람들이 제 얼굴을 가지고 싸구려 연예 신문의 틀린 그림 찾기 같은 것을 하게 할 순 없죠. 제가 아는 선배 언니는 글쎄, 세계에서 바다가 제일 아름답다는 몰디브 풀빌라로 신혼여행을 가서도 물에 발 한번 못 담궈 보고 돌아왔다지 뭐예요. 아직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인 남편에게 화장기 없는 맨 얼굴을 보여주기 민망해서 그랬다나요. 탄 자국이 채 지워지지 않은 냄비 바닥처럼 얼룩덜룩한 피부 톤에 사라진 눈썹을 보고 이제 막 남편이 된 그 사람이 기절초풍할까봐 잘 때도 화장을 지우지 않은 채로 잤다니 너무 웃기지 않아요? 저는 이 자리에서 당장 화장을 지우고 쌩얼이 되어도 당신이 나를 못 알아보거나 하는 일은 없을 테니 염려마세요. 눈썹이랑 입술선이 좀 흐려지긴 하겠지만 사라지지는 않을 테니까요. 요새 누가 촌스럽게 화장을 진하게 하나요. 그보다는 화장기 없이도 깨끗하고 맑은 고른 피부결을 유지하는게 우선이죠.      


사실 비밀이지만, 책상 서랍 깊이 숨겨놓은 고등학교 시절 사진을 보면 저도 제가 이런 때가 있었나 못 알아볼 정도긴 해요. 하지만 그 시절에야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어디 외모에 신경 쓸 틈이나 있었나요. 몇몇 아이들은 고등학교 때부터 다이어트를 한다, 화장을 한다며 호들갑을 떨기도 하죠. 하지만 연예인도 아닌데 고등학생을 성형수술 해주는 부모가 몇이나 되겠어요?


쉬는 시간이면 삼삼오오 모여 테이프로 쌍거풀 라인을 만든다, 미용 집게로 코를 높인다, 한심하게 야단법석을 떨고 하지만 사람 얼굴이 찰흙도 아니고 그게 될 리가 있느냐 말이죠. 게다가 여자는 얼굴만 예쁘다고 되는 법이 아니거든요. 스스로를 업그레이드 시키기 위해서 외모보다 중요한 건 먼저 어느 정도 괜찮은 레벨의 학교에 진학을 하는 거란 걸, 그 골빈 애들은 모르는 것 같더라니까요. 하긴 그런 애들이 많을수록 경쟁자가 줄어드는 거니 나쁠 것도 없었네요. 얼굴이야 나중에야 저명한 박사님들과 전문가의 도움으로 얼마든지 업그레이드 할수 있지만, 대학 입학증을 돈으로 살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아무리 과외 선생에게 뭉텅이로 돈다발을 안겨도 학생이 기본기 없는 ‘노베이스’면 엉뚱한 사람 배만 불리는 꼴이 되는데 말예요. 과외 선생이야 받을 돈 다 받고 ‘학생이 주위가 산만합니다. 공부를 게을리 합니다.’ 이렇게 핑계를 대면 그뿐인 걸. 우리 아이가 일류대학 못 갔다고 그 선생을 고발하겠어요? 구속을 시키겠어요? 암튼 전 진작에 그걸 알았기 때문에 제 미래가치를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서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요. 시시껄렁한 쌍거풀 테이프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죠. 덕분에 어디 내놓아도 남부럽지 않은 졸업장을 지금 손에 쥐었잖아요? 일단 그 좁은 문을 통과하고 나서 느긋한 마음으로 외적인 측면에서 저를 가꾸어 나가면 된다는 것을 꽤 일찍 깨달았으니 저는 일찌감치 시간의 효율적 분배에 관한 원칙을 꿰뚫고 있었던 거죠. 사람이 무릇 기본기를 갖추는 것은 혼자 힘으로 해야지 누구도 대신해 줄 수는 없는 거잖아요. 내 미래는 내가 스스로 개척해야죠. 저는 현명하고 진취적인 여자니까요.      


당신은 금융권에 종사한다고 했나요. 금융권이라면 건물마다 들어선 은행에서부터 요즘에는 별로 재미없다는 증권회사, 보험사도 해당되는거 맞죠? 아, 멀리는 사채도 금융권에 해당 되는거 아닌가요? 저는 그런 쪽으로는 문외한이라 금융권이 정확히 어디까지를 아우르는 말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얼마 전 결혼한 친구 남편이 회사들을 합치거나 갈라놓는 일을 하는데 회사를 들었다 놨다 하며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을 주무른다고 자랑하는 걸 듣긴 했어요. 기업 사냥꾼이라나? 그것도 ‘금융권’ 종사자가 하는 일들 중에 하나인가요? 그 친구 역시 어마어마한 액수의 아파트며, 건물들을 이리저리 사냥하고 다니는 걸 보면 역시 부부는 닮나봐요. 처녀 때는 건물은커녕 옷 한벌 살 때도 저한테 두 번 세 번 묻곤 했거든요. 아, 맞다. 펀드 매니저라는 것도 있네요. 전에 잠시 알고 지내던 남자가 건넨 골드 컬러 명함에 ‘펀드 매니저’라는 직함이 박혀있더군요. 남의 돈을 굴려서 더 큰 돈을 만드는 일이라고 하던데, 그것도 너무 욕심부리면 안되겠더라구요. 자기 돈도 아니고 남의 돈이면 더 신중해야 하는데 욕심이 과하니 불어나기는커녕 원금조차 흔적도 없이 사라지던 걸요. 그것도 날마다 조금씩 야금야금 빠져 나가는게 아니라 어느 순간 눈떠 일어나보니 갑자기 펑! 하고 날아가 버리더라고요. 


