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동생이랑 이야기하다가 동생의 어린 시절 친구들의 근황 이야기를 전해들었고, 예전에 썼던 이 이야기가 문득 다시 생각이 났어요. 브런치북 초기에는 매거진이 뭔지, 브런치북을 어떻게 만드는지도 몰랐습니다. 처음에 띄엄띄엄 하나씩 올린 글들이 들어갈 방을 못찾고 삐져나와 있는 것이 어쩐지 신경이 쓰여서, 브런치 방으로 옮기려 해보니 안되네요. 이전 글을 다시 올림을 밝힙니다.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이야기. 그래서 붙여본 제목. <소설같은 잡설>
우리 속담에 ‘속 썩이는 자식이 크게 효도한다’ 는 말이 있죠.
자식이야 낳아놓으면 모성애가 저절로 샘솟아 내 새끼는 365일 24시간 이쁠 줄 알았는데.. 막상 키우다 보니 어디 그렇던가요? 하루에도 열두번씩 으이그.. 저 자슥을... 그냥!!! 하다가도 잠든 모습 보면 또 한없이 이쁘고 짠하기도 하고... 자식을 키우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하실 듯 합니다. 저는 이 속담을 들으면 떠오르는 아이가 있습니다. “뒤늦게 효도한 속썩이는 자식‘의 대명사 격인 제 동생의 친구입니다.
저에게는 7살 차이가 나는 남동생이 있습니다. 유치원 시절부터 동네를 쏘다니며 우르르 몰려다니던 여섯명의 개구쟁이 녀석들은 저만 보면,
”누나 이거 사주세요! 저거 사주세요!!“
하며 과자나 아이스크림을 사달라며 졸라댔고, 가끔 서로 의기투합해서 장난질을 하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누나, 누우나아~~ 누나가 세상에서 제일 이뻐요옷"
조금도 맘에 없는 소리를 하며, 엄마한테 제발 비밀로 해달라고 지들끼리 한푼 두푼 모은 코묻은 동전을 모아 제게 귀여운 뇌물을 상납? 하기도 했습니다. ’응답하라 1988‘의 덕선이 언니 성보라처럼 제가 대학에 간 후에는 용돈벌이도 할 겸 녀석들을 모아놓고 과외를 하기도 했는데, 인석들....공부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누나, 연애해봤어요? 남친 있어요?“
고 나이 때 머슴아들이 의례 그러하듯이 왕성한 호기심과 짓궂은 장난질로, 정작 공부는 뒷전이고 저한테 연필로 머리를 콕콕 찔려가며, 때로는 스트라이크로 날아가는 지우개를 요리조리 피해가며 아무 말 대잔치를 하기 바빴습니다. 아파트 단지안에서 교복입고 여자친구 손을 잡고 가다가, 시험기간에 독서실 간다고 해놓고 pc방에서 땡땡이 치다가, 금지된 빨간 비디오를 책장 문제집 사이에 숨겼다가 저한테 딱 들켜서 각자의 엄마들한테 말하지 말라고 싹싹 빌며 애걸복걸을 하기도 하고요. 고걸 이용해서 저는 6명을 골고루 돌아가며 심부름을 시켜먹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코찔찔이때부터 봐왔던 여섯명의 꼬마들이 어느덧 의젓한 청년들이 되어서, 저의 결혼식 때는 부탁도 안했는데, 어느새 지들끼리 조를 짜서 식장에서 하객들 안내도 하고, 축의금도 받고, 언제 몰래 연습을 했는지, 서툴지만 그럴듯한 화음으로 감동적인 축가도 불러주었습니다. 어느새 세상에 꼭 필요한 빛과 소금같은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기 자리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녀석들을 보면, 이제 다 큰 성인 남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 눈에는 여전히 장난꾸러기 꼬마들처럼 보여 기특하고 신통방통하기만 했죠.
