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스타그램,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등 어떤 SNS 도 하지 않는다.온갖 네이버 카페 및 단톡방도 다 탈퇴했다. 오직 브런치북이 유일한 나의 '소셜미디어'이다. 바람만 불어도 와장창! 할 것 같은 박빙(薄氷)의 유리멘탈에 종이장처럼 얇아빠진 귀를 가진 내가 '비교지옥'에 빠지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알기에, 아예 스스로 지옥문 앞에 설 일을 만들지 않기로 했다고 해야하나. '소셜'할 시간에 내 멋대로 내 맘대로 아무도 안보는 '소설'이나 써볼까. 그래서 붙여본 제목.
<소셜 말고 소설>
나는 고모가 셋이다.
그 중에 첫째 고모는 대학가로 유명한 신촌에 살았는데, 우리 가족을 비롯한 친척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큰 고모’ 보다는 ‘신촌 고모’ 라고 불렀다.
고모네 집은 경사가 제법 진 비탈길 끝에 갑자기 삼각형의 위를 뚝 자른 듯 예상치 못하게 나타난 평지에 있는 디귿자 구조의 옛날 집이었다. 위에서 내려다본 지붕의 모양이 꼭 한글의 ㄷ자같이 생겨서, 우리는 그 집을 ‘디귿자 집’이라고 불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문화대백과사전에도 ‘우리나라 전통 가옥의 한 형태’ 라고 정식으로 올라있는 명칭이었다.
외가도 친가도 모두 도시에 있어서 방학마다 시골에 내려가는 친구들을 부러워하던 나에게 신촌 고모의 디귿자 집은 서울 한복판인데도 마치 시골에 놀러 온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나 혼자만의 시골집' 이었다. 아파트 생활에 익숙해져 있는 내게,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다 숨이 찰 때 쯤 마법처럼 갑자기 나타난 그 집의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디귿자 지붕과 디귿자 대청마루가 빙 둘러진 한복판에 봉숭아꽃, 사루비아 등이 피어있는 손바닥만한 꽃밭이 있는 마당이 있었다. 그리고 그 마당에 서서 올려다보는 하늘 역시 푸르디 푸른 디귿자였다.
꽃밭 옆에는, 주인이고 낯선 이고 가리지 않고 반가워 죽겠다는 듯이 꼬랑지를 끊어질 새라 흔들어대는 누렁이가 있었다. 종자도 혈통도 알 길 없는 믹스견, 흔히 말하는 잡종이었지만 자기 집 바로 옆의 꽃밭을 가로지르지 않고 항상 빙 둘러가는 영특함에 우리는 누렁이가 어떤 명견 앞에서도 꿀릴 거 없다며 된장찌개에 비벼 먹다 남은 밥을 밥그릇에 듬뿍 담아주곤 했다.
어린 내가 신촌 고모네 집에 갈 때 마다 제일 좋아했던 놀이는 대청마루 끝에서 끝까지 왔다갔다하며 끊임없이 뛰어다니기였다. 아파트에 살면서
“뛰지마! 아랫집에서 올라와!! ”
엄마의 잔소리를 하루에도 열두번씩 들었던지라 대청마루를 일부러 세게 밟으며 콩콩콩 소리를 내고 괜스레 퉁퉁 발을 굴러보기도 했다. 내가 그럴 때마다 엄마는
“고모집 무너지겠다. 아이고 정신없어!!”
고만 하라고 타박을 했지만 고모는 그런 엄마를 손짓으로 만류하며
“놔둬라. 지 집에선 저렇게 못 뛸 거 아냐. 실컷 뛰고 가라”
늘 나를 두둔해주었다.
대청마루의 삐그덕 대는 소리에도 까르르 넘어갈만큼 모든 것이 재미있을 나이였다. 나는 깔깔거리며 디귿자 위를 몇번이고 왕복했고, 제 집에 묶여있던 누렁이도 같이 뛰고 싶었는지 꼬랑지가 안 보일 만큼 흔들어대며 나를 보고 컹컹 짖어대곤 했다.