벌건 대낮에 눈 뜨고 돈 잃은 사람만큼 무서운 거 세상에 없데요. 투자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밤낮으로 전화통에 불을 지르는 것으로 모자라 낮에는 회사 앞, 밤에는 집 앞에 진을 치고 눈이 시뻘게서 지키고 있으니 그 사람 결국 그 등쌀에  시달리다 못해 해외로 도망갔잖아요. 펀드 매니저에게는 단 한번의 오판이 영원한 무덤이 되더라구요. 지금요? 물론 저는 모르죠. 몇칠을 잠도 못자고 불안해할 때부터 아, 이건 아니지 싶더라구요. 아니나 달라요? 떠나기 전에 같이 가자고 울고불고 하는 걸 간신히 떼어냈지 뭐예요? 그래도 그동안 만난 정이 있어 제가 미리 정리할 시간을 넉넉히 주었는데도 쿨하게 돌아서지 못하고 비행기 출발 시간까지 징징거리데 요. 저만 있으면 어디서든 다시 재기할 수 있다나요? 인간관계에서도 그렇게 눈치없고 우유부단하니 하물며 일에선들 제대로 투자 수익 관리를 할 수 있었겠어요? 저는 비록 펀딩쪽으로는 문외한이지만 세상의 어떤 일이든 빠르고 정확한 판단력이 무척 중요하다는 것쯤은 잘 알죠. 그 사람 그 방면으로는 영 아니었어요.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법이거든요.      


당신은 그런 사람은 아니겠죠? 과도한 욕심은 금물이라는 것 쯤은 당신이 더 잘 아시겠죠. 하기야 당신이야 무슨 걱정이 있겠어요. 든든한 부모님이 불로장생 십장생 수놓아진 병풍같이 뒤에 딱 버티고 계시는데 말이죠. 뒤로 넘어져도 다치지 않게 받쳐 줄 쿠션같은 후원자이자 초목 울창한 비빌 언덕이 있다는 건 사람을 참.. 자신감 있게 만들어 주죠. 당신은 그런 면에서 행운아임을 감사해야 해요. 부모는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당신이 어떤 부모 밑에서 태어나게 될지는 마치, 커다란 유리 볼에 숫자가 쓰여진 공이 빙빙 돌아가다가 쏘세요! 하는 멘트에 한 개가 톡 굴러나오는 행운의 복권 당첨 같은 것이니까요. 당신이 고를 수 있는 것도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죠. 그냥 순전히 ‘운’ 이라구요. 그걸 관장하는 분이 저 위에 계시는 거라면, 참 얄궂지 않아요? 그 분이야 심심풀이 땅콩으로 옛다, 넌 이 집으로 가거라 하시겠지만, 당사자들은 그 분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에 따라 그야말로 인생 대박과 쪽박이 갈리는 거니까요. 당신만 해도 만약 지금의 훌륭한 부모님에게로 보내지지 않고 저기 어느 달동네의 구멍가게 주인집 아들로 태어났으면, 지금쯤 저기 풀장 옆 야외 주차장에 주인을 기다리며 얌전히 웅크리고 있는 당신의 날렵한 애마 벤츠 C클래스 대신에 여름이면 옆 사람의 땀 냄새를 고스란히 맡으며 지하철에 몸을 싣고, 겨울이면 정류장에서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추위에 발을 동동 굴러야 했겠죠. 당신의 그 멋진 코듀로이 팬츠와 부드러운 니트 대신 세탁기에 한 번만 돌려도 색이 바래는 싸구려 청바지와 목이 늘어난 면 티를 입고 말이죠. 당신이 버스 정류장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모습을 잠시 상상해봤어요. 어차피 저 혼자만의 상상이니 무례한 건 아니겠죠?     


그런데 이상하죠. 상상 속의 당신 모습 위로 어느 해 겨울이던가 칼바람 맞으며 버스 정류장에 서있던 그 사람의 얼굴이 겹쳐지네요. 그해 겨울 생각만 하면 아직까지도 한여름에도 소름이 오소소 돋을 정도로 그 겨울은 지독하게 추웠어요. 그 사람은 그 찬바람을 온몸으로 다 맞으면서도 언제나 정류장에서 외투를 벗어 제 어깨에 덮어주고 제 두 손을 모아 잡아 자기 품 안에 넣어주곤 했어요. 외투를 벗으면 목 늘어난 티셔츠와 색이 바랜 청바지뿐인 걸 번번히 알면서도 아직 소년 냄새 같은, 조금 콤콤하지만 풋풋한 그의 살냄새가 밴 외투에 얼굴을 묻고 그의 따뜻한 가슴께에 손을 넣어 콩닥거리며 널을 뛰는 그의 심장 박동을 고스란히 느끼는 게 좋아서 그의 추위는 모른 척하고 짐짓 더 추운 척 했었죠. 제가 선물한 목도리만 두르고 있으면 하나도 안 춥다며 그는 그 겨울 내내 그렇게 목이 늘어난 티셔츠와 늘 제 어깨에 덮어주던 낡은 모직 외투로 보냈어요. 자기 집과는 정반대 방향인 우리 집까지 늘 버스를 타고 바래다주면서도 제가 추울까 봐 괜찮다고 하는데도 한사코 골목 어귀까지도 배웅하지 못하게 했죠. 


