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서울 달동네 재개발 딱지에서 시작해서 결혼 20년만에 강남 3채와 한강변 재개발까지.
6살 아들 장가 보낼 준비에 노후 준비까지 끝났다고 생각한지 3년만에 다 잃고,
다시 원점보다 못한 마이너스가 되었습니다.
미치고 환장하게 아까워서 몸의 병, 마음의 병을 얻었지만.
이제야 비로소 집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 임을 깨달았습니다.
고통의 시간 속에서의 성찰과 깨달음을 웃기는 글 속에 녹여 마시렵니다.
깨달음이 혈관을 타고 흘러 오롯이 양분이 되어
부디 저를 더 성장하게 해주길 바래봅니다.
에... 그래 가지고 설라무네....
어디까지 말씀드렸죠??
착잡했던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고 심호흡을 하며
문을 여는 순간 글쎄... 글쎄..
악!!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저는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말이죠.....
눈부신 어느 봄 날,
"선배~ 이것 좀 가르쳐주세요~" 로 시작한 우리의 연애는
5년간의 청춘 멜로 미니 시리즈를 마감하고
이제 '부부'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일일 연속극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무사히 신혼여행을 다녀와
이제부터는 ‘친정’이라는 낯선 이름으로 불러야 하는 우리 집에서
‘출가 외인’의 신분이 되어 어색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이제는 ‘시댁’이라 불러야 하는,
그러나 이미 수도 없이 들락거려 낯익은
남친, 아니 남편 집에서 또 하룻밤을 잔 뒤,
저희는 드디어...
아직 주위 도로나 단지 안 조경 등이 마무리가 안 돼서
어수선하고 지저분한 구불구불한 언덕길을 올라
언덕 맨 꼭대기에 자리 잡은 저희 집에 도착했습니다.
아니, 생각해보니 차를 타고 편히 와서
지하 주차장에서 연결된 엘리베이터를 통해 쏙~ 올라갔었네요.
어떻든 신축은 신축이었으니까요..ㅎㅎㅎ
근데...정말 이상하게도 훗날 그날을 생각할 때마다,
분명히 차에서 내려 캐리어를 돌돌돌~ 끌며
주차장에서 편하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는데도
제 머릿속에는 무거운 트렁크를 낑낑대며 이고 지고
하염없이 언덕길을 오르던 저의 모습이 떠올라요.
이상하죠...
양가 부모님께 아들, 딸 노릇을 하며
이미 오래전부터 스스럼없이 지내던 저희였던지라
신혼여행을 가서도,
이제 ‘친정’이라 불러야 하는 우리 집에서 하루를 묵고,
그리고 시댁에서 하룻밤을 잘 때까지만 해도
결혼을 했다는게 잘 실감이 나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진짜 ‘부부’가 되어
처음으로 진짜 ‘우리 집’ 앞에 서서
진짜 ‘남편’ 이 된 그 사람과 마주보자,
결혼을 하고 새로운 가족이 되었다는 것이
비로소 선명해졌습니다. 그러자,
첫 보금자리인 이 집에 대해 제가 계속 투덜거리고
싫은 티를 냈던 것이 못내 미안해지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 우리 인생의 이 중요한 시기에,
제 허영기와 욕심 때문에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하니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어요...
그래서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저에게 집을 보여줄 생각에 들떠서 달려왔던 그날 밤
제게 기대했었을 ‘뽀뽀 쪽!’을 해주며
미안하다고, 내가 철이 없었다고 말해주고
제 맘을 다스려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렇게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어요.
그런데....
그런데....
현관에 서서 바라본 집안의 모습이
제가 알고 있던 그 집과 달랐습니다.
완.전.히. 다른 집이었어요.
결혼식을 앞두고 몇칠 전,
공사가 거의 마무리 될 무렵 사전점검 기간에
싫은 티 안내려 무지 애쓰면서
집을 구경하러 갔었는데, 그때는
분명히 그냥 무난하고 심플한 하얀 벽지에 베이지색 원목마루 집이었어요.
물론 첨부터 이 ‘집’이 아니라 이 ‘동네’가 싫은 거였으니,
마음 속으로는
‘복도식이라 안 그래도 좁은 평수에
거실 확장도 안 했고,
3층인데 앞에는 테니스장이라 시끄러울 거고,
안 그래도 언덕인데 그중에도 하필 맨 꼭대기 집이고...’
투덜투덜... 끊임없이 단점만 보이며 꼬투리를 잡았지만
차마 그걸 입 밖에 내진 못하고
애꿎은 남편에게 오늘 날씨가 유난히 덥다고 짜증만 냈었네요.
못된 년 같으니라구 ㅋㅋㅋ
암튼... 그랬는데,
문을 열고 제 눈에 들어온 ‘우리의 첫 집’은
가로 세로 사방팔방 온통 체리색...... ㅠㅠ ㅠㅠ ㅠㅠ
2000년대 초중반 인테리어 업계를 강타했던
붉은 체리색 몰딩을 아시는지요?