따로 떨어져있는 부엌으로 가려면 대청마루에서 신발을 신고 내려서야 했다, 매 끼니 때마다 상을 들고 방으로, 때로 날 좋은 날에는 대청마루로 옮겨야 하는 번거로움에, 상을 나르는 고모와 언니들은 늘 신발도 없이 맨발로 댓돌 위에서 심호흡을 한번 하며 영차~ 구령에 맞춰 번쩍 상을 들어올리는 것이 신촌집의 익숙한 식사 때의 풍경이었다.
매일 무거운 상을 부엌에서 들고 나와야 하는 고모와 언니들에게는 귀찮고 고된 일상이었겠지만, 그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한 나는 부엌에 딱 붙어있는 작은 테이블에 앉아 ‘식사 끝날 때까지 일어나지 말라’는 엄마의 잔소리에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서 신이 났다. 주문한 모든 음식을 풍성하게 모두 차려서 상채로 손님들에게 대접하는 한정식 집에 온 것도 같고, 대청마루에 앉아 살랑이는 바람을 맞으며 밥을 먹으면 꼭 소풍을 나온 기분이 들기도 해서 밥맛이 더 꿀맛이었다.
안그래도 수시로 엉덩이가 들썩거리는데
“여그 물 좀 가지고 온나..”
어른들이 심부름이라도 시키면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제가요~” 하면서 신발도 안신고 대청마루 아래로 뛰어 내려서는 나를 보고
“기집애가 저리 망아지같아 걱정이예요..”
고모에게 엄마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말하는 소리를 듣는 것도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냅둬.. 쟈가....옛날 집이 신기해서 저렇게 돌아다니는 거니. 저 쪼그만 가시내 하나 뛰어다닌다고 마루 안 무너져. 우리 집이 보기엔 이리 허름해 보여도 얼마나 튼튼하게 지은 집인데..”
내 편을 들어주는 고모의 그 다음 레퍼토리를 들을 수 있어 좋았다.
신촌 고모는 딸만 여섯이었다.
사실 맨 처음에 첫아기로 남자아기가 태어났었는데 세상에 나오자마자 들었다는 아기의 우렁찬 울음소리는 고모의 환청이었을까.. 혼자서는 숨도 못쉬던 아기는 엄마 품에서 젖 한번 빨지 못하고 그렇게 다시 하늘로 갔다고 했다. 지금이야 인큐베이터도 있고, 얼마든지 아기를 살릴 수 있었겠지만, 대청마루 건너 제일 큰 안방에서 친정엄마... 그러니까 우리 할머니의 도움으로 아기를 낳았던 고모는 숨을 안 쉬는 아기를 품에 안고 그저 어르며 흔들어보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고 한다.
그렇게 디귿자 집의 장남이 될 뻔한 그 아기 이후로 고모는 줄줄이 딸만 내리 여섯을 낳았다. 하늘로 간 아들이 저 대신 사내아이 하나 쯤은 보내주리라 기대했던 고모는 여섯번째 막내가 딸이라는 소리를 듣고 그 자리에서 대성 통곡을 했다고 한다. 축복받아 마땅한 자신의 탄생일에 엄마의 눈물이 섞인 젖을 먹어야 했던 막내언니는 그러나 클수록 막내답게 집안의 마스코트이자 디귿자 집에 항상 웃음이 끊이지 않게 하는 보석같은 귀염둥이 막내로 위로 다섯 언니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아마 언니들은 엄마에게 날 때부터 환대받지 못한 막내가 안쓰러워서 더 귀애했는지도 모르겠다.
고모까지 여자만 일곱명인 신촌 디귿자 집은 하루도 빠짐없이 울고 웃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동네에서는 딸부잣집으로 불리웠다, 아들 엄마는 아들집 부엌에서 죽고, 딸 엄마는 비행기 타고 가다 죽는다는 우스갯 소리를 하며 동네 아줌마들은 고모 속도 모르고 참말인지 빈말인지 고모를 부러워했다.
