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스타그램,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등 어떤 SNS 도 하지 않는다.온갖 네이버 카페 및 단톡방도 다 탈퇴했다. 오직 브런치북이 유일한 나의 '소셜미디어'이다. 바람만 불어도 와장창! 할 것 같은 박빙(薄氷)의 유리멘탈에 종이장처럼 얇아빠진 귀를 가진 내가 '비교지옥'에 빠지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알기에, 아예 스스로 지옥문 앞에 설 일을 만들지 않기로 했다고 해야하나. '소셜'할 시간에 내 멋대로 내 맘대로 아무도 안보는 '소설'이나 써볼까. 그래서 붙여본 제목. <소셜 말고 소설>
이 글은 전혀 '소셜'하지 못한 내가 '그냥 문득 필받아' 소소하게 쓴 '소설'이다. 핍진성과 개연성을 망가뜨리지 않고 온전히 이야기를 만들어 낼 비상한 글쟁이의 재주는 내게 없는지라, 아무래도 보고 겪은 일이 소재가 될 수 밖에 없다.그러나 나는 이 글을 일단은 '소설' 이라 부르겠다. 그래야, 가끔 내 브런치북을 보고 '지랄한다' 혀를 차는 엄마의 지청구를 피해, "이거 다 지어낸 얘기야. 허구라고 허구!!" 라고 박박 우기며 도망갈 구멍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완전히 허구도, 그렇다고 온전히 진실도 아니다. 다만, 쓰는 이와 읽는 이의 마음에 따라 그 사이 어디쯤에 존재하는 그런 '소소한 이야기' 이니, 그저 하늘 아래 이런 두 여자가 있구나..그럴 수도 있겠네..정도로 읽히기를 바란다. 몇편까지 이어질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두 여자가 있다.
두 여자는 나이도, 생김새도, 서로 사는 곳도 달랐다. 사는 장소만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땅 위, 같은 나라 안 이었는데도, 한국과 미국, 프랑스와 중국, 이집트와 칠레만큼이나 사는 세계가 달랐다.
젊은 여자는 만석꾼 집안의 2남 2녀 중 장녀로, 얼굴도 예쁘고 총명하기까지 하여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무릎에서 내려온 적 없을 정도로 귀하디 귀하게 자란 부자집 여식이었다. 벼루에 먹을 갈고, 붓으로 난을 치고, 펜으로 글 쓰는 재주밖에 없었던 선비 같은 아버지와, 선비의 아내로 살기를 거부하고 장사꾼의 길을 택한 억척같은 어머니의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그악스런 셈질 덕에, 그녀는 재물이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흡족하게 화사한 풍요를 누리면서도 삿되고 천박한 기운에 물들지 않고, 시와 소설, 그림과 음악을 사랑하는 감수성 충만한 문학소녀로 자랄 수 있었다.
‘코찔찔이들’에게까지 과외 선생을 붙였다는 어려운 사립 국민학교 입학 시험에 당당하게 합격한 그녀는, 세일러 카라 교복에 윤기가 반질반질한 가죽 란도셀 가방, 곤색 베레모까지 쓰고 학교에 다녔다. 아직 6.25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기 전 모두가 못살던 시절이었다.
큰오빠 몫으로 남겨주어야 하니 한 송이만 먹으라 했던 달콤한 포도를, “언니야, 그라지 말고 니도 같이 묵자...응?“ 배배꼬는 막내 동생의 꼬드김에 넘어가 몇알갱이 더 삼키지도 못한 채, 억울하기 짝이 없게도 동생들과 함께 줄줄이 창고방으로 쫓겨나 손들고 서 있었던 일이 그녀가 기억하는 유년기의 유일한 꾸지람이었을 만큼, 그녀는 단 한번도 부모님 뜻을 거스른 적 없는 아버지의 꿈이자, 엄마의 자랑이었다.
내내 모범생으로 칭찬받던 여중생 시절을 거쳐, 서울 최고 명문이라는 경기여고의 뜨르르한 위세에 전혀 기죽지 않는 재경 동문회가 활발한 지방 명문 여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녀는 우리나라 최고의 사립 명문대인 Y대 영문과에 입학했다.