그 중에 한명, H가 얼마 전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와, 서울시내 top 10대학중 하나에 교수로 임용되었고, 공부하느라 미뤄두었던 결혼식도 올렸습니다. 유학 중에 만났다는 이쁘고 지적인 신부에게 하객들 앞에서 약속의 키스를 하며 환하게 웃는 H와 그런 아들을 보며 살짝 눈물을 훔치시는 H의 어머니를 보니, 비어있는 아버지의 옆자리가 유독 쓸쓸해 보였습니다. 옆자리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시는 우리 엄마도 어느새 눈물을 닦고 계셨어요. 한편으로 저는 힘든 지난 시간을 잘 이겨내고 누구보다도 ’효도하는 자식‘이 된 녀석이 너무나 대견하고 기특해서 저도 모르게 엄마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H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처음 겪는 부모님의 죽음에 당사자인 H뿐만 아니라 제 동생과 친구들 그리고 저까지 큰 충격을 받은 사건이었습니다. 5명의 아이들은 3일 밤낮으로 교대도 하지 않고 모두 함께 장례식장을 지켰고, 장례식이 끝나고 나서도 친구가 슬픔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아침마다 다 같이 모여 등교하고, 하교길에는 같이 농구를 하자며 H를 운동장으로 끌어내는 등 각별히 신경을 써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나고도 한참이 지나도록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아버지를 잃은 충격때문이었는지 H는 한참 동안이나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한참 예민한 시기에 가장 사랑하고 존경했던 아버지를 잃은 H는 점점 방황하기 시작했어요. 상위권이던 성적은 뚝뚝 떨어지고, 학교도 결석하고, 엄마한테 반항하고, 노랗게 머리를 염색한 여자친구까지 생겨서 밤늦게까지 아파트 단지 안에서 손잡고 돌아다니다가 제게 들킨 적도 있었습니다.
길을 잃은 H도 힘들었겠지만, 누구보다 힘들어 하신건 H의 어머니였어요. 6인방 어머니들 중에 가장 나이가 많으셨던 우리 엄마를 형님이라 부르며 언니같이 의지하셨던 그 분은, 남편잃은 슬픔이 가시기도 전에, 세상 착하기만 하던 아들이 점점 변해가는 모습에 가슴을 치시며,
”형님, 어떡하면 좋아요.. 쟤가.... 아빠가 없어서 저러나봐요....어떡해요..쟤까지 저러면 저 진짜 못 살아요...“
요리 솜씨가 좋아서 6인방 아이들은 물론 엄마들에게도 일주일 식단을 책임지는 '빅마마'같은 역할을 했던 아줌마가 몰라볼만큼 수척해진 얼굴로 우리 엄마를 붙들고 한없이 흐느끼실 때, 그 모습이 너무 맘이 아파 저도 엄마도 같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고등학교 1학년 시기가 다 지나도록 마음을 못잡는 아들을 보다 못해 어머니는 결국 이사를 결심하셨어요. 돌아가신 남편 분의 흔적이 구석구석 남아있는 넓은 집을 지키는게 힘들고 무서워서 가는 거라고 하셨지만, 실은... 영 공부에 손을 놓아버린 듯한 H를 같은 단지에 사는 여자친구 하고라도 떼어놓으려고 내린 결단이라는 것을 우리 엄마는 알고 계셨습니다.
아줌마로서도 쉽지 않은 결정이셨을 겁니다. 안 그래도 남편의 빈자리가 허전하고 아프실텐데, 그나마, 이곳엔 십수년을 가족같이 지내며 친자매 못지 않은 사이가 된 6인방 엄마들이라도 있지, 거리상으로는 가깝긴 해도, 행정구역상 '구'가 달라지는 그곳엔 아는 지인 하나 없다고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결국, ’응답하라 1988‘의 마지막 회처럼 6인방의 엄마들과 눈물 콧물 쏟으며 차마 떨어지는 발길을 돌리지못해 몇 번이고 같은 작별인사를 반복한 끝에, H의 가족은 아파트 숲 사이를 흐르는 작은 강을 건너 옆동네로 이사를 갔습니다.