첫째 딸,둘째 딸,셋째 딸까지 줄줄이 한두해에 걸쳐 시집을 가고, 자매이자 동시에 절친한 친구였던 언니들이 한꺼번에 셋이나 비어버린 허전함에, 남은 세 자매들은 두명, 세명이 복닥거리며 비좁게 같이 쓰던 방이 넓어졌다고 좋아하던 것도 잠시, 한동안 의기소침했다. 늘 시끌벅적하던 디귿자 집이 조금은 조용해졌다. 그러나 곧, 약속이나 한 듯 아들,딸,아들,딸 사이좋게 번갈아가며 세상에 나온 조카들의 빽빽거리는 울음소리와, 이 땅의 어느 꽃이 저 꽃들보다 이쁘겠냐며, 우는 아기들을 어르고 달래며 즐거워하는 어른들의 웃음소리로 디귿자 집에는 다시금 생생하고 싱그러운 활기가 넘쳤다.
이제 손주 여섯을 둔 할머니가 된 고모는 행여나 아기들이 대청마루에서 굴러 떨어질까 노심초사였다. 안그래도 이미 몇 해 전부터, 드넓은 대청마루를 무릎 꿇고 걸레질하는 것도 더 이상 힘에 부쳐 못하겠고, 부엌에서 방으로 허리가 끊어질 듯 상을 실어다 나르는 생고생도 지긋지긋하다는 고모의 푸념이 이어지던 참이었다. 여섯 딸들이 유년 시절부터 아이 엄마가 될 때까지, 자매들의 모든 희노애락을 함께 하며 같이 나이 들어간 디귿자 집에 고스란히 내려앉은 세월의 더께가 집을 더욱 낡아 보이게 했다. 듣기 좋게 삐걱거리던 대청마루의 반질반질한 윤기도 고모의 걸레질의 줄어드는 빈도수와 약해지는 손아귀 힘만큼 색이 바래며, 군데군데 이가 빠지고, 비가 오면 지붕에서 천장으로 새어나온 빗물이 떨어져 집안의 모든 양동이와 심지어 냄비까지 방안에 일렬정대하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기어이 큰 손주가 대청마루에서 굴러 떨어져 땅에 머리를 찧는 바람에 온 가족이 혼비백산한 일을 계기로 고모와 고모부는 큰 결단을 내리셨다. 여섯 자매들의 울고 웃던 추억이 가득한 디귿자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4층짜리 상가주택 건물이 올라왔다. 일층에는 커피숍에 세를 주고, 2층부터 4층까지는 결혼 후 몇 년 지나 미국으로 이민을 간 첫째 언니와, 남편을 따라 지방에서 살림을 꾸리게 된 셋째 언니를 빼고, 고모 내외와 시집간 딸 부부, 각 집의 아이들, 그리고 여태 시집 안 가거나 혹은 못 간 딸들이 층 구분도 없이 계단참을 오르락내리락하며 한 지붕, 아니 이제는 더 이상 디귿자도 아니고 가운데 꽃밭도, 영특한 누렁이도 없는 한 건물 안에 복작복작 모여 살았다. 층층이 부엌이 따로 있어 고모는 비로소 무거운 상을 번쩍 들어나르느라 늘 구부정하던 허리를 곧게 펴고, 우아하게 신식 주방의 고모의 허리 높이에 딱 맞춘 조리대에서 예쁜 그릇에 담은 반찬이며 국을 하나씩 차려내셨다.