제가 집에 들어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고, 꽁꽁 얼었던 손과 발이 노골노골하게 풀어져 간질간질해질 무렵 어김없이 그에게서 이제 막 도착했다는 전화가 오곤 했죠. 제가 준 목도리 때문에 얼마나 따뜻한지 모르겠다고, 올 겨울은 생애 가장 따뜻한 겨울이라며 웃는 그의 목소리에서는 한겨울인데도 봄의 새소리가 들리는 듯 했어요. 몇시간 전까지 같이 있었는데 또 무슨 할 이야기가 그리 많았는지, 여름의 종달새처럼 재잘거리다 잠이 올 무렵이면,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아름다운 곡이라며 그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주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연주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곤 했었죠,    

    

그 겨울이 지나고 버스 정류장에 한참을 서 있어도 하나도 춥지 않게 되었을 무렵, 그와 헤어졌어요. 저와는 너무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에 대한 한순간의 호기심이었을지도 몰라요. 그의 말처럼. 하지만 그 사람 품에 손을 넣으면 느껴지던 그 다정한 온기와 먼 곳에서 들리는 인디언의 북소리처럼 둥둥둥 울리던 정열적인 그 심장 박동 소리만은 아직도 제 손을 가만히 만져보고 있으면 느껴지는 듯, 들리는 듯 생생하네요. 그 사람은 알까요. 10년 만의 강추위라고 신문이며 TV에서 온통 호들갑을 떨던 그 해 겨울이 지금까지도 제 생에 가장 따스한 겨울로 기억되고 있다는 것을요.        

 

당신에게도 온몸으로 꽁꽁 언 손을 녹여주던, 수화기 너머로 자장가를 들려주던 그런 여자에 대한 기억이 있나요. 이런, 버스 정류장에 선 당신을 상상하다가 너무 멀리까지 와버렸네요. 당신에게도 이런 아름다운 추억이 있다면 좋겠네요. 그렇게 애틋한 추억 한편 없는 사람은 가슴 속이 마른 나뭇잎처럼 버석버석할 것 같아요. 그런 추억이 있건 없건 당신은 참 행운아예요. 그 사람은 당신의 모교이기도 한 그 대학을 들어가고도 결국 졸업을 못했거든요. 학비를 벌기 위해 휴학을 밥 먹듯이 하다가 결국은 그냥 취직을 하더라구요. 뭐 똑똑한 사람이라 졸업장 없이도 취직이 가능했겠지만 당신처럼 학비에 생활비 걱정없이 졸업하고, 유학도 다녀오고 했다면 좀 더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겠죠. 아무리 생각해도 저 위에 어떤 분이 생각없이 던진 주사위로 인해 이 아래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울고, 웃고, 좌절하고, 많은 것을 포기하기도 한다는 거, 참 아이러니하지 않나요.        


음식을 주문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걸 보니 당신 이런 류의 식사가 몸에 익은 사람이군요. 스테이크의 풍미를 돋우기 위한 허브와 솔트의 종류를 직접 고르는 섬세함이야 그렇다쳐도, 한번의 시향과 시음으로 수많은 와인 리스트 중에서 선호하는 샤또 와이너리와 빈티지 년도를 골라낸다는 건, 취향이 이미 체화된 사람이 아니면 몇 년간의 연습으로도 부족한 법이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샐러드 포크와 스테이크 포크도 구분하지 않은 채 무조건 들고 찍기부터 하거든요. 아무렴 어떻냐구요? 하긴.. 지금 생각하니 그때 그 사람에게 스테이크 포크로 샐러드를 먹는다고 무안을 주었던 일이 좀 미안해지네요. 그 사람은 당신처럼 이런 곳에 자주 오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아무 포크로나 먹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게 그때는 그렇게 중요했는지 모르겠어요. 어쩌면 그날 그 사람의 그 모직 코트의 보푸라기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고 신경써서 골라입고 나왔을 셔츠의 구깃한 주름이 괜스레 거슬렸던 것과 상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날 바라볼 때 그의 눈동자는 늘 맑은 우물같이 투명하게 일렁였는데 그날 그의 눈동자는 흙탕물처럼 부옇게 흔들렸어요. 어쩌면 그래서 더 포크를 핑계 삼아 유난을 떨었는지도 모르죠. 허둥지둥 흔들리는 그의 눈빛이 너무 불안해 보이는게 싫었거든요. 사실 큰 포크로 먹던 작은 포크로 먹던 그것 때문에 음식 맛이 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그날 분명히 미디엄 웰던으로 주문한 스테이크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반쯤 먹다 남긴 기억이 나네요. 저녁을 조금밖에 안 먹었으니 밥을 더 먹어야 한다며 싫다는 절 억지로 끌고 가 설렁탕에 순대국까지 주문하던 그의 우물 같은 눈에 고여있는 탁한 고집에 질려 전 그날 먹은 스테이크는 물론 설렁탕까지 얹혀 밤새 토하고 몇칠을 끙끙 앓았지요. 