평생을 나고 자란 곳을 떠나 스무 살 여대생이 되어 처음 상경한 그녀의 짐보따리에는, 60년대 그 시절 ‘서울 상경’이라는 단어에 흔히 따라붙던 ‘궁기의 이미지’ 따위가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이미 서울의 최고 명문대를 졸업하고, 박사 공부를 이어가며 자리를 잡은 오빠의 서울집에, 입을 옷가지와 생활용품들을 먼저 보내놓은 그녀는, 왼쪽 어깨에는 통기타, 오른쪽 어깨에는 이젤과 화구통을 메고, 가슴팍에는 가장 좋아하는 윤동주의 시집을 안고 통넓은 나팔바지를 나풀거리며 기차에서 깡총, 뛰어내렸다.
그녀의 서울 생활의 첫시작이었다.
꿈많은 문학 소녀였던 그녀는 Y대 학부에서 영어 영문학을 전공하고,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T.S 엘리엇의 <황무지> 등의 작품에 매료되어 동대학 대학원에 진학,교수가 되겠다는 꿈을 향해 열심히 정진했다. 그녀가 사는 세계는 그런 곳이었다.
그녀 나이 26살까지는.
한편,
늙은 여자는 ‘휴전선’이라는 것이 대한민국 역사에 존재하기도 전, 북한과 맞닿아 있는 경기도 연천의 가난한 집의 맏딸로 태어났다. 여동생 둘에 남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어려서 어느 집으로 보내졌다나, 아님 죽었다나... 암튼 이야기로만 전해 들은 남자 형제가 하나 더 있었던 것 같다고도 했다. 우는 동생을 업고 등교하여, 교실 한켠에 깐 포대기 위에 버둥거리는 동생을 눕혀놓고 수업을 듣기 일쑤였던 소학교조차 결국에는 졸업하지 못한 여자는 한글을 읽고 쓸 줄은 알았지만, 맞춤법은 엉망이었다. 또박또박 눌러쓴 예쁜 필체의 그녀의 메모는 보기에는 참 좋았지만, 소리내어 읽어야만 비로소 그 뜻이 이해되곤 했다.
작은 키에 왜소한 체구, 좁은 이마에 외꺼풀 작은 눈의 그녀는 미인이랄 것도 없지만 지나친 박색이라 할 것도 없는 그저 소박하고 평범한 처녀로 자라났다. 스물 둘에 시집이란 걸 가보니, 지아비 된 이에게는 이미 전처에게서 낳은 고만고만한 세 딸이 있었다. 그 애들을 거두고 입히며, 이듬해 아들 하나, 9년 후 또 아들 하나를 낳고, 그녀는 그렇게 다섯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녀의 둘째 아들이자, 다섯 오누이 중 막내인 아이가 5살이 되던 해, 그녀는 남편을 여의고 혼자가 되었다. 그녀의 나이 서른 일곱이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다섯 아이를 혼자 키우며 그야말로 시난고난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냈다. 그 세월이 어땠을지는... 감히 상상이 잘 안될 뿐이다.
다행인 건, 배 아파 낳지 않은 세 딸 모두, 그녀를 새엄마라 얕보거나 무시하지 않고 마음으로부터 ‘친정엄마’로 받아들여 주었다는 것. 그리고 줄줄이 딸만 있던 집에 아들 둘을 떡하니 안겨준 것도 모자라, 그 아들 둘 다 과외 한번 못 시켰어도 서울 명문대에 합격하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직장에 들어가, 자식 농사로 치면 남 부러울 것 없었다는 것이었다. 물 먹인 솜처럼 고단한 그녀의 인생에, 두고두고 햇살처럼 다사롭고 가슴 뿌듯한 위안이었다.
그녀는 내내... 그런 세상에 살았다.
공통 분모라곤 ‘여자‘라는 것 밖에는 없어 보이는 이 두 여인의 교집합을 가능하게 한 건 한 남자였다. 젊은 그녀의 남편이자, 나이 든 그녀의 큰아들. 나의 아빠였다.
그렇게 두 여자가 만났다.
그때, 그녀들은 알았을까.
그 후, 45년을 한 집에서 함께 살게 될 줄.
*사진 이미지 출처: 브라티슬라바, 슬로와키예, 여자 및 걷기을(를) 촬영한 Bratislava, Slowakije에 있는 Lisa van Vliet (@lisaaxv)의 이 무료 HD 사진 다운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