해를 건너가며, 비록 순서대로는 아니었지만 어떻든 막내 언니까지 모두 결혼을 하고 모두 아이들이 생기자, 신촌 고모네서 가족 모임이라도 하는 날에는 전세버스를 대절해야 할 정도로 디귿자집 식구들은 대가족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경사가 제법 가파른 언덕 끝 갑자기 나타난 평지에 마법처럼 나타나던 디귿자집은 온데간데 없고, 여느 건물과 다르지 않은 네모반듯한 회색빛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는 게 훨씬 편해지고, 비로소 허리를 펴니 살 것 같다는 고모에게는 미안했지만 나의 이기적인 마음은 디귿자 하늘을 품은 그 집이 그리웠다. 나도 공부하느라 바쁜 시기가 되어 자연히 고모네 집에 가는 일도 드물어졌고, 어쩌다 친척들이 모두 신촌 고모네서 가족 행사를 위해 모여도 나는 공부가 바쁘다는 핑계로 가지 않았다. 그렇지만...실은...비탈길 끝에 우뚝 솟아있는 회색 시멘트 건물 안에 내 유년 시절의 행복한 추억까지 파묻혀 굳어버린 것 같아서,,, 굳이 다시 그곳에 가고 싶지 않았던 게 더 솔직한 마음이었다.
몇 년 후, 지병이 있던 고모부가 돌아가셨다.
고모부가 돌아가신 후 한동안 맥이 없던 신촌 고모는, 그러나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분가하지 않고 한 건물 아래 위층에 사는 딸들과, 분가했지만 여전히 친정집을 제 집처럼 수시로 드나드는 딸들... 그리고 그 손주들까지 돌보아 주고 건사하느라 외로울 틈도 없이 여전히, 고모의 표현으로, ‘멀쩡히 눈 뜬 사람 혼이 쏙 빠질만큼’ 바빴다. 언니들도 고모부가 안 계시는 집에서 고모 혼자 우울해 할까봐 일부러 층계참을 더 바삐 오르내리며 자신의 아이들을 차례로 엄마에게 맡기곤 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고모네 집 주위로 비탈길을 따라 재개발 바람이 불더니 길의 가파른 경사가 깎인 자리에 한층 한층 아파트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신촌 고모의 건물이 있는 곳도 재개발 구역에 포함이 되어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아파트가 된다고 했다. 예전의 낡고 허름했던 디귿자집은 이제 한 채도 아니라 입주권이 여덟 개나 나오는, 소위 말하는 대박 건물이 되었다. 고모의 옛 디귿자 집이 깔고 앉은 땅의 넓이가 제법 컸고, 깨끗한 신축 건물로 바뀌었으니 재개발 감정 평가라는 것을 받을 때 훨씬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 고모네 집에 오랜만에 다녀온 엄마,아빠가 나누는 대화를 어깨 너머로 들으며, ‘대지지분’ 이며 ‘감정평가’ 같은 낯선 용어들 틈에서 그래도 한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이제 신촌고모는 부우~자구나!’
고모부가 돌아가신 후, 여러 계절들이 또 속절없이 오고 가길 반복했다..
어느 겨울날, 간밤에 내린 눈으로 빙판이 되버린 비탈길을 오르다 넘어져서 한동안 병원에서 고생하신 고모는 자신도 언제 떠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기셨는지, 퇴원을 하자마자 여섯 명의 딸들에게 건물을 증여하는 절차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증여에 대한 법과 관련 서류에 대해 무지한 고모를 위해 돌아가신 고모부 대신 집안의 장남이자 고모의 바로 아랫 동생인 우리 아버지가 그 일을 도와주고 중재해주셨다. 마침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분이 오랜 경력의 세무사였기에, 아버지는 한동안 친구의 사무실과 신촌 고모의 건물을 오가며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하느라 바쁘셨다.
그런데....얼마 뒤...
좀처럼 약주를 안 하시는 아버지가 정말 오랜만에 불콰하게 술에 취해 들어오셨다. 화가 잔뜩 난 표정이었다. 놀란 엄마가 아버지의 옷을 받아들기도 전에 아버지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평소 안 하던 거친 말을 내뱉으셨다.
“나쁜 년들...천하에 빌어먹을 년들....”
여전히 분이 안 풀리시는 듯 이미 취한 아버지는 소주잔을 또 찾고 계셨다. 나는 아버지가 취한 모습을 너무 오랜만에 본 지라 놀라기도 무섭기도 해서
“왜 그러시느냐고.. 무슨 일이 있으셨냐”
고 묻지도 못했다.