그날부터였던 것 같아요. 그에게서 걸려 오는 전화도 잘 안받고 항상 나를 기다리던 정류장에 선 그 사람을 보고 멀리 돌아가기 시작한 게요. 자꾸 그 사람 생각이 나서 미안하네요. 당연하고 우아하게 스테이크 포크로 스테이크를 찍어 음미하는 당신의 모습에 그 사람이 자꾸만 겹쳐져요. 솔직히 말하면 처음 당신이 입은 바지랑 니트를 보고서도 그 사람 생각을 했어요. 그 사람이 입었으면 바짓단을 하나도 줄일 필요 없이 가장 예쁜 비율로 로고가 보일 텐데, 그 사람이라면 약간 마른 체형에 넒은 어깨가 당신이 입은 그 니트를 더 돋보이게 했을텐데. 그 사람과 헤어지고 나서도 다른 남자들이 입은 멋진 옷을 볼 때마다 머릿속으로 그 사람에게 입혀보곤 하던 버릇이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아있네요. 습관이란 게 참 이렇게 무서운 거예요. 그렇죠? 당신은 어떤 습관이 있나요.      


제 직업이 궁금하시다구요. 저는 당신처럼 전문직은 아니예요. 하지만 당신처럼 커다란 건물로 날마다 출퇴근을 하긴 하죠. 요즘은 남녀 평등 시대를 넘어 슈퍼우먼의 시대니까 직장에서도 엄청난 우먼 파워로 주목받으며 승승장구하는 여성들이 많잖아요. 여성 임원도 늘어나는 추세구요. 멀리 갈 것도 없이 제 상사만 해도 그런 분인 걸요. 그분은 정말 대단해요. 입사 이후 남자 동료들에게 밀리지 않으려고 남들보다 일찍 출근하고 제일 늦게 퇴근하고 휴일도 반납하고 일만 해오신 분이니까요. 덕분에 회사에서 처음으로 최연소 여성 임원이 되었지만 아직 싱글이예요. 말로는 화려한 독신을 고집한다고 하시는데, 사실 어차피 이제 그 나이에 결혼을 하는 것보다 차라리 우리 회사 사장이 되는 편이 빠를 거라는 농담을 스스럼없이 던지는 분도 있다니까요. ‘자칭 비혼주의자’, ‘타칭 올드미스’ 인거죠. 아니,아니 ‘골드 gold’ 아니구. ‘올드 old’ 요 ‘old’. 


저는 어떻냐구요? 저는 일에서의 성공보다는 가정이 우선인 사람이예요. 가화만사성. 집안이 화목해야 모든 일이 다 잘되는 법이죠. 지금 제가 다니는 직장에서의 일은 그 준비단계로 안성맞춤이예요. 제가 하는 일은 당장 내일 저 하나 안 나와도 별탈없이 회사가 굴러가는 그런 일이예요. 너무 부담스러운 큰 책임은 회사일 때문에 가정을 소홀히 하게 되는 원인이 되는 법이니까요. 매일 칼퇴근이 보장되고 월급도 하는 일에 비하면 나쁘지 않은 편이예요. 서울 시내의 우수한 대학을 졸업한 규수가 집에서 놀고 있으면 국가적으로 인력낭비 아니겠어요. 결혼 후 배우자의 사회생활을 이해하려면 미리 경험해 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구요. 남자가 술먹고 늦게 들어오는 일이 가끔은 필수 불가결한 선택임을 너그럽게 이해할 수 있는 배우자가 되는 거죠. 사실 결혼하면 그만 둘 생각도 있어요.어차피 생계 수단도 아닌 ‘자아실현’을 위한 일이고, 결혼과 함께 저의 ‘자아’는 당신의 내조를 담당할 아내이자 내 아이의 밝은 미래를 설계하는 엄마가 될 테니까요. 전 가정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자아’를 찾겠다고 집안을 엉망으로 버려둔 채, 아이도 남의 손에 맡긴 채 일하는 여자들을 보면 정말 이해가 안되요. 결혼을 하고서도 그러는 건 너무 이기적이지 않나요? 워킹맘들이 들으면 욕하겠지만 전 아직까지 가정은 여자가 전적으로 돌보고 지켜야한다고 생각한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현모양처’이야말로 진정한 자아찾기의 이상적인 모델이라고 생각해요. 동의하시나요 당신?     


