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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아 Oct 13. 2024

초록 정원이 있는 집

<프롤로그>

서울 달동네 재개발 딱지에서 시작해서 결혼 20년만에 강남 3채와 한강변 재개발까지. 

6살 아들 장가 보낼 준비에 노후 준비까지 끝났다고 생각한지 3년만에 다 잃고, 

다시 원점보다 못한 마이너스가 되었습니다. 

미치고 환장하게 아까워서 몸의 병, 마음의 병을 얻었지만.

이제야 비로소 집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 임을 깨달았습니다. 

고통의 시간 속에서의 성찰과 깨달음을 웃기는 글 속에 녹여 마시렵니다. 

깨달음이 혈관을 타고 흘러 오롯이 양분이 되어 

부디 저를 더 성장하게 해주길 바래봅니다.




그렇게.. 불그죽죽한 체리몰딩과 시뻘건 꽃무늬 벽지와 함께

여기저기 '나쁜 년' 이라는 선명한 주홍글씨가 찍힌 저는 

검푸르게 우울한 맘으로 언덕배기 끝집의 봉천동 새댁이 되었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이직을 준비하기 위해 퇴사를 한 후였기 때문에 

남편이 출근한 후에도 전 홀로 집에 남아있어야 했어요. 

뜯다말아 너덜너덜해진 천정 몰딩은 아버님이 새로 칠해주셔서 깨끗해졌지만

여전히 붉은 체리몰딩은 눈치없이 온 집안을 가로지르고 세로지르고 있었습니다. 

신혼 3개월, 멀쩡한 거실을 두고도 침실에서만 생활을 해도 모자랄 새댁이

시뻘건 꽃송이들이 침대 머리맡 가득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는 

신혼의 침실에 들어가도 싫었으니,

(헙...  혹시, 브런치에 19금 심의위원회가 있나요?^^;;;)

보글보글 된장찌개 끓여놓고 퇴근하는 남편을 기다리는 

신혼의 로망을 실현해보기는 커녕, 

이미 이 집에 정을 붙이기도 글러먹은 일이었습니다. 

친구 하나 없는 낯선 동네에서 

혼자 어디를 맨날 나갈 수도 없고, 

오도카니 집에 혼자 있는 게 그야말로 고역이었어요.


그런데 그런 저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한 층에 일곱 가구씩, 복도식 구조였던 저희 집은  

언덕배기 끝동이라 경사진 지형을 고려해야했던 듯, 

엘리베이터 박스를 사이에 두고 

한쪽엔 1호,2호 다른 쪽에 3호부터 7호까지 있는 다소 균형이 맞지 않는 구조였는데

저희 집이 302호라서 301호와 저희 집만 복도를 공유했어요.     


이사 온 첫 날,

아기 자전거와 유모차를 비롯하여 

온갖 잡동사니가 복도에 어지럽게 나와 있고, 

활짝 열린 문을 통해 아이 울음 소리가 들리길래

어린 애가 있는 집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날 저녁은 물론 다음날 아침에도 

아이 울음소리와 아이를 혼내는 엄마의 큰 목소리가 들려서

처음에는 아이가 상당히 개구쟁이인가보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야단치는 엄마의 소리가

정도가 심하다 싶을만큼 끊임없이 들려왔습니다.

밤에는 벽을 타고, 

거의 온종일 활짝 열려있는 현관문을 통해 낮에는 더 크게.

2000년대 초반의 재개발 지역 신축 아파트에 

방음에 효율적인 마감재를 썼을리는 만무하니, 

바로 옆에서 듣는 것처럼 괴로웠어요.

시도때도 없이 발작적으로 반복되는 자지러지는 아이 울음에 

악에 받친 엄마의 고함 소리,

당장 건너가 아이의 귀를 손으로 막아주고 싶을 만큼의

거친 표현과 남발하는 육두문자까지...

저러다 애 잡겠다 싶어 옆집에 가보려고도 했지만,

제 자식 야단치는데 갓 이사 온 새댁이 참견하는 것도 

주제넘은 오지랖이다 싶어서 

이어폰을 끼고 데시벨을 높여 음악을 듣거나

밖으로 나가 살 것도 없는 백화점이나 마트를 하릴없이 돌아다니기도 했습니다.

