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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아 Oct 28. 2024

나의 세입자님 집은 강남

<프롤로그>

서울 달동네 재개발 딱지에서 시작해서 결혼 20년만에 강남 3채와 한강변 재개발까지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6살 아들 장가 밑천에 노후 준비까지 끝났다고 생각한지 3년만에 다 잃고, 다시 원점보다 못한 마이너스가 되었습니다. 미치고 환장하게 아까워서 몸의 병, 마음의 병을 얻었지만.이제야 비로소 집은 '사는것'이 아니라 '사는 곳' 임을 깨달습니다.

고통의 시간 속에서 얻은 성찰과 깨달음을 웃기는 글 속에 녹여 마시렵니다. 깨달음이 혈관을 타고 흘러 오롯이 양분이 되어 부디 저를 더 성장하게 해주길 바래봅니다.




"이봐요, 새댁...."
굳은 표정으로 가운데 놓인 테이블을 지나 제게로 다가온 사모님은 한숨을 쉬며 알겠다고 계약하자고 하셨습니다. 저희 집이 상당히 맘에 드셨던 것 같아요. 젊은 새댁이 참 ‘야물딱지기도’ 하다며 자신도 젊어서 그렇게 악착같이 살면서 아이들 키우고, 강남에 집도 사고 했다며 더 좋은 곳에 가서 잘 살라고 덕담까지 해주셨습니다. 한치도 양보없이 팽팽히 서로 고집을 부리다가 막상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너무 죄송스럽기도 하고, 저희 엄마, 아빠 뻘 되는 분들께 예의가 아니었던 것 같아서 얼굴이 화끈거리더라구요. 그렇다고 그제서야 깎아드리겠다고 할 수도 없고... 지금 생각해보니, 수천만원도 아니고 고작 백만원도 안 깎아드리겠다고 그렇게 고집을 부렸던 건, 구석구석 애정 가득 예쁘게 만든 집에 얼마 살아보지도 못하고 월세를 전전하며 남 좋은 일만 시켰다는 생각에 속이 상해서, 그 분풀이를 하듯 강짜를 부렸던 것 같습니다.


강서구 화곡동에서 오셨다는 그분들은, 당시 5층 아파트 재건축이 한창이던 시절, 강남구 도곡동 주공 아파트를 팔아 아드님 결혼할 때 집을 장만해주시고 남은 돈으로 서울 집을 장만했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마지막 집으로 노후를 보낼 곳을 찾다가 살기 좋다고 이름난 분당을 선택하셨고, 초록 나무가 정원처럼 보이는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4층 저희 집이 마음에 쏙 드셨던 거죠. 재건축이 되기 전 도곡동 집을 팔았는데, 지금은 너무 말도 안되게 올라버려서 솔직히 한동안은 하필 그때 장가를 가겠다고 나선, 아들도 며느리도 너무 미웠다고. 사모님은 이제 다 지난 일이니 웃으며 얘기하지만 솔직히 아직도 속이 말도 못하게 쓰리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제 눈을 똑바로 보며 말씀하시는 거예요.

“새댁, 강남에 집을 사요!!!”

확신에 찬 사모님의 눈빛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네요.     


그렇게 몇 년 살아보지도 못하고 서현동 집은 완전히 제 손을 떠났습니다.그래도...매도시기를 놓치고 나서 집값이 많이 빠져 마음 고생을 했었는데, 100%는 아니어도 거의 회복된 금액에 매도를 하게 돼서 다행이다 싶었어요. 전세값을 빼고 양도세를 내고 나니 마치 바람빠진 풍선처럼 매도한 금액보다 훨씬 쪼그라든 돈만이 수중에 남았습니다.        


암튼, 또 집을 팔았으니 다시 사야죠. 당시 판교가 한참 터를 닦고 조성될 무렵이었는데 언론에서는 ‘판교의 후광을 입고 분당이 예전의 명성을 찾을 거다.’ 이런 기사가 나올 무렵이었습니다. 근데... 부동산의 ‘부‘자도 모르는 우리 남편이 무심히...

“바로 옆에 온통 새집이 들어오는데 낡은 집만 있는 분당에서 나가야 되는 거 아닌가?“.