나중에 엄마에게 자초지종을 들으니 신촌 고모네 집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고모는 여섯 명의 딸들에게 건물의 지분을 똑같이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 시집을 잘 가서 유복한 딸들에게는 적은 지분을, 형편이 좋지 못해 늘 사느라 종종거리는 딸들.. 특히 막내 언니에게 제일 많은 지분을 나눠주었다. 살림살이가 넉넉한 언니들하고 자신을 비교하며, 겉으론 애써 내색은 안 하지만 뒤돌아서 눈물을 쏟으며 속상해하는 막내딸이 가슴 아리게 눈에 밟히는 게 친정엄마의 마음이었을 터이다.
“너희들이 사는 형편들도 어느 정도 비슷해야 분란없이 우애도 더 깊어진다”
여섯 딸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은 자리에서 고모는 나름의 계산으로 딸들의 형편을 비슷하게 만들어 줄 수 있도록 형편이 안 좋은 딸에게 상대적으로 많은 지분을 주겠다는 결정을 다시 한 번 알렸다.
그때부터였다.
고모의 통보 후, 신촌 6공주라 자칭하며 끈끈한 자매애를 자랑하던 언니들을 하나로 묶어주었던 보이지 않는 끈이 툭! 하고 끊어져버린 것은.
법적으로 상속 증여는 아들딸 상관없이 N분의 일이라는 조항을 들이밀며 엄마에게 직접 따지는 일에 앞장선 건, 부동산을 사고팔아 재테크에 성공하여 일찌감치 강남 사모님이 된, 여섯 자매 중에 제일 유복한 둘째 언니였다. 장녀로서 엄마의 가장 든든한 오른팔 역할을 하던 큰언니도 슬금슬금 둘째 언니 편을 들며, 지분을 적게 받은 딸들이 노골적으로 부당하다, 인정할 수 없다며 반대 의사를 밝혔다. 그 과정에서 탐스러운 호박 덩굴처럼 얽히고 설키며 언제나 함께 울고 웃으며 자라던 자매들은 서로 할퀴고 상처를 내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고 말았다.
지분을 상대적으로 많이 받은 막내언니를 중심으로 아직 전세살이와 월세살이를 못 벗어난 넷째, 다섯째 딸과, 가장 적은 지분을 받은 둘째 언니를 위시한 큰언니네들이 두 파로 갈라져
“법적으로 옳지 않다.”
“법이고 나발이고 엄마 마음이 그렇다는데 법이 무슨 상관이냐.”
언니들은 틈만 나면 자칭 ‘가족회의’라는 것을 열어 무슨 결투라도 하는 듯 상대방을 비난하며 악을 썼다. 처음에는 뭐하는 짓들이냐고 화를 내던 고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줄 모르는 딸들의 싸움에 경악하고 실망하다 못해,
“이게 다 내 잘못이지.. 올케야, 내가 인생 헛살았나보네...”
우리 엄마를 찾아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시다 가시곤 했다.
한편으로, 고르지 못한 지분의 불공평함에 대한 불만에 더해, 건물을 팔아서 당장 현금화를 할 것이냐, 팔지 말 것이냐를 두고도 언니들의 의견은 각자의 이익을 셈해보고 계산기를 두들기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일찌감치 재개발, 재건축으로 쏠쏠히 재미를 많이 본 둘째 언니는 그 분야라면 자기가 전문이라며,
“재개발의 ‘재’자도 모르면서 가만히들 좀 있어.구역 지정이 확실히 되었으니 조합이 생기고 건축 심의를 거쳐 사업시행 인가가 나고 하는 등의 절차마다 건물 가치가 천정부지로 뛸 텐데 미쳤다고 이걸 지금 판다고? 지금부터 시작인데? 절대 안돼!!”