     

항상 아이와 엄마의 소리만 들렸을 뿐

어른 남자 목소리는 한번도 못 들었고. 

가끔 주말에 복도에서 마주쳐도 

늘 엄마와 아이 둘 뿐이었던 것을 보면,

미루어 짐작컨대 어떤 사정이 있어 

엄마 혼자 아이를 키우는 듯 보였습니다.

엄마는...아이를 바로잡으려 야단치는 게 아니라

하루하루 지쳐가는 일상에서 쌓인 감정의 무게로 

중심을 잃고 휘청이며 아이에게 화를 쏟아붓는 것 같았어요.

     

혼자 집에 있을 때,

불에 데인 듯 자지러지는 애기 울음소리가 또 들리기 시작하면

복도에서 마주쳤던 아이의 말간 눈망울이 생각나서 맘이 더 괴로웠습니다.     

물론, 그 엄마의 강한 훈육방식이었을 수도 있었겠죠.

그러나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 돌이켜 봐도, 

그건 분명, 고단한 자신의 삶에 대한 분풀이를 

가장 약하고 만만한 아이에게 퍼부었던 거라고 밖에는 생각이 안되네요...     


남편에게 하소연을 했지만, 

원래 머슴아들은 고만할 때 엄마 속 썩이는 거라고

'애기가 개구진가 부지...'

대수롭지 않게 넘겼습니다.     

그러나 한 두달이 지나고 남편이 집에 있는 주말마다 

종일 계속되는 ‘애잡는 소리’에 마침내 남편도 심각성을 느끼고

옆집에 가서 한번 얘기해 볼까.. 하길래

괜히 남의 일에 나섰다가 봉변만 당한다고 말렸습니다.

저는 저대로.... 결혼식만 끝나면 금방 이직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뜻대로 안돼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었고,

안 그래도 이미 만정이 떨어진 집에서 하루종일 

귀를 틀어막아도 고스란히 스며드는 아이 울음소리와 

찢어지는 듯한  엄마의 고함소리를 견디려니 정말 미칠 것 같았어요.     


결국, 신혼집에 들어온 지 3개월 만에 부동산에 집을 내놓았습니다.

입주한지 3개월도 안된 집을 팔겠다고 하자 사장님은 의아해하셨고

나중에 들어보니 저희 부부 사이에 무슨 일이 생겼다고 오해를 하셨더라구요.

그때나 지금이나 신혼초기가 제일 이혼률이 높을 때라고 하니 

충분히 오해를 하실 만도 했을 겁니다. 

저희 집을 내놨다고 하자,

아무리 그래도, 니 생각해서 시부모님이 힘들게 마련해주신 집에 

아무리 못해도 적어도 일년은 살고 나와야지 정말 싸가지 없다며 

내 딸인게 창피하다고, 엄마는 저를 몹시 나무라셨습니다.

공부만 시키느라 영 잘못 키웠다는 아빠의 역정도 다시 시작되었구요.

그러거나 말거나 그때는 아이 울음소리, 엄마 고함소리가 

낮에 깨어서도, 밤에 자면서도 환청으로 들릴 지경이 되서,

매일 부동산을 들락거리며 빨리 팔아달라고 졸라댔어요.

그렇게 한달여가 지났나요.

안 팔릴 때는 그렇게 피를 말리더니,

막상 매수자가 나타나자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렇게 언덕집에 들어온지 4개월만에 집을 팔았습니다.

어머니가 사신 금액보다 1억이 오른 가격이었어요.


계약 당일 부동산에 가니,

젊은 예비 부부와

모자까지 밍크를 쓰신 사모님이 그림같이 앉아 계셨습니다.

나중에 전해진 부동산 실장님의 귀띔에 의하면,

밍크 모자 사모님은 예비 신부의 엄마,그러니까 예비 장모이고.

사법연수원에서 같이 공부하는 예비 판검사 커플이라고 했어요.

여자 쪽 엄마는 자기 딸도 못지않게 똑똑한데 

남자 쪽에 집까지 해바쳐야하는 상황에 

잔뜩 짜증이 나있는 상황이라고 했습니다. 

어쩐지 신랑은 약간 기가 죽어있고,

신부는 쭈뼛쭈뼛  엄마 눈치를 보고,

밍크 모자 사모님은 뭔가 잔뜩 언짢은 표정이었던 듯 했어요.