차로 고작 15분 남짓,거리상으로는 가까웠지만, 아이들이 고2가 되고, 가장 치열한 고3 시절을 맞으며, 아이들도 엄마들도 입시 준비로 정신없이 바빠졌고, 하루가 멀다하고 만나시던 우리 엄마와 H의 엄마는 점점 전화로 안부 인사를 대신하게 되었어요. 저 역시 대학 생활에, 연애하느라, 취업 준비에 바빠 가슴 아픈 H의 일은 점점 잊게 되었네요. 제 동생이 대학 입학을 하고, 얼마 안있어 휴학을 하고, 다시 재수 준비를 하고, 군대를 다녀오고.. 하는 동안 엄마를 통해 간간히 H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H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공부를 했지만, 방황기의 공부 공백을 결국 극복하지 못해 원하던 SKY중에 한 곳이 아닌 다른 곳에 입학을 했으나, 결국 만족하지 못해 절치부심하여 유학을 떠났고, 유학 과정에서 구체적인 꿈과 목표가 생겨 각고의 노력 끝에 아이비리그로 편입을 하고,길고 힘든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고,... 원채 머리 좋고 성실한 아이였기에, 다시 자신의 본 궤도를 찾아 멋지게 나아가고 있고, 한때의 지독한 방황 덕분에 오히려 더 큰 세상에서 나가 꿈을 펼치고 있구나.. 싶어서 누나의 마음으로 기쁘고 대견했습니다.
세월이 지나 어느덧 길고 힘든 박사 과정을 마치고, 이제 한 여자의 남편으로, 한 집안의 가장으로, 대한민국 사회의 자랑스러운 지식인이자, 존경받는 구성원으로 돌아온 H와 H의 아름다운 신부에게 우리 엄마와 저를 비롯한 5명의 친구들은 진심으로 축복을 보냈어요.
그리고, 속썩이는 아들을 끝까지 믿고, 지지하고, 남편도 없이 혼자서 먼 타국에서 공부하는 아들 뒷바라지 하느라 정말 애썼다며, 아직도 눈물을 글썽이시는 아줌마를 엄마와 제가 번갈아 꼬옥 안아드렸습니다.
”인제 진짜 숙제 다 끝냈으니 예전처럼 가까이 살면서 자주 만나고 맨날 놀러다닙시다.형님..“
하시며 아줌마는 비로소 환하게 웃으셨어요.
그렇게 결혼식이 끝나고 난 후,
결혼식에 와주셔서 감사하다고 아줌마는 엄마를 집에 초대하셨어요. 그 이후로도 두 분은 예전처럼 하루가 멀다하고... 까지는 안되어도 적어도 한 주에 한 번 정도는 예전처럼 종종 왕래하며 ’자식 뒷바라지 숙제‘ 마친 기념의 시간을 마음껏 즐기셨습니다.
엄마는 오늘도 아줌마네 집에 놀러가신다며 핸드백과 함께 빼놓지 않고 작은 가방을 하나 챙기십니다. 두 분이 시장이라도 함께 가시냐구요? ㅎㅎㅎ 그게 아니라, 그 가방은 샴푸, 바디클렌저, 때밀이 수건, 얼굴팩 등이 빽빽이 들어찬 목욕 가방입니다. 그럼 두 분이 만나 목욕탕에 가시냐구요? 아니요.. 그것도 아닙니다.
