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이 빈곤해서인지, 아니면 오히려 너무 상상력이 풍부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나 드라마에 쉽게 몰입하지 못하는 편이다. 화면 속으로 들어가 그 인물들과 그들의 이야기에 푹 빠져들어야하는데, 작품 속 배역이 아닌 광고의 혹은 예능 프로그램 속의 배우가 먼저 보여 당최 집중이 안되는 것이다. 작품 속 배경이 되는 공간이 나의 일상과 동떨어진 곳이면 그 공간에 들어가 앉아보고 싶은 생각조차 안드니, 창작자의 입장에서 나는 편협하고 옹졸하고, 상당히 까다로운, 즉 재수없는 관객일 터이다. 그러니 끝까지 몰입해서 본 영화가 별로 없다. 연애할 때 이후로는 아예 극장에 가질 않는다. 어차피 잠들게 뻔하므로. 비싼 돈내고 시끄러운데서 불편하게 자느니, 집에서 편히 자자 싶은 맘이랄까. 전세계가 열광을 한다길래 그래, 이 정도 난리면 동시대인으로서 한번은 동참은 해야지 싶어, 아이와 함께 아바타와 마블 어벤져스 시리즈 한두개를 보긴 했지만 역시 앞부분 몇분 이후로는 기억이 없고, 눈을 떠보니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와중에 이렇게 시끄러운데 잠을 잘 수 있는 나를 놀랍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던 남편의 얼굴만 기억에 남는다.
그래도 TV 드라마는 좀 나은 편이다. 아무래도 단 2시간에 모든 서사를 압축하는 영화보다는, 드라마의 회차가 이어지며 이야기의 호흡과 시간의 흐름이 좀 더 여유롭고, 일상의 인물들과 소재들을 다루는 경우가 많으니 영화보다는 좀 더 '열린 마음'으로 보게 된다고 해야하나. 그러나 고뇌에 찬 우수어린 눈빛의 배우의 연기 너머로, 방금 전 자동차 보험 광고 속의 그의 환한 미소가 겹치고, 자다가 눈을 떠보니 타임슬립을 한 미래에서 온 주인공이 과거의 연인을 구하려 '업고 튀는' 장면에 이르면, 그만 몰입도가 흐트러져 더 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차라리 소설이나 극본은 내 마음대로 배우도, 배경도, 장면도 상상할 수 있으니 영상이 수반되는 영화나 드라마보다 훨씬 자유롭고 몰입이 쉽다. 나는 관객으로서는 까다롭지만 독자로서는 상당히 너그러운 편인 듯 하다.
이런 나이지만, 내게도 열번도 넘게 정주행한 인생 드라마가 있다.
나를 비롯한 많은 드라마 덕후들의 인생 드라마 리스트에 항상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나의 아저씨'. 이제는 고인이 된 그의 낮은 저음이 그리울 때, 다시 듣기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아카이브가 아닐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이다. <또 오해영>, <나의 해방일지> 등 발표하는 작품마다 많은 이들의 인생 드라마 라인업을 새로고침 하게 한 박해영 작가님의 모든 작품을 좋아하지만 내게 단 하나의 인생드라마는 이제껏, 그리고 앞으로도 단언컨데. <나의 아저씨>.
작정하고 1회부터 이어서 정주행 한것도 여러번, VOD 서비스를 통해 시시때때로 해주는 재방을 만날 때마다 자석에 이끌린 듯 멈춰서, 문득 생각나는 장면을 검색해서 유튜브로, 잠이 안오는 밤 OTT 서비스의 아무 회차나 랜덤으로 본 것까지 치면 그야말로 수십번도 넘게 봤는데도, 여전히 모든 장면이 볼때마다 새롭고, 낯설고, 익숙하고, 그립다. 다음 대사는 물론이고 대사의 호흡, 배우들의 시선 처리, 동선까지도 다 외웠을 만큼 많이 봤는데도, 여전히 화면속 배우들의 이어지는 대사를 숨죽여 기다리며 어김없이 또 눈물을 쏟고 마는 것이다.
이 작품을 좋아하는 것을 넘어 거의 '흠모'와 '추앙'( <나의 해방일지>에서 생소하기 짝이 없는 이 비일상어를 일상의 단어로 만든 작가님의 영향력이란!)하는 수준이지만, 모두가 인정하는 좋은 작품이어서 오히려 '저 이 드라마 좋아해요' 라고 하기가 좀 민망했었다. 나처럼, 종영한 후 6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드라마에 빠져있는 분들이 많다는 것은, 블로그나 유튜브에 수없이 올라와 있는 훌륭한 작품 해석과 탁월한 감상평이 보여주고 있고, 게다가 작년에 안타까운 일로 고인이 된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었던 그를 추모하는 글까지 합치면 <나의 아저씨> 에 대한 글은 이제 식상하기조차 해서 나까지 보태는게 좀 열없다 해야할까. 그냥... 볼 때마다 어김없이 울게 되니, '울고 싶은 날 뺨 때려줄 손'의 역할로 가끔 찾을지언정, 굳이 미주알 고주알 기록을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주말 오후, 체육관 트레이드 밀에서 헉헉거리며 뛰다가 그 '지안이와 아저씨' 를 다시 만난거다. 이거이거....타이밍이 이건 아닌데... 뛰다가 울면 자빠지기 딱인데... 싶으면서도 채널을 돌리지 못하고 또다시 자석처럼 붙들리고 말았다. 연속방송을 하고 있었던 듯 <14-마지막회> 중 15회차 방송이었다. 그동안 지안이 자신을 도청해왔던 것을 동훈이 알게 되고, 자취를 감춘 지안을 찾아헤매다가 가까스로 다시 만나게 된 장면.