경쾌한 레드도 톤다운된 차분한 브라운도 아닌,
어떤 벽지도, 어떤 가구도, 어떤 커튼도, 어떤 가전 제품도
촌스럽게 겉돌게 만들어 버리는 마성의 불그죽죽 체뤼체뤼~~~
거실 천장에는 기존에는 없던 두꺼~운 체리색 몰딩 우물 천장이
거실 벽 코너 코너마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쭉쭉 뻗은 체리색 세로선 몰딩이
심지어 깔맞춤한 듯 체리색 비스무리한 불그레 죽죽 가로선 걸레받이가
온 집안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쇼파에 앉으면, TV보다가 눈 나빠질까봐 걱정될 만큼 좁아터진 거실 한쪽 벽에는,
‘그래도 신혼집이니 특별히 신경써주게쓰~’
사장님의 필살기! 신혼집의 뽀인뚜!! 라고 하신게 분명한
정체불명의 요상한 벽돌인지, 기왓장인지 모르겠는
플라스틱 인공 돌들이 듬성듬성 박혀있고,
침실 한쪽 벽에는,
신혼의 불타는 밤을 기원하는 사장님의 작심한 화룡점정인 듯,
광장시장 빈대떡 크기만큼 큼직~큼직~한 빨간 꽃무늬 벽지가 발려져 있었습니다.
“악!!”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저 진짜...
그대로 현관에 주저 앉아버렸습니다ㅠㅠ
이 모든 상황을 분명히 알고 있었던 듯한 남편은
지난번 그 밤에 이어,
두 번째의 예상 못한 저의 반응에 다시 한번
가슴에 피멍 든 것처럼 울상을 하고 저를 쳐다보더라구요..ㅠㅠㅠㅠㅠ
제가 집을 마음에 안 들어한다는 것을
남편을 통해서 아시게 된 어머님이
철없는 제가 어떻게든 마음 붙이고 살게 해주시려고
‘구경하는 집’ 이라는 것을 계약하셨던 모양입니다.
인테리어를 반값에 하는 대신에
입주 전까지 그 집을 개방해서 ‘구경’하게 하고
사장님의 ‘스똬~일’이 맘에 드는 고객을 유치하기 위한
일종의 ‘쇼룸’으로 사용하는 조건이었죠.
철없고 싸가지없는 새 아가를
어떻게든 너른 맘으로 품어주시려는 어진 시어른들과
이제 미우나 고우나 ‘내 사람’으로 데리고 살아야하니
어르고 달래서 맘을 풀어주자 싶었던 착하고 선한 남편의 합동작전이었습니다.
저희 신혼여행 간 사이에 인테리어 공사를 해서
첫 집에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서프라이즈~~!!!!’를 해주려는 것이 남편과 어머님의 계획이었던 거죠.
그런데 이번에도 저의 반응이
“꺄악~ 옵빠~~!!” 가 아니라
“아악~ 엉엉~!!” 이었으니...ㅠㅠ
저는 이렇게 또다시 남편과 어머님께 마음의 상처만 주는
천하에 철없고 못되먹은 아내이자 며느리가 되고 말았네요.....ㅠㅠ
그 감사하고 어진 마음이야 엎드려 천번 만번 절을 해도 모자라다는 거..
알아요...아는데요... 변명을 하자면...
아마... 인테리어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아실 거예요.
주로 새로 입주하는 아파트 단지에서
반값 시공비를 미끼로 쇼룸으로 쓸 집을 섭외하여
잠재고객을 확보하기 위한 업체의 인테리어가
왠만해서는 내 맘에 들기 정말! 힘들다는 거...
하물며 청담동도 아니고
봉천동 재개발 뉴타운 동네의 토박이 인테리어 사장님 안목에 맡긴
‘구경하는 집‘이었습니다. ㅠㅠ
(현 주민 분들 죄송합니다. 어언 20년 전, 2004년의 일이예요^^;;;;)
대체... <어떻게 돈 들여 이런 걸 하라는 건가요?.>
따위의 불필요한 옵션이 대부분이고,
사장님이 색맹이신가 의심을 불러 일으키는 말도 안되는 컬러 조합에,
떼어내도 시원찮을 장식물들이 생뚱맞고 맥락없이
여기저기 덕지덕지 존재감을 과하게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차라리 아무런 장식적인 요소도 없는 밝은 톤의 깨끗한 민무늬 벽지에
센스있는 안주인이 발품 팔아 고른
패브릭 커튼이나 쿠션 한 두 개로
훨씬 생기있고 발랄한 집안 분위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결혼식 부케 꽃다발이 채 시들지도 않은 새댁인 저도 아는데,
대체! 왜 사장님은 비싼 돈 받고 인테리어를 하신게 아니라
저희 집에 테러를 하셨는지요...
다음날, 남편이 출근하고 저 혼자 남은 집에서
저는 식탁 의자를 있는 대로 끌어다 놓고 그 위에 올라서서
일단 제일 거슬리는 우물 천정의 두꺼운 체리색 몰딩부터 뜯어내기 시작했습니다.