아줌마가 사시는 아파트 안에는 관리비 3만원으로 모든게 해결 가능하다는 ’커뮤니티 센터‘라는 게 있어서, 엄마는 아줌마와 함께 아파트 주민들에게만 개방되어 북적이지 않고 늘 여유로운 사우나에서 사우나와 목욕을 즐기시고 난 후, 커뮤니티 센터 카페에서, 작은 폭포수가 그림같이 쏟아지는 초록 정원을 바라보며 싸고 맛있는 라떼 한잔을 앞에 놓고 행복한 수다타임을 하고 스트레스를 풀고 오시곤 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아줌마가 이사갈 때 눈물 바람으로 울며 건너간 그 작은 강은 바로 그림같은 양재천이 지류로 흘러드는 ’탄천' 입니다. 아줌마가 이사간 동네는 TV에서 부동산 폭등 기사가 나올때마다 어김없이 자료화면 맨 처음에 등장하는 은마 아파트가 있는 곳이었고, '은마'가 '금마'되길 기약도 없이 하염없이 기다리는 와중에 아줌마가 울며 이사한 그 아파트는 이 동네에서 가장 먼저 재건축에 성공하여 환골탈퇴한 모습으로 강남신축 대장주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사 갈 때만 해도 가진 돈이 부족해, 최대한의 예산으로 선택 가능한 집이 못난이 탑층 뿐이라고 한숨을 쉬시던 아줌마는, 오히려 탑층인 덕에 조합원 로얄군 추첨의 우선권을 가지게 되었고, 신의 한수로 대모산이 그림같이 보이는 탁 트인 맨 앞동, 심지어 지하철과 제일 가까운 고층 남향 최고 로얄인 45평을 뽑으신거죠. 현재, 네이버 시세는.. 뭐.. 직접 찾아보시면 되겠습니다.^^
저는 지금도 H의 어머니를 볼 때마다 슬쩍 눈을 흘기며,
“이모!!! 울엄마 손을 끌고 강을 같이 건너갔어야지!!!! 치사하게 혼자 가기예요?”
따지듯 종알거립니다. 울 엄마가 84년 입주 당시 강 건너 청실아파트와 2천만원인가 차이났다던 우리집은, 재건축 말만 무성하고 조합원들끼리 진흙탕 싸움을 하는 바람에 진도가 전혀 나가지 않고 새집이 되기엔 아직 갈 길이 멀고 멀어 지금은 가격 차이가...ㅠㅠ 눈물을 훔치는 것을 대신으로...말하지 않겠습니다..가슴 아파서 생각하기도 싫으네요...ㅠㅠㅠ
속 썩이던 자식은 뒤늦게 정신을 차려 아이비리그를 졸업하고 국내 유명 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그 아들 맘 한번 잡아보겠다고 눈물 바람으로 이사한 그 집은 재건축을 거치며 어마어마한 차익을 남겨준 ‘효도하는 집’이 되었습니다.
‘속 썩인 자식이 효도한다’ 는 옛말이 정말 틀린게 없나봐요. ㅎㅎㅎ
물론 그 당시만 해도 탄천 이쪽 저쪽이 지금처럼 어마어마하게 차이가 나기 전이고, 아파트 가격이 지금처럼 폭등하기 전이라 단순 비교는 어렵겠지만요.
잘 고른 재건축 아파트가 다른 어떤 투자보다 제일 돈벌어주는 효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는 이미 몇번의 부동산 사이클을 통해서 경험을 해왔지요. 비록 지금 진도가 안 나가 속을 썩이는 재개발, 재건축을 보유하셨다거나 혹은 순간의 선택으로 자산 상승의 기회를 놓쳤다고 안타까운 마음 고생을 하는 분이 있더라도, 내 예산내에서 최대한 원기옥을 모아 내 상황에서 선택 가능한 제일 좋은 곳에 큰 돌을 먼저 하나 넣어놓고 하루하루 일상을 살다보면, 말썽쟁이 사춘기 아들이 어엿한 대학교수가 되어 돌아오듯 큰 효도 할 날이 분명히 올겁니다. 혹은 그 원기옥을 아직 모으고 계시는 분들이라면 언젠가 기회가 왔을때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하고 공부하는 것도 필요하겠지요.
비단 부동산 뿐일까요 인생은 길고, 연속된 불행처럼 보였던 일련의 일들이 훗날 보면 행복의 씨앗이 되기도 하죠. 또 그 반대인 경우도 있구요. 그러니.너무 조급한 마음을 가지지 말고, 지난 일을 후회하지도 말고, 다가올 일을 미리 걱정하지도 말고, 오롯이 현재의 내 삶에 감사하며 하루하루 충실하다보면, 아득히 멀게만 느껴지던 기회가 어느새 은근슬쩍 뒷문으로 다가와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아이들도, 우리의 자산들도 모두 ‘효도하는 자식’이 될 그 날을 기쁘고 충만한 맘으로 기다려보면 어떨까요?
그 날이 오면, 주저말고 그 강을 같이 건너갑시다.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