아침마다 전 당신이 출근하기 전에 일어나 전날 미리 다듬어 놓은 갖가지 유기농 야채를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을 거예요. 그리고 신선한 녹즙을 한 잔 갈아놓는 거죠. 아침은 너무 무겁지 않게 영양소를 골고루 갖춘 선식으로 할까요? 참, 당신 아침에도 꼭 밥이나 국을 챙겨 먹어야 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겠죠. 아침 밥상에조차 국이나 찌개가 있어야 하는 사람도 있다던데 아침을 그렇게 거하게 먹으면 오히려 위장에 좋지 않다고 해요. 선식만으로 좀 허할 것 같으면 갖가지 과일들을 함께 준비하죠. 나이보다 10살은 더 들어보이게 하는 당신 그 뱃살 제거에도 효과적인 아침 식사가 될 걸요. 당신이 조간 신문을 보면서 아침 식사를 하는 동안 전 양복과 넥타이를 챙기고 양말을 옆에 가지런히 놓아두는 거죠. 날마다 양복을 입고 출근하나요? 남자가 구깃구깃한 와이셔츠 입고 밖에 나가면 사람들은 그 아내를 탓하는 법이죠. 당신 와이셔츠 깃은 늘 공작새의 깃털처럼 빳빳하게 날이 서 있을테고, 그날의 날씨와 당신의 스케줄에 따라 다른 컬러의 셔츠와 거기에 어울리는 넥타이를 코디해 드릴 거예요. 매장 점원은 기껏해야 제일 비싼 걸 권해주겠지만 제가 골라주는 옷들은 꽤 마음에 드실 거예요. 제가 안목이 좀 높은 편이거든요. 사전 정보 전혀 없이 어떤 물건을 골라도 제일 비싼 걸 집어내는 재주가 있다니까요. 당신이 한 번의 시향과 한 번의 시음만으로 서로 다른 와인을 구분해 내는 것처럼, 입었을 때 나 보란 듯이 브랜드를 부각시키지 않으면서도 세련되어 보이는 그런 옷차림을 연출하는 게 제 전공이죠. 취향과 안목은 하루 아침에 생기는 법이 아니거든요. 그건 자연스럽게 오랜 시간을 두고 저절로 몸에 배이는 거예요. 마치 향초를 포장한 종이처럼요.     


출근하는 당신의 양복 깃을 점검하고 당신을 배웅하면 저만의 하루가 시작될 거예요. 일단 당신이 먹은 그릇을 식기세척기에 넣고, 제가 제일 좋아하는 로얄 코펜하겐의 블루 하프레이스 플레이트에 과일을 예쁘게 담고 파나마 게이샤 커피를 내리는 거예요. 93.1 클래식 FM 가정 음악을 틀고, 섬세한 꽃향기와 홍차향이 감도는 커피를 마시며 30분 남짓 신문을 보던가 인터넷 뉴스를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구요.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좀 알아야 당신이 귀가해서 대화를 나눌 때 아내로서의 현명한 조언과 지적인 대화가 가능하지 않겠어요.      

아침 식사 후에는 창문을 열어놓고 간단히 환기를 시키며 아주머니가 오시기 전 미리 간단한 정리를 하구요. 아무리 청소해주러 오시는 분이라지만 엉망인 집을 보여주는 건 그 가정의 안주인으로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니까요. 우리 집은 모던 앤틱 가구를 이용한 오리엔탈 풍으로 꾸밀거예요. 호텔 스타일의 인테리어가 유행이라지만, 집이 호텔같아서야 쓰나요. 귀가했을 때 내 집만의 온기가 느껴지면서도 지친 하루의 육체적, 정신적인 피로를 풀어줄 수 있는 그런 휴식같은 공간이 되어야죠. 단순하고 깨끗한 디자인으로 불필요한 장식을 최소화하면서도 자연 친화적인 소재를 사용한, 미니멀하지만 지나치게 차갑거나 단조롭지 않은 그런 집이 될거예요. 옷처럼 집도 소재가 중요하다는 거 알아요? 남자라서 이런 건 관심없을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인테리어에도 좀 관심이 많거든요. 


예를 들면 화장실 타일은 이탈리아 산(産) 유리타일이 제일 좋아요. 가까이서 보면 다 같은 색인 것 같은데 멀리서 보면 불빛에 하나하나 다른 색으로 보여서 다채롭고 오묘한 느낌을 주거든요. 햇살이라도 받으면 정말 예술인데, 화장실 조명으로 만족해야죠. 그래서 말인데요. 화장실 조명은 최대한 자연광같은 느낌의 간접조명으로 설치할 거예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맨 얼굴로 화장실 거울 앞에 서야 하는데, 싸구려 백열전구는 잔인하리만큼 가차없거든요. 밤사이 한꺼풀 더 내려앉은 시간의 흔적이 따뜻한 노란 불빛 아래서 그나마 적당히 가려질 거예요. 그 편이 심신의 안정을 위해서도 더 나을 테구요. 에어 마사지가 가능한 수입 욕조는 하루의 피로를 풀기 위한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랍니다. 당신이 아로마 거품 속에서 수압 마사지를 하는 동안 당신이 좋아하는 와인을 가져다 줄 수도 있어요. 하루 종일 얼마나 긴장하고 고단했겠어요? 매일의 피로는 그날그날 풀어야죠. 욕실 바닥은 100프로 방수가 되는 수입 원목으로 깔구요. 더 이상 욕실은 축축하게 숨겨진 공간이 아니예요. 상쾌한 하루를 시작하고 피곤한 하루를 마무리하는 독립적인 휴식의 공간이죠. 


거실 마루에는 꼭 천연 무늬목을 깔아야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해요. 나무 무늬만 흉내 낸 장판 같은 건 보기에도 싸구려 같을 뿐 아니라. 한여름에는 발에 쩍쩍 달라붙어 못 써요. 벽지는 영국산을 제일 알아준답니다. 원래 그네들이 인쇄와 염색 산업이 발달한 나라거든요. 화학 물질이 1퍼센트도 들어가지 않은 천연 염료로 마치 수채화를 그리듯 일일이 수작업을 한 벽지를 바르면 마치 갤러리에 온 듯한 느낌이 날 거예요. 