이러드라구요. 듣고 보니 그 말도 맞는 것 같아 서울에 집을 사기로 하고 찾아다니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전세주고 월세로 사는 동안 집값이 다시 회복되는 것을 보면서, ‘투자와 실거주의 분리’에 눈을 뜬 거죠. 처음부터 전세를 끼고 매수를 염두에 두니 저희의 예산보다 살 수 있는 집의 범위가 좀 더 넓어지더라구요. 또 전문용어를 잠깐 빌려오자면, 본격적인 ‘전세 레버리지’를 이용하게 된 거죠. 이걸 지금은 ‘갭투자’라고 하더라구요. 그때는 갭투자고 뭐고, 아무것도 몰랐을 때고, 가진 돈보다 더 비싼 집을 살 수도 있다는 것만 신기했던 생각이 납니다. 어차피 전세값은 내 돈이 아니니 ‘조삼모사’인 격인데, 참...자꾸 커밍아웃해서 죄송하지만. 네... 제가 바로 그 ‘작은 또띠’입니다. ㅎㅎ   

  

약 4개월간 수많은 손품과 발품과 부동산 탐방을 거쳐 마침내 3군데 정도로 범위를 좁혔습니다. 처음에는 가진 금액이 너무 작아 언감생심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집을 보러 다니면서 자꾸만 그날, 서현동 매도 계약하던 날 사모님이 제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새댁 강남에 집을 사요사요사요사요~~~‘

하는 목소리가 자꾸만 들리는 듯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한번 알아나 보자 하고 찾아간 강남 부동산에서 운명처럼, 매도자가 갈 집을 먼저 매수하고 잔금일이 다가오는데 집이 안 팔려 완전히 급해지는 바람에 기존 매물보다 초초급매로 나온 집을 만났습니다. 초초급매였어도 분당을 팔아 전세금 빼주고 남은 돈으로 강남을 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인간은 경험의 동물이잖아요. 제게는 ‘전세 끼고 매수 가능’ 과 ‘대출가능’ 이라는 새로운 <생각의 옵션>이 장착된 후였습니다. 대출 때문에 그렇게 고생을 했지만 이 집을 꼭 사야겠다는 생각에 ‘대출할 결심’이 의외로 손쉽게 내려지더라구요.     


당시 세입자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집을 안보여 주길래... 쿨하게, ‘어차피 내가 살 집도 아닌데 봐서 뭐해’ 하고 바로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집을 안보는 조건으로 이미 초초급매인 가격에서 천만원을 더 깎아달라고 했고, 당장 내일 모레 잔금을 치러야하는 주인 입장에선 울며 겨자먹기로 들어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부동산에 대한 지식이 조금이나마 생긴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완전 ‘매수자 우위’ 였던 상황이었죠.       


그렇게, 눈물 바람으로 분당집을 판 저는 생애 최초로 강남집을 매수했습니다. 분당집을 매도한 돈에 대출 포함 ‘9천만원’을 보태서요.그리고,그곳은 지금 서울에서도 가장 비싼 지역인 ‘반포’였어요. 2010년 당시만 해도 분당집을 매도하여 1억 정도만 보태도 갈아타기가 가능했던 시기였습니다. 지금은...뭐. 말씀 안드려도 아실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은 이 부분에서 아마 '와C! 대박!' 하시겠죠. 2024년 지금의 부동산 상황에서 보면 그 선택은 정말 신의 한수였으니까요. 네. 돌아보니 그랬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제 분당집을 매수한 사모님은 제 인생의 귀인이셨죠.


사는 곳은 여전히 분당의 원룸 오피스텔이었지만 이제 저는 ‘강남에 집 산 여자’ 가 되었습니다.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말이 뭔지 실감하겠더라구요. 길을 가다가도, 운전을 하다가도, 실실 웃음이 나왔고 월급의 대부분이 대출 이자로 나갔어도 일할 맛이 났습니다. 그 집에 살지 못해도 전혀 상관이 없었어요. 어차피 법적으로 그 집은 ‘내 집’ 이었으니까요.     


반포집을 매수하고 얼마 후, 거짓말처럼 집값이 다시 폭락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이미 분당에서 한번 경험했었기에 처음처럼 별로 무섭지 않았습니다. 집값은 주식과 다르게 떨어져도 다시 언젠가는 예전 가격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한번 학습하고 나니 별로 두려울 것도 없었고, 그래도 강남인데.... 하는 믿음도 있었나 봅니다.     