계약서를 쓰고 나서 우리 집을 산 사람이 판검사 부부라고 하자 

울 엄마는 판검사도 들어와 사는 집에 

니가 뭘 잘났다고 못살겠다 안달이냐며 다시금 저를 혼내셨어요.     

엄마로서는 사려깊은 사돈 내외 앞에서

딸의 철없는 행동이 부끄럽고 죄송스러웠을 겁니다.

이 또한 엄마가 되고 보니 그때의 엄마 맘을 더욱 알겠더라구요.....      

시댁어른들께도 죄송하다 말씀드렸는데,

어머니께서는,

니들 집인데 삶아먹든 구워먹든 니들 맘이지 뭐가 죄송하냐고...

오히려 더 비싸게 팔았으니 잘했다 니가 복덩이다. 해주셨어요.

참.... 감사하죠. 

예나 지금이나 어질고 현명하신 어머님이십니다.


이제.... 그토록 도망치고 싶었던 그 집을 팔았으니 

다른 집을 다시 사야 했습니다.

근데... 무조건 그 동네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 했지 

딱히 어디를 가야할 지를 몰라서 

막상 덜컥 집이 팔리고 나니 막막하더라구요.

어려서부터 결혼 전까지 죽 오래 살아서 그나마 익숙한 친정 동네를 가려했는데,

마침 그때가 친정 아버지의 퇴직과 맞물려 

더 이상 아버지의 출퇴근 시간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안 그래도 낡은 서울 아파트가 불편하다고 하셨던 

엄마 아빠는 경기도 분당으로 이사를 결심하셨습니다.     

그때가 한참 신축 주상복합이 유행하던 시기였는데,

집을 보러 가신 엄마는 

17층에서 보이는 그림같은 탄천뷰와

같은 건물 안에 골프연습장도 헬스장도 있는 

럭셔리한 주상복합에 첫눈에 반해서

바로 덜컥 계약을 하고 오셨답니다.      

엄마가 분당으로 간다길래 그럼 나도 분당으로 가야겠다 싶었습니다.


일억 오른 금액이긴 했지만 봉천동을 판돈으로는 

매매는 언감생심이고 주상복합 전세값으로도 턱없이 부족해서 기축 아파트를 알아봤어요.

좁긴 해도 신축인 봉천동을 버리고 이미 10년도 훌쩍 넘은 낡은 집들을 둘러봤지만

판판한 평지에, 싱그러운 초록이 가득한 아름다운 공원도 있고, 

도시를 가로질러 윤슬이 반짝이는 내천이 흐르는 신도시의 쾌적함에 이미 반해버린 제게

낡은 아파트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서울 집을 판 돈과 그동안 둘이 모았던 돈을 합해서

대출없이 갈 수 있는 후보군으로 고른 곳이

분당의 이매동(이매역쪽과 아름마을쪽),정자동(분당이마트쪽)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실은... 제일 가고 싶었던 곳은 

삼성플라자(지금은 ak플라자)가 걸어서 5분거리인

시범단지 삼성,한신 아파트였어요.     

츄리닝 입고 ,슬리퍼 끌고 백화점 갈 수 있고,

백화점 지하로 지하철 연결되어 있고,

단지 안에는 서현 유치원, 서현 초등학교.

공부 잘하기로 유명한 서현고등학교도 바로 옆단지에 있고

구름다리만 건너면 푸르른 중앙 공원이 펼쳐졌습니다.

누가 봐도 좋은 자리였지만 가진 돈이 모자라서  그림의 떡이었어요.

(지금은 GTX 성남역과 덮개공원 호재로 가격이 비슷해지거나 오히려 역전되었죠)     

그때만 해도 대출받으면 큰일나는 줄 알았던 간이 콩알만하던 시절이라

무리하지 말고 대출없이 가능한 곳 중에 

더 마음에 들었던 곳을 계약해야겠다고 거의 결정을 내렸는데,

계약서를 쓰러가기 직전에 부동산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시범단지에 상속으로 인한 자식간 싸움 때문에 초급매로 나온 집이 있는데,

이매동-서현동의 평균 가격 차이보다 훨씬 적으니

돈을 좀 더 주고라도 그게 나을 것 같다구요.     