동양적인 인테리어라면서 왠 영국산 벽지냐구요? 오리엔탈 풍의 인테리어는 영국제 벽지의 섬세한 패턴과도 잘 어울리거든요. 소위 ‘믹스 앤 매치’라고도 하죠. 제가 무슨 말 하는지 당신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고 있죠? 베란다에는 인도네시아 발리섬의 나무로 만든 작은 벤치를 두고 인하우스(in-house) 미니 가든을 꾸미고, 현관에는 아트월과 매몰식 조명을 설치하고, 부엌은 아일랜드 식으로, 식탁 위에는 호박석과 크리스탈로 장식한 샹들리에를 달고, 침실 한 면은 갤러리 도어의 수납장을 짜 넣고, 당신 서재에는 셰비 시크 풍의 앤틱한 책상과 의자를 들여놓아야겠네요. 아 참, 침대 발치에는 벨벳으로 된 작은 베드 스툴을 하나 놓을 거예요. 드레스 룸이 있겠지만 집에서 걸칠 옷들을 오며가며 툭 던져놓기에 안성맞춤이거든요. 집안 구석구석 이미 제 머릿 속에는 다 들어 있다니까요. 당신이 무슨 말인지 전혀 못 알아들어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인테리어 업체와 상의해서 제가 다 알아서 할 거니까요. 당신은 그저 나중에 차려진 밥상 받듯, 들어와 살기면 하면 돼요. 만약 우리가 결혼이라는 걸 하게 되면 적어도 예식 세 달 전에는 당신의 아파트 비밀번호를 나한테 먼저 알려주어야 할 거예요. 앞으로 수시로 드나들며 점검할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닐 테니까요. 번번히 당신에게 출입을 허락받을 필요는 없겠죠? 바쁜 당신은 입주하는 그날까지 그냥 신경 쓰지 말고 있으면 되는 거예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요. 나중에 당신 집이 아닌 줄 알고 현관문 도로 열고 나가지나 마세요. 


참, 그런데 결혼하면 당신이 사는 그 집에서 그냥 살건가요? 한강 조망이 안되는 게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 둘이 살기에는 충분하겠네요. 방 하나는 침실로 쓰고, 하나는 드레스 룸, 또 하나는 당신 서재, 남는 방 하나는 나중에 태어날 2세를 위해 남겨둘까요. 아니, 그건 차차 생각하기로 하고 제가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공간으로 꾸며야겠네요.      


아, 왜 자꾸만 그 사람이 생각나는지 모르겠어요. 그 해 겨울 그의 가슴 속에서 채 녹지 않은 꽁꽁 언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들어섰던 그의 자취방. 삐걱거리던 여닫이 문 입구에서 속절없이 집안으로 들이치는 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며 어정쩡하게 서 있던 그의 쓸쓸하게 축 처진 어깨가 또 보이네요. 키가 큰 그 사람이 누우면 꽉 차버리고 마는 그 방에는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책상과, 벽에 위태롭게 쌓아놓은 책들, 아무렇게나 걸린 옷가지, 황급히 개킨 이불 등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죠. 두 팔 가득 저를 안아줄 때면 언제나 커다란 나무같이 든든했었는데, 제가 앉을 자리를 서둘러 만드느라 바닥에 흩어진 옷이며, 책들을 주섬주섬 치우며 구겨진 이불을 펴서 자리를 만들어 주던 그의 웅숭그린 어깨가 그날은 왜 그리 작고 초라해 보이던지, 그 사람 방은 오리엔탈 풍의 인테리어는 커녕, 당장 찬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창문부터 막아야 했었죠. 그 사람 그날 그 방안에서 결국 절 안지 못했어요.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겨울 바람이 너무 매섭기도 했지만, 우리 둘이 함께 있기엔 그 방은, 그 사람 하나만으로도 넘치게 꽉 차버려서 그 사람은 제게 다가오다가도 번번히 책이며 책상 모서리에 부딪히곤 했거든요. 좁디 좁은 방안에서 갈 곳을 잃고 허둥대는 그 모습이 보기 싫어서 결국엔 제가 먼저 가겠다고 일어서 버렸죠. 깜박 잊은 약속이 있다는 핑계라도 댈 걸 그랬어요. 그날은 그 사람 저를 데려다주지 않더군요. 신발을 신고 문밖을 나서면서도 그 사람이 늘 그랬듯이 낡은 외투를 덮어주고 아직 차가운 손을 녹여줄까 싶어 잠시 기다렸는데도 결국은 찬바람 부는 거 다 맞으며 혼자 집으로 돌아와야 했어요. 그날은.   

   

이런, 유기농 녹즙과 클래식 FM 에서 시작해서 벨벳으로 된 베드 스툴 얘기를 하다 말고 왜 갑자기 그 사람의 자취방 생각이 난 거죠? 그 사람 이젠 저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인데 말이죠. 이젠, 샐러드 포크와 스테이크 포크도 구분 못하고, 자기 한 몸 누이기에도 비좁은, 찬바람이 몰고 온 냉기가 가득한 그 방에 살던 그 사람도 저를 잊어버렸겠죠. 그럴 거예요. 분명히.     


청소 이모님이 오시면 집에 사람이 있는 게 방해가 될 테니, 오전 시간엔 뭔가 배우러 다닐 생각이예요. 그러러면 아무래도 회사는 그만두어야 겠네요. 세상엔 배울 것들이 참 많아요. 새로운 것들이 날마다 생겨나죠. 당신을 위해 요리 강습을 들어 볼 생각이예요. 유튜브에 넘쳐나는게 요리 레시피지만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 경력이 있는 쉐프의 수업은 분명 다르지 않겠어요? 당신 이탈리아 음식 좋아한다고 했죠? 대부분은 일정 중에 저녁 식사를 하고 오겠지만, 가끔 주말이라든지, 저녁을 집에서 먹는 날에는 당신의 최애 와인에 곁들일 오일 파스타쯤은 근사하게 만들어 줄 생각이예요.


