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걱정아. 니 생각에는 니 답이 맞는 것 같아, 틀린 것 같아?"
"(.... 한참 고민....)음...맞는 것 같아요."
"그래, 어떻게 써도 상관없어. 잘했어. 크게 동그라미!^^"
잠시 후, 눈빛이 초조하게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내 눈치를 보는 아이.
"선생님 또 질문해도 돼요?"
"그럼. 당연하지. 질문하라고 선생님이 여기 있는건데?"
"저는 이렇게 썼는데, 답에는 이렇게 나와있어요.맞게 해도 돼요?"
"어디보자.. 걱정이가 쓴 답이 뭔데?"
"<나는 친구와 축구를 하고 싶다.> 라고 썼는데, 답이랑 달라요."
"잘 썼는데? 답에는 뭐라고 나와있는데?"
"<나는 친구와 함께 축구를 하기를 원한다.> 예요."
"... ... ... 걱정아. 니 생각에는 두 문장이 다른 뜻인 것 같아?"
"(... 한참 고민....) 음... 같은 것 같아요."
"그래. 다음부턴 이런 질문은 안해도 돼. 알겠지?"
매번 수업시간마다 이런 식의 질문을 끊임없이 하는 걱정이. 정답이 1,2,3,4번으로 정해져있지 않은 문제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문제들은 모두 자신이 없다. 최소한의 판단과 결정을 하는 것 조차 두려워서 늘 망설이고, 맞게 해요? 틀리게 해요? 동그라미를 칠까 말까 고민을 거듭하는 아이.
무엇이 걱정이를 이토록 경직되게 했을까.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하는 능력을 거세당한 채, 어린 시절부터 정답과 오답, 동그라미와 가위표 사이를 오가며 칭찬과 비난을 들었던 것은 아닐까.
현장에서 수업을 하다보면, 의외로 이런 아이들이 참 많이 만난다. 새로운 내용을 배울 때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는 아이가 있는 반면, 그 문제가 이번 시험에 나오는지가 더 궁금한 아이들도 있다. 그런 아이들일수록 그 문제를 왜 틀렸는지, 내가 어느 부분을 몰라서 틀렸는지는 중요치 않다. 그저 찍어서라도 맞으면 그만, 틀리면 아는 문제였던 모르는 문제였던 무조건 "까비~" 라고 외친다.(*까비: 아깝다는 뜻의 아이들 은어)
찬찬히 생각하고, 틀려도 보고, 실수도 해보고, 틀린 문제를 다시 풀어보고 하기엔 아이들은 너무 시간이 없다. 컨베이어 벨트 위를 돌아가는 듯 쉴새 없이 이어지는 이 숙제를 빨리 끝내야 게임도 하고 놀 수 있으니까. 어서어서 동그라미 치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야 혼나지 않으니까. 초등학교 때 부터 학원과 숙제에 치이느라 아이들의 생각 주머니는 거의 쪼그라들어 퇴화된 것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사고력 수학, 창의적 토론, 논리적 논술 등의 이름으로 홍보하는 수업과 학원은 넘쳐나는데, 정작 우리 아이들은 사고를 하지도 않고, 창의적이고 싶어하지도 않으며, 논리보다는 암기를 편안해 한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방향이 맞는지도 모르고, 앞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내 앞에 사람이 가니까 그쪽으로 우르르 따라서 달리고 있는 형국이다. 그리고 여기서 우르르 달려가는 사람은 아이들이 아니라 그들의 부모이고. 아이들은 다만 그 한방향의 맹목적인 뜀박질 속에서 엄마 손을 놓칠새라 열심히 쫓아가고 있다. 그러다가 손을 놓치기도 하고, 혹은 시간이 지나 더 이상 엄마가 이끄는대로 끌려가기엔 너무 커버리기도 한다. 그때는 이미 늦다. 퇴화된 생각주머니가 다시 자랄 리는 없기 때문이다.
이제 아이들은 그렇게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식물인간'이 되어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서있으면 심심하니까.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그나마 남아있는 최소한의 사고력으로 이해가 잘 되고 재미있는 '쇼츠와 릴스를 보며. 히죽히죽...
끔찍한 일이다.
어차피 내가 세상을 바꿀 순 없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저.. 나와 인연을 맺고 배우는 아이들만이라도 '식물인간'이 아니라, '야생 동물'이어도 좋으니 스스로 구르고, 뛰고, 넘어지고 그러면서 성큼성큼 나아가기를. 틀려도 괜찮으니 정해진 정답 속에 갇혀있지 말고 두리번거리고, 헤메이며 자신만의 답을 찾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