둘째 언니는 ‘절대’를 과장되게 힘주어 말하며 안된다고 펄쩍 뛰었고, 큰언니도 우리가 평생 산 집을 이렇게 팔 순 없다며 ‘우리’를 강조했지만 실상은 그 '우리' 에는 '엄마 덕에 손 안대고 코풀며 꽁으로 돈벌게 생긴' 넷째, 다섯째, 막내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둘째 언니의 조언을 듣고 역시 좋은 동네에 터를 마련한 셋째 언니도 둘째한테 무슨 꼬임을 당했는지 건물을 파는 것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반대를 했다.
그러나 당장 돈한푼이 급해 엄마의 증여가 자신을 살려줄 한가닥 구원이 빛이 되는 줄 알았던 막내 언니는 재개발이 적어도 10년도 넘게 걸릴 텐데, 그때까지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순 없다며 10년 후에나 들어올 돈 나는 못 기다린다. 당장 건물을 팔아 현금화하여 엄마가 정해진 지분대로 나누자고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상대적으로 형편이 안 좋은 넷째 언니와 다섯째 언니는 엄마의 이번 증여로 한시름 놓을 수 있겠다 기대하면서도, 잘사는 윗 언니들의 서슬퍼런 반대에 1대 3으로 맞서서 바락바락 악을 써대는 막내 사이에서 눈치만 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딸들의 악다구니에 질린 고모는 그래도 당장 형편이 어려운 딸들에게 죽기 전에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주고 싶은 마음에 매도를 반대하는 딸들을 설득했다, “너희는 그만큼 먹고 살만하면 됐지, 욕심부리지 말고 순리대로 해라”
는 엄마의 말에 오히려 둘째 언니는 서슬이 퍼렇게 고모에게 대들었다,
“엄마! 이게 나 혼자 욕심으로 이러는 줄 알아요? 이 동네가 천지개벽을 하고, 기다릴수록 건물값이 천정부지로 오를 텐데 지금 파는 건 완전 미친 짓이예요. 우리 다같이 좋자고 이러는 건데 왜 엄마는 막내 편만 들어?”
심지어 고모가 보는 앞에서도 서로를 할퀴며 물어뜯는 딸들을 보고 고모는 속이 답답하고 울렁거려 그 자리를 피해 동네 비탈길을 뱅뱅 돌며 혼자 한참을 오르내리셨다고 한다.
속이 울렁거리고 답답함이 가시지 않는 것이 딸들의 진흙탕 싸움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던 고모는 그러나...... 그러지 말고 병원에 가보자는 엄마의 설득에 따라나선 진찰실에서 위암 4기라는 선고를 받았다.
“연세도 있으시고, 이미 다른 장기로의 전이도 상당히 진행되어 병원에서는 더 이상 해 드릴 게 없습니다. 남은 시간 동안 충분히 정리하고 준비하시며 고통이 심해지면 진통제를 놓아줄테니 병원으로 오시거나 그것도 힘들면 119를 부르세요.”
하루에도 몇 건씩 암 환자들을 만나는 젊은 의사는, 고모가 마치 유통기한이 얼마 안남은 음식인 것처럼 표정 하나 안 변하고 무미건조하게 고모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곧이어, 여섯 딸들에게도 고모의 소식이 전해졌고, 병원에 동행했던 엄마를 통해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저 나이에 그토록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일을 지켜보고 있는데 병이 안나는게 이상하지, 나쁜 년들 결국 지 엄마를 죽게 만드는구만.....”
하시며 그날 밤새도록 소주 한 병을 앞에 놓고 우셨다. 아버지가 술을 드시는 것도 더구나 눈물을 흘리는 것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기에, 엄마와 나는 딱히 뭐라 위로할 말도 찾지 못하고 그저 옆에 앉아 아버지의 술잔을 채워드렸다.
고모의 상태가 손쓰기에 이미 늦었다는 의사의 말과 상관없이 언니들은 그래도 해 볼 수 있는건 헤야 하지 않겠냐며 기어이 고모를 입원시켰고,
“죽어도 내 집에서 죽을란다”
하는 고모에게
“죽긴 누가 죽는다고 그래. 그 의사 면허도 없는 돌팔이일거야 분명.”