실은 저는 그때, 

약간 비스듬하긴 해도 아래로 탄천이 내려다보이고,

저와 취향이 비슷한 것이 분명한 안주인이

딱! 제 맘에 드는 인테리어로 올수리를 해놓은 집을 

거의 최종 결정한 상태였어요.

체리색 몰딩에 영혼이 너덜너덜해진 상태였기에 

그레이와 블루가 조화를 이룬 세련된 인테리어에 홀딱 반하고 만거죠. 

그런데 하도 급매라고 하니

언감생심 비싸서 볼 생각도 안했던 시범단지 집을

구경이나 한번 해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동산 실장님의 안내로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아!! 이 집이구나' 감이 딱 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이상한 것이...

입주한 이후 한 번도 고치지 않아 낡은 것은 물론, 

고만고만한 삼남매를 키우는 집이라  

취향이고 나발이고 할 것도 없이 

거실부터 침실까지 온통 알록달록 뽀로로 인테리어에

아이들 책, 장난감 등으로 발디딜 틈 없이 정신없던 서현동 집보다

탄천이 내려다보이는 '블루 그레이' 이매동집이 백만배는 더 이뻤는데,

순간 제 눈에는 그런 건  하나도 안 중요하고, 

4층 집 거실에서 보이는 나무의 초록색만 그렇게 싱그러워 보일 수가 없드라구요.

그게 집과의 인연인가 봅니다. 

뭐라고 설명을 못하겠네요.      


그때가 초겨울이었는데,

저는 해도 뜨기 전 어둑어둑한 새벽부터

시간별로 햇볕 들어오는 거 확인한다며, 

그 집 거실이 올려다 보이는 화단에 서서 

새벽 해 뜰 때부터 정오까지 해들이를 지켜보고 

점심 먹고 와서 다시 같은 자리에 선 채로 오후 볕 확인하고

이 집에선 오후 늦게까지 환하고 아늑할 수 있겠구나....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콧물을 훌쩍이면서도 추운 줄도 힘든 줄도 몰랐어요. 그때는...

     

급매긴 했지만 그래도 서현동 집을 계약하려면 대출을 받아야 했습니다.

간이 콩알만해지고 심장이 벌벌 떨렸지만,

강제 저축한다 생각하고 대출을 받기로 결심하고, 

내친 김에 대출 받은 돈으로 인테리어까지 하기로 했어요.     

무사히 계약한 그날로부터 약 한달간 구직활동도 잠시 미루고 

벽지,바닥재는 물론 화장실 타일, 조명, 하다못해 싱크대 손잡이까지

하나하나 일일이 고르고, 이랬다 저랬다 뻔질나게 결정을 번복하며

인테리어 업체 사장님을 밤낮으로 달달달~못살게 굴었습니다.

예산이 빠듯했기에, 직접 발품 팔아가며 최대한 비용을 적게 들여야 했기도 하지만

실은, 울며 불며 뜯어내는 것 말고는 제 맘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신혼집 체리색 몰딩의 한을 여한없이 풀었던 것 같아요. 

약도 없다는 중증 결정장애 환자가 된 저는  

메이플과 오크, 코발트 블루와 에메랄드 블루, 마젠타와 크림슨 레드 사이에서

신이 나서 춤을 추며 기꺼이 길을 잃고 헤메었습니다.


드디어 공사가 끝나고,

한겨울, 그해 들어 제일 추운 날에 

초록 정원이 있는 우리집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물론 제 정원은 아니고 아파트 화단이었지만요. 

우리집에서 보이면 제 정원인거죠 뭐... ㅎㅎ

이제 곧 봄이 오면 테니스장 소음 대신 

저기, 제일 높은 나뭇가지에 앉은 새 소리가 들리겠지

한겨울 제일 추운 날씨에도 이미 제 마음에는 봄이 와있었어요.

결혼 후 8개월만에 두번째 신혼집이었습니다.     


양가 부모님과 형제들 모셔서 집들이도 하고

신혼집이 어디냐고 물을 때마다 ‘서울대 입구역’이라며 얼버무리며

봉천동 신혼집에는 절대 안 불렀던 친구들도 불러서 파티도 했습니다. 

(으이그... 이 철딱서니 속물아....쯧쯧...)

아침 저녁으로 쓸고 닦고,

이제는 남편이 출근하고 집에 혼자 있어도 외롭지도 심심하지도 않았어요.