훗날, 지나고 부동산 가격 추이그래프를 보니 그때가 2009년부터 시작되어 이후 본격화된 2012-13년 하락기 구간 동안 잠깐의 ‘반짝 반등시기’ 였더라구요. 당연히 뭘 알고 사고팔고 한 건 아니었습니다. 뭐든 지나고 보니 보이더라... 인거죠.

개인적으로 12,13년에는 부동산 등락에 신경쓸 겨를이 없어서 폭락의 공포를 느낄 새도 없었습니다. 2004년 결혼 후, 아이도 미루고 집 장만하겠다고 아등바등 살다가, 결혼한 지 8년 만에 생긴 아기를 만나 (네.. 저의 다른 브런치북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바로 그 장초딩입니다.ㅎㅎ) 초보 엄마 연습을 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부동산 가격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오히려 맘 편히 지나갔던 것 같아요. 그러나 그때도 가끔씩 시세표를 보면서 하락기에 다른 지역에 비해 강남은 그래도 탄탄한 하방 경직성을 가지고, 오를 때는 더 많이 오른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 무렵 살던 분당의 오피스텔이 계약 만료가 되면서 이사를 가야했고, 저는 이제 ‘살’ 집을 찾아야 했습니다. 이미 분당에서 무모한 대출로 이자의 무서움을 경험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지출을 최대한 줄여야 했어요. 서울 변두리 위주로 교통도 불편하고, 주위에 초등 학교도 없고, 변변한 편의 시설도 없는 곳을 일부러 찾아다녔습니다. 집을 ‘살 때’ 중요하게 고려해야 하는 점을 반대로 하는 발상의 전환을 한 거죠.  

    

마침 남편과 제 직장 중간쯤 거리에 이제 막 입주하기 시작한 대단지 아파트가 있었어요. 앞서 언급한 불편한 점을 차치하더라도, 원래 아무리 인기많은 지역일지라도 보통 입주 초기에는 전세 물량이 많아서 전세가가 내려가기 마련입니다. 대단지 중에서도 가장 인기 없는 구석동의 가장 인기없는 1층 전세를 일부러 구했습니다. 1층은 인기가 없었지만 저는 오히려 좋았어요. 화단 앞에 초록색 나무도 보이고, 좀 이르다 싶은 생각이긴 했지만 곧 태어날 아기가 걷고 뛰게 되었을 때, 아랫집 눈치 안봐도 되니 오히려 좋겠다 싶기도 했습니다. 집 주인분이 지방분이라 서울 물정에 어둡고, 당분간은 서울에 올라와 살 일이 전혀 없다는 점도 그 집을 결정하는데 큰 이유가 되었어요. 여러모로 딱 맞춤한 집이었습니다.


이렇게 가장 비싼 동네의 집을 ‘산’ 저는 가장 싼 동네의 집에 ‘살게’ 되었습니다. 뭐 어때요. 신축 아파트니까 깨끗하고 쾌적하긴 했죠. 교통이 불편한 건 좀 더 일찍 일어나 부지런을 떨면 되었고, 백화점이나 대형마트가 없으면 안가면 그만, 아이가 나오기 전이라 학교가 없는 것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그러나 실은, 이 모든 것을 기분좋게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던 건 ‘내 집은 강남에 있다!’ 라고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던 듯 합니다.     


신축이라 깨끗하다는 것 말고는 모든 것이 불편한 1층 그 집에서 아이도 낳았고 (장초딩의 볼볼볼, 아장아장하던 시절의 모습이 구석구석 남아있네요) 아이의 어린 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집이 되었죠. 그런데, 그 집과의 인연은 거기서 끝이 아니라 거기서 이사를 간 후에도 엄청난 인연으로 다시 만나게 됩니다.      


과연 그 후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요? 위의 프롤로그를 기억하신다면 지금 이 글에서 좋아하고 있는 제 모습이 참.. 안쓰럽게 느껴지시리라 생각합니다. 한치 앞을 모르는게 인생이라더니...

그때는 몰랐습니다. 저는 어리석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좁고 동그란 하늘을 쳐다보며 ‘개굴개굴’ 행복을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그 우물에 곧 무시무시한 농약물이 퍼부어질 줄도 모른 채 말이죠.

    

눈물없이 들을 수 없는 다음 이야기.

새끼있는 어미가 세상을 등지겠다 결심까지 하게 만든 슬픈 이야기.

가슴이 찢어지고 목이 메어서 500원으로는 안되겠습니다.

궁금하면 600원!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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