고모의 누울 자리를 편히 만들려고 베게를 탁!탁!탁! 치며,
꺼내기 편하게 냉장고에 음료수를 정리하며 둘째가,
배배 꼬인 링거줄을 헤쳐 풀어놓으며 셋째가,
집에서 가져온 깨끗한 수건을 물에 적셔 가습기처럼 침대에 널어놓으며 막내가,
언니들은 이럴때는 또 다분히 '공평하게' 순서를 정해놓고 병실을 오가며 번갈아 고모에게 눈을 흘겼다.
그렇게....여섯 자매가 암 병동을 번갈아 오가며 엄마를 간호했지만, 의사의 말처럼 고모의 상태는 그닥 호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고모가 병원에 누워있는 동안에도 언니들의 다툼은 계속되었다.
“엄마가 진짜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증여세에 비해 상속세는 어마어마 해. 멀쩡하게 제 값 받을 건물 하나 쪼그라드는 거 순식간이다. 그 전에 우리 이제 그만 이 일 마무리 짓자.”
부동산 지식과 함께 세법에도 빠삭한 둘째 언니가 나머지 언니들을 설득했지만, 막내 언니는 여전히,
“나는 당장 현금이 필요하니 언니가 매도에 동의만 해주면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고 엄마 돌아가실 때까지 책임지고 내가 모시겠다.”
며 둘째 언니의 의사에 한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둘째 언니 역시
“‘공유지분자’가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매도가 불가능하다는거 알고나 하는 소리냐? 그리고.. 누구 맘대로 엄마를 니가 모셔?”
사납게 맞받아치며 막내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3달쯤 지났을까,
어디선가 걸려 온 전화를 받은 엄마가 “어떡해, 어떡하니..” 눈물을 왈칵 쏟으며 옷도 제대로 입지 않은 채로 어디론가 뛰어나갔다. 엄마가 걱정스러워 나는 급히 지갑을 챙겨 들고 엄마를 따라나섰다. 엄마가 간 곳은 고모가 계시는 병원이었다. 병원에서는 보호자인 따님들의 전화가 모두 꺼져있어 비상 연락망인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며 고모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엄마는 그 자리에서 무릎이 꺾인 채 아무 말도 못하고 한동안 그렇게 계셨다. 그렇게.... ‘여섯 명의 딸 부자집’ 고모는 동네 아줌마들이 부러워하던대로 비행기 안에서 죽기는 커녕, 차가운 병원 침대에서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옆에 아무도 없이 혼자 먼 길을 떠나셨다.
고모가 혼자 병실에서 외로운 먼 여행을 떠나기 직전, 고모의 여섯 딸들은 재판장로 들어가는 법원 복도에 있었다. 둘째 언니와 막내 언니의 갈등의 골은 점점 깊어져 결국 있어서는 안되는 일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기어이 너랑 나랑 법정에 서게 만드는구나.”
둘째 언니의 비난에 막내 언니도 지지 않고
“결국 이 지경까지 오게 한 게 누군데”
악을 쓰며 맞섰다.
엄마를 병원에 눕혀놓고 대체 뭐하는 짓이냐는 다른 언니들의 타박이 이어졌지만 그러는 그들조차 누구 하나 자신의 입장을 바꾸려고는 하지 않았다.
재판장에 입장할 시간이 되고, 여섯 딸들은 판사의 요청대로 일제히 전화기를 무음모드로 해놓거나 아예 꺼버리기도 했다. 여섯 명의 언니들이 차례로 재판장에 들어가고, 곧이어 문이 굳게 닫혔다.
그 안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는 나는 모른다.
다만...그 시간에 여섯 명이나 되는 딸들 중 누구도 곁에 없이 혼자 떠나셨을 고모를 생각하니, 나라도 가서 손을 잡아드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뒤늦게 소용없는 후회를 했다.
고모의 장례를 치른 후, 다시는 신촌에 갈 일이 없어졌다. 언니들의 분쟁의 결말이 어떻게 끝났는지 궁금했지만 나는 묻지 않았다. 엄마,아버지도 그 이후에는 고모네 집에 대한 이야기를 힌번도 꺼내지 않으셨다. 그리고 나 역시 언니들도 신촌 디귿자 집과도 영영 인연을 끊고 말았다.