체형 관리를 위해서 필라테스 P.T를 받거나 가끔 당신의 라운딩에 동석을 하게 될 경우가 생길 수도 있으니 그닥 흥미가 없어 중단했던 골프 레슨도 다시 받는 편이 좋겠네요. 또.... 테디베어 만들기를 배워두면 나중에 우리 아이 애착 인형을 오가닉으로 직접 만들어 줄 수도 있을 거구요. 참, 일주일에 한 번씩 미술관에 가서 큐레이터 선생님과 함께 전시를 보고 그림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는 강좌도 있다던데, 그것도 좋을 것 같아요. 회사를 다니지 않아도 할 일은 넘쳐날 거예요. 역시 사람은 뭔가를 꾸준히 배워야 한다니까요. 답답한 사무실 안에서 모니터 앞에 거북목을 하고 앉아 어떻게 ‘자아’를 찾는다는 건지. 내 인생은 아니지만 참 안타까워요.      

오후에는 가끔 쇼핑을 갈 거예요. 유행에 뒤떨어지지 않으려면 주기적으로 마켓 서치를 해서 안목을 길러 놓아야 하거든요. 당신이 퇴근하고 귀가했는데 와이프가 무릎 나온 츄리닝에 세수도 안 한 부스스한 모습으로 당신을 맞이하는 건 바라지 않겠죠. 여자는 끊임없이 가꾸고 꾸미기 나름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하루종일 일하고 들어오는 당신에게 늘 활기차고 생기 넘치는 그런 아내가 되어야죠. 쇼핑만큼 여자에게 기분 좋게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것도 없죠. 나의 취향을 저격하고, 나를 돋보이게 해 줄 무언가를 소유하게 되었을 때의 그 짜릿하고 터질 것 같은 쾌감은 여자를 활기차고 생기있게 만들어 준답니다. 더구나 그게 남들은 갖지 못하는 소수에게만 허락된 한정판 같은 것이면 그 쾌감은 배가 되고 생기도 몇 배나 오래가거든요. 그건 마치 소유의 권력을 가진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정글의 생존 법칙 같은 거예요. 대가를 지불하고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만이 승자가 되고 그 능력은 결국 권력이 되는 거죠. 여자에게 쇼핑은 그런 거예요.  


당신은 언제나 저녁 식사를 밖에서 하나요? 하긴 매일 그렇게 늦은 시간에 퇴근을 하는 당신에게 저녁 식사를 함께 하길 기대하는 건 무리겠네요. 너무 늦은 식사는 당신 위장 건강에도 안 좋을 거구요. 그래도 당신이 집에 오면 항상 예쁘게 깎은 과일이나 향이 좋은 허브티를 늘 준비해 놓을게요. 아로마 오일을 2-3방울 떨어뜨린 알맞게 따뜻한 욕조물도 미리 준비해 놓을 거구요. 주말 저녁이면 엔초비 카나페를 곁들인 위스키 어때요. 가끔은 뻔하지만 막걸리에 파전도 재미있겠죠? 당신이 좋아하는 어떤 술과 함께라도 흡족해 할 만한 최적의 페어링 안주를 준비할 테니 기대해도 좋아요.


아마 전 좋은 아내가 될 거예요. 당신이 뭘 원하는지 미리 살펴보고 적재.적소.적시에 준비해놓는 그런 아내요. 마치 파인 다이닝에 가면 서빙하는 분들이 늘 손님을 주시하고 있다가 뭐가 필요하다고 부르기 전에 알아서 필요한 것을 척척 준비해주는 것처럼 말이죠. 그건 상대에 대한 배려이자 순발력과 센스가 필요한 일이기도 하답니다. 가장이 밖에서는 일에 전념하게 하고 집에서는 심신의 안정과 휴식을 최대한 누릴 수 있게 하는게 현명한 아내의 내조의 기본 아니겠어요. 당신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행복한 가장이 될 거예요.      


저요? 당신에게 바라는 건 많이 없어요. 남자가 밖에서 큰 일을 하려면 가정에서 여자가 너무 많은 것을 바라면 안되는 법이죠. 대신, 가끔 우울할 때 쇼핑을 하는 것 정도는 괜찮겠죠? 말했잖아요. 생활의 활력이자 생기의 원천이라고. 쇼핑은 여자들에게는 공복에 카페인과 같은 거예요. 너무 과하면 몸에 해롭지만 그렇다고 절대 끊을 수는 없는 거죠. 저는 그래도 마일드 커피에 속하는 편이예요. 아침이면 백화점으로 출근해서 하루종일 시간을 보내다가 식품관에서 저녁장까지 봐오고, 바겐세일 시작도 안했는데 샵 매니저들과의 친분을 이용해서 미리 세일 가격으로 물건들을 쟁이는 여자들도 얼마나 많은데요. 저에게 쇼핑은 그저 생활의 작은 활력이자 ‘감 떨어지지 않게’ 안목을 키우는 ‘체험 학습’ 같은 거예요. 가끔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심신 안정제가 되기도 하구요.