"그러니까 네번이상 잘해주지 말랬잖아. 왜 잘해줘서 이런 꼴을 당해요"
잘못했어요는 커녕 ,날을 바짝 세우고 씹어뱉듯 작게 으르렁 거리는 지안에게 동훈은 말한다.
"고맙다."
고맙다.
그지같은 내 인생 다 듣고도
내 편 들어줘서 고마워.
고마워, 나 이제 죽었다 깨어나도 행복해야겠다.
너, 나 불쌍해서 마음아파하는 꼴 못 보겠고,
난 그런 너 불쌍해서 못 살겠다.
너처럼 어린애가
어떻게, 나같은 어른이 불쌍해서
나, 그거...
마음 아파서 못 살겠다.
내가 행복하게 사는 걸 보여주지 못하면
넌 계속 나때문에 마음 아파할꺼고.
나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너 생각하면
나도 마음 아파서 못 살거 같고.
그니까 봐.. 봐!!
내가 어떻게 행복하게 사는지 봐!
다 아무껏도 아니야.
쪽 팔린거?
인생 망가져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거?
다 아무껏도 아니야. 행복하게 살 수 있어.
나 안 망가져. 행복할꺼야.
....아저씨가..정말로 행복하길 바랬어요.
어. 행복할꺼야.
행복할께.
<나의 아저씨 15회 지안과 동훈의 대사 중>
수도 없이 보며 울컥.했던 장면이었다. 동훈을 좋아하고 지키고 싶으면서도 그 맘을 표현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날선 표정과 말로 방어벽을 치고 있던 지안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책망하지 않고 오히려 '고맙다' 하는 아저씨 앞에서 마침내 무너져 울음을 터트리며 말한다.
"아저씨가.. 정말로 행복하길 바랬어요..."
달리던 트레이드 밀의 속도를 늦추고 걸으며 보다가 숫제 멈춰서 엉엉 울었다. 내가 동훈이 되어 어린 지안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 같기도 했고, 내가 지안이 되어 동훈의 말을 듣고 있는 듯도 했다.
사기를 당하고 가진 자산을 거의 다 잃으며 가장 힘들었던 것은 '수치심' 이었다. 멍청하기 짝이 없게 사람잃고 돈 잃고, 그걸 만회해보겠다고 내린 결정이 오히려 점점 더 큰 손해를 불러오고... 그야말로 빠져나올 구멍없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이 모든 결정와 책임이 결국 나에게 있으니 자책이 점점 커졌다. 나를 아는 모든 이들이, '쟤 이제 인생 망가졌다.' 수군거리는 것 같아, 그야말로 쪽팔려 땅 파고 스스로를 묻어버리고 싶은 날들이었다. 그런 내게 화면 속 아저씨가 말하고 있었다.
'아무껏도 아니야. 쪽팔리는 거, 인생 망가졌다고 사람들이 수군거리는거 다 아무껏도 아니야. 행복하게 살수 있어. 행복할께.'
나는 그걸 말하는 어른 동훈이 되었다가. 그걸 듣는 지안이 되었다가... 옆에서 걷던 회원들이 힐끔거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많이 울었다. 꾹꾹 눌러참고 있었는데 누가 눈물 버튼이라도 눌러준 것 같이 창피한 줄도 모르고. 그동안 그토록 여러번 봤지만, 대차게 자빠져 인생 바닥치고 나서 다시 보는 '나의 아저씨'는 쪽팔려 못살겠는 내게 진짜 큰 위로가 되었다.
암껏도 아냐... 행복하자...
이제 1주기가 다가오는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많은 얘기들이 오고 갔다. 어디서부터 거짓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알 수도 없고, 이미 그는 가고 없는데 그걸 언급하는게 무슨 소용일까.
아이유는 이제는 더 이상 소녀가 아니고, 그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을.
"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는가"
"네.....네!"
마지막 장면에서 동훈이 오랜만에 다시 만난 지안에게 물었듯, 그 역시 편안함에 이르렀기를.
그리고, 나도 이제는 벗어나, 조금씩 더 편안함에 이르기를.
이 글을 읽어주신 모든 브런치 작가님들도 부디 편안함에 이르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P.S 생각해보면, 나의 아저씨가 방영되었던 2018년에 이미 아이유도 이선균도 탑스타였다. 화려한 그들이 화면에서 세상 가장 불쌍한 아저씨와 지안을 연기하는데도 왜 나는 다른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몰입할 수 있었을까. 배우들의 연기력이라고만 하기엔 뭔가 석연치가 않다. 결국은 잘 만든 이야기의 힘이 아닐까 싶다. 가짜가 아닌 진짜 이야기. 작가의 진심이 담긴. 땅에 발을 오롯이 붙인 작가가 자기 안에서 꾸역꾸역 끌어올린 살아 숨쉬는 이야기. 브런치 작가가 된 후 다시 보는 나의 아저씨에서 이전에 안보였던 몰입의 이유를 찾은 듯 하다. 그걸 이제야 알다니.. 수없이 본 인생 드라마라면서 넌 대체 그동안 뭘 본거니 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