세월이 흘러 나도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었다. 결혼 이듬해 태어난 아이가 커갈수록 안정된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은 본능적인 엄마의 욕심에 하루하루 마음이 급해졌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가기 전 내 집 마련’이라는 절체절명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 부부는 아침마다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이와 어린이집 앞에서 눈물바람으로 이별 인사를 하고, 만원 지하철과 버스 안에서 통조림속 정어리처럼 절여진 채 출근하고, 퇴근해서 밀린 육아와 집안일을 헤치우고.. 그렇게 매일 열심히 동동거리며 성실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어린이집에 아이를 데리러 갈 때마다, 이미 다른 아이들이 모두 가고 없는 텅 빈 교실에서 혼자 놀다가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반갑게 두 팔을 벌리며 나에게 달려오는 아이를 안을 때마다 회사를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지만, 아이가 초등학교에 가기 전에는 안정된 내 집을 사야 한다는 생각으로 머리를 흔들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몇 년동안 성실하게 종잣돈을 마련해서 진짜 ‘우리 집’을 살 때가 왔다. 카페라고는 커피마시는 곳인 줄만 알았던 나는 옆집 여자의 소개로 소위 말하는 '부동산 카페'라는 곳에도 가입해서 다른 사람들의 글도 열심히 읽어보고, 자칭 타칭 부동산 최고 전문가라는 고수의 강의도 듣고, 수업시간에 들었던 곳을 직접 가보는 '임장'이라는 것도 경험했다. 주중 내내 야근으로 물먹은 솜처럼 피곤한 몸을 이끌고 주말이면 아침부터 동서남북 가로세로 이동네 저동네 부동산을 쭈삣대며 들어가 남의 동네를 기웃거리기를 벌써 몇 주째...서울 여기저기 이토록 집이 많은데, 내가 가진 돈으로 살 수 있는 맞춤한 집을 찾기는 정말 어려웠다. 남편의 직장에서도 나의 직장에서도 너무 멀지 않아야 하고, 아이가 다닐 초등학교도 가까이 있어야 하고, 교통도 편리해야 하고... 이 모든 것을 다 갖춘 집을 찾자니 가지고 있는 예산이 너무 빠듯해서 실망하고 돌아서기를 몇 번 반복하며 점점 자신감마저 잃어갔다.
그러다 문득, 부동산 고수의 마지막 수업시간에 들었던 동네가 생각났다. 한동안 발길을 끊은 그곳이었다. 그 주 주말에 나는 남편과 부동산 중개인과 같이 그 동네의 집을 보러 갔다.
예전 둘째 언니가 말했던 ‘천지개벽’이라는 말이 비로소 실감이 났다. 아파트 숲으로 변해버린 신촌에서 도저히 신촌 고모의 디귿자 집이 있던 자리가 어디인지, 저 아파트들 중에 몇 채로 환골 탈퇴를 했는지, 아니면 아직 드문드문 개발되지 않고 남아있는 저 비탈길 어딘가에 사연 많은 고모의 건물이 아직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나는 고장난 네비게이션처럼 방향을 잡지 못하고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문득 봉숭아꽃, 사루비아 꽃밭과 누렁이 집 사이에 서서 올려다보던 신촌 고모네 ‘디귿자 집’의 푸르디 푸르던 ‘디귿자 하늘’이 못견디게 보고 싶었다. 부동산 중개인의 안내를 따라 아파트 단지를 거닐 때, 한건 올릴 기대로 달떠 열을 올리는 중개사의 설명은 한 귀로 흘리고,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선 채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파란 하늘 대신에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떨어질 것 같은 먹구름이 잔뜩 낀 회색빛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보고 부동산으로 돌아갑시다”
중개사의 재촉에 비로소 정신이 난 나는 이미 저만큼 앞서가는 남편과 중개사를 종종걸음으로 쫓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