아마 계절이 바뀔 때마다 침구며 커텐들이 바뀔지도 몰라요. 어차피 당신은 눈치채지도 못할테지만요. 그저, 당신을 위해 이것저것 준비하고 남는 시간을 저를 위해서 쓸 수 있게만 해 주면 돼요. 그게 제가 바라는 전부예요. 아 참, 당신이 건네주는 신용카드도 저를 위한 작은 배려에 포함될 수 있겠네요. 그 뿐이예요. 그 정도는 괜찮겠죠. 당신을 위해 아낌없는 헌신과 내조를 할 준비가 된 여자에게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않을 빛나는 졸업장을 타기 위해 투자한 교육비와, 외적 아름다움의 업그레이드를 위해 투자한 성형 수술 비용, 커리어 우먼으로서 품격에 걸맞는 옷과 가방, 구두, 액세서리 등에 저도 많은 투자를 했으니 이제 당신 아내로서 그만큼의 재투자는 받을 권리가 있는 것 아니겠어요.    

 

당신, 주말에도 늘 일을 하나요? 그래도 가끔은 교외로 나가거나 식사 정도는 같이 할 수 있겠죠. 그래도 명색이 부부인데 일주일에 한 번쯤은 같이 시간을 보내야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주말 골프 약속 정도는 이해할 게요. 남자에게는 그것도 일의 연장이라는 것 쯤은 저도 알고 있으니까요. 무릇 큰일을 하려면 남들이 쉬는 주말에도 끊임없이 움직여야죠. 그런 날은 혼자 쇼핑을 하거나 주중에 배운 요리 강습을 복습하면 되니 괜찮아요. 백화점 갈 때는 사실 당신이 없는 편이 더 나아요. 남자들은 티셔츠 하나 사려고 3시간을 돌아다니는 여자들을 따라 백화점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락내리락 하는거 딱 싫어하잖아요. 당신도 다르지 않겠죠.     


이제 저를 위해 투자한 시간과 노력들 앞으로는 당신에게 올인해 보려고 해요. 좋은 포트폴리오는 무릇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않는다는 분산 투자의 원칙에 따르는 것이라면서요? 이런, 공자 앞에서 문자를 쓰네요. 그런 건 금융권에 종사한다는 당신이 더 잘 아실 테죠. 하지만 만약 당신의 아내가 된다면 더 이상의 포트폴리오 작성은 의미가 없어질테니까요. 당신 역시 저 이외의 다른 여자에게 분산 투자를 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결혼은 적어도 펀드 운용과는 다른 거 아니겠어요. 적어도 결혼 생활의 상도는 지킬 줄 아는 사람이겠죠. 당신.      


첫 만남이지만 당신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네요. 당신이 어느 동네에 사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몇 cc의 차를 타는지, 어떤 브랜드의 옷을 입는지, 그리고 스테이크는 미디엄 레어로 먹고, 와인은 포도가 꽁꽁 얼 때를 기다려 수확한다는 독일산 아이스바인을 좋아한다는 것 등등을요. 당신 혹시 웃을 때 코를 찡그리는 버릇이 있나요. 골똘히 생각에 잠길 때면 엄지와 검지로 까칠한 턱밑을 쓰다듬지는 않나요. 노래를 불러줄 때면 눈을 지그시 감는다거나,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연주곡을 들을 때마다 행복한 눈물이 흐르지는 않나요. 낯선 동네를 걸으면 까닭없이 흥분되고 설레나요,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 중에 당신과 나의 별자리를 정확히 찾아낼 수 있는지요. 겨울이면 내 언 손을 녹여주기 위해 항상 따뜻한 캔커피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멀리서부터 저를 보면 커다란 나무처럼 두 팔을 벌리고 그 자리에 우뚝 선 채로 저를 향해서 햇살처럼 환하게 웃어 줄 건가요. 예전에 그 사람이 그랬듯이요. 아니, 뭐 아무려면 어떤가요. 이젠 그 사람 저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인 걸요. 그냥... 아직도 이렇게 가끔 생각이 나는 건 그저... 습관일 뿐이예요.손톱을 물어뜯는, 오른쪽 귀밑 머리카락을 배배 꼬는 그런 제 나쁜 습관들 같은. 그 정도는 이해하겠죠. 당신은 그런 나쁜 습관 없나요. 혹시.     


오늘 처음 만나 반가웠습니다. 다음에 만날 때는 당신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겠죠. 당신의 집안, 당신의 이력. 당신의 야망, 당신의 미래 가치 등, 이런 중요한 것들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죠. 그때 전 좋은 아내로서, 훌륭한 엄마로서 어떤 구체적인 플랜을 가지고 있는지, 당신에게 어떤 결혼 생활을 누리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좀 더 디테일한 청사진을 보여드릴게요. 우린 정말 완벽한 페어링이 될 수 있을 것 같지 않나요.     


제가 당신에게 바라는 건 정말 많지 않아요. 다만 제가 가끔 시선이 멍해지거나, 골똘히 생각에 잠겨 당신이 불러도 못 알아들으면, 그건 그저 손톱을 물어뜯고, 머리카락을 배배 꼬는 것과 같은 나쁜 습관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그뿐이예요. 어렵진 않겠죠.    

 

앞으로 당신을 자주 보게 될 것 같군요.

꽤 오랫동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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