더 이상 봉천동 새댁이 아닌 분당 새댁이 된 저는 

나 여기 근처 살아요~ 티를 내듯  ‘일부러’ 

츄리닝 입고 화장 안하고 모자 눌러쓰고 백화점도 가고,

(꼭 해보고 싶었던 거였어요 ㅎㅎㅎ)

문닫기 직전 백화점 식품관을 반값 반찬가게로 이용하고,

주말에는 도시락 싸가지고 중앙 공원과 율동 공원에 번갈아가며

돗자리 깔고 누워 책도 읽고, 뒹굴거리고, 

퇴근한 남편과 다정하게 손잡고 탄천을 따라 달밤 산책도 하고,

탄천에 새로 둥지를 튼 오리 가족들에게 

한 마리씩 이름을 지어주기도 하며

(안 믿으시겠지만 진짜입니다.ㅎㅎㅎ)

'자연친화적인 시티걸'이자 완벽한 '서현지엔느'가 되었습니다. 

마침 새로 구한 직장도 집과 가까운 곳이어서 출퇴근도 편했고, 

모든 것이 봉천동 언덕 위의 집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렇게 '천당 아래 분당' 라이프를 만끽했죠.


게다가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집값에 

덩달아 제 어깨까지 치솟아

야단맞고 주눅들어 이사왔을 때와는 달리 

어깨 쭉 피고 큰소리 땅땅 칠 수도 있게 되었어요.           

해가 바뀌고 계절이 바뀌며

분당 지리에 익숙해질 무렵,

뉴스에서는 연일 부동산 가격이 심상치 않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버블 세븐’ 이라는 처음 보는 단어가 신문에 등장하더니 

자고나면 집값이 천만원씩 오르기 시작했어요.

특히 분당은 버블 세븐 지역 중에서도 상승률이 큰 지역이라 했고

새 집에 이사온 지 채 일년도 안돼서 저희가 매수한 가격의

두 배에 육박할 정도로 집값이 치솟았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니 신도시가 조성된 지 10년이 넘어가며 

초반의 불편함들이 해소되고 여러 가지로 안정화된 분당이

당시의 부동산 상승기와 맞물려 크게 각광을 받았던 것 같아요. 

한마디로 저와 분당의 ‘리즈 시절’ 이었습니다.    

처음엔 이게 뭐지?? 어리둥절 하더라구요.

숫자엔 젬병이라 100만원만 넘어가도 벌벌 떨리고 감이 없는 제게

천만, 억 단위의 숫자는 하늘의 구름 보듯 

물리적으로, 현실적으로 와닿지 않는 것이었어요.

그러다가 오르는 가격에 적응이 되고 익숙해지면서

시부모님께 죄스럽던 마음도 사라지고 좀 떳떳해졌습니다.

거 봐! 내 말이 맞았죠?? 

부모님께 큰소리로 자랑하고 싶은 심정이었달까요. 

살짝....기고만장해지기도 했구요.


시어른들 보기 민망하고 죄송하다던 엄마의 잔소리도 쏙 들어가고

어머니도 우리 며느리가 복덩이라 일이 잘 풀린다고 좋아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저 없을 때 몰래 오셔서 

손길이 필요한 집안 구석구석을 살펴주고 가시기도 했구요.     

봉천동 신혼집을 둘러싸고 남편에게 준 상처가 미안해서

그동안 내내 눈치를 봤었는데

이젠 가슴을 쭉 펴고 당당하게 

거봐! 내 덕인 줄 알아!!

이러기도 했어요. 남편은...뭐.... 그냥 웃었죠.

그렇지만 나중에 들으니 친구들과 동료들에게 

우리 색시가 보는 눈이 있어서 이사를 잘했다고 

자랑을 하더랍니다.

비록 여전히 서운한 맘에 든 푸른 멍은 가시지 않았겠지만요.

     

그런데... 

그런데...

그렇게...행복하게...아름답게...영원히....

살 것 같던 분당의 '초록 정원이 있는 집'에서 

저희는 약 1년 남짓 살고 눈물 콧물 바람으로 

작은 오피스텔로 이사를 가야했습니다.

왜냐구요?? 

궁금하면 500원!!! 


다음편에 이어가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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