필름지를 붙인 몰딩에 칼집을 내고 주욱 잡아당기니 뜯어지긴 하드라구요
근데... 20년간 봉천동의 수많은 집들을 필름지 접착 신공으로,
감쪽같이 원목인 척 바꿔주신 전문가들이
틈새 하나 없이 붙여놓은 필름지를
저 같은 초보가 깔끔하게 뜯어낼 수 있었겠어요.
떼어내면 떼어낼수록 스티커 자국이 지저분하게 남아서
점점 더 엉망진창이 되고.....
천장을 계속 쳐다보느라 목은 떨어져 나갈 것 같고,
급기야는 식탁 의자에서 다른 의자로 옮기다가 발을 헛디뎌서 넘어지고...
저는 바닥에 우당탕탕 나뒹굴어지고 말았습니다.
넘어지면서 부딪친 팔이 너무 아파서 일어서지도 못한 채
그대로 주저앉아 있다가 집안을 보니....
하필이면 날도 흐려 대낮부터 불을 켰는데도
온 집안이 어둑어둑한 가운데...
새로 들어온 가구며 가전이며
옷방에 널부러진 옷들이며 잡동사니를 담은 박스며..
정리도 안 해서 어수선하고,
천장은 반쯤 뜯겨나가
안 그래도 보기 싫은 체리색 필름지가
원래 바탕색이었던 베이지 나무색과 어지럽게 섞여서
저를 놀리는 듯 너덜너덜 나풀거리고 있었습니다.
바닥에 온통 흩어진 그 놈의 망할 체리색 필름지 조각들을 깔고 앉은 채로
저는 기어이 꺼이꺼이 대성통곡을 하고 말았습니다.
즐거워야 할 신혼집에서 이러고 있는 스스로가 너무 한심하고,
자꾸 나만 나쁜 년 되고 있는 이 상황도 너무 짜증나고,
무엇보다...
그냥 이 ‘체리색 몰딩’들이
이 ‘집’이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 ‘동네’가 싫었어요.
그렇게 한참을 주저앉아 ‘끄윽끅’ 거리며 눈물 콧물을 짜고 있는데...
신혼 첫날이니 일찍 퇴근하라고 배려를 해주셨는지,
남편이 그날 따라 칼퇴근을 하고 집에 왔어요.
엉엉 울고 있는 저와
온통 엉망진창이 된 채 뜯겨져 나간 천장을 가만 보고 서 있더니
그대로 돌아서 나가더군요. ㅠㅠㅠㅠ
언제나 봄날의 햇살처럼 다정하고 다감한 사람이었는데,
그날 돌아선 남편의 넓은 등에서는 삭풍이 휘몰아치는 듯 했습니다.
그렇게 나간 남편은 아주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았고,
저는 들어올때까지 울다 지쳐 헬쓱해진 모습으로
남편의 노여움을 좀 누그러뜨려 볼까 하는
앙큼한 계산으로, 더이상 눈물도 안나오는
마른 울음을 꺽꺽 거리다가 결국,
까무룩 잠이 들었던 것 같네요.
저희 남편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무지하게 효자거든요..
그런 남편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당신 살림 아껴가며 어렵게 마련해주신 어머니의 배려를
무참히 짓밟아버린 제가 얼마나 미웠겠어요.
그리고.. 남자들은 모르잖아요.
체리색 몰딩 범벅의 촌스러운 인테리어가 신혼의 아내에게 주는
그 엄청난 마음의 스트레스의 무게를요.
암튼.. 그렇게 또 몇칠 싸~하게 시간이 흐르고
결국 반쯤 뜯기다가 만 엉망이 된 저희 집 우물 천장은
손재주 좋으신 시아버님이 저 없는 틈에 몰래 방문하셔서
뜯다만 나머지를 뜯어 정리하고 하얀 페인트로 다시 칠해주셨어요.
.....네....! 저 나쁜 년 맞아요 ㅜㅜㅜ 그냥 편히 욕하세요.
이런 어진 시부모님을 두고 감사한 줄도 모르고
철없이 그랬습니다. 20년 전의 제가.
행복해야 할 신혼의 시작이
뜯겨져 나간 천정처럼 너덜너덜 엉망이 되어 버렸어요.
어떻게든 마음을 붙여보려 애를 썼지만
이미 이 집에는 돌이킬 수 없이 만정이 떨어졌고
티를 안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제 마음을 뻔히 아는 남편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저를 감싸주려 하시는
시부모님 덕분에 저만 자꾸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아 마음이 참 힘들었어요.
저 역시 한 아들의 엄마가 된 지금 생각하니...
그때 어머님의 마음은,
철없는 며느리인 제가 뭐 그리 이뻐서 야단 한번 안치고
오냐오냐 봐주셨다라기 보다는
이제 가정을 꾸려 독립한 아들이 어떻게든 잘 살기를 바라는,
기도와 사랑 이었네요.
참 어질고 현명한 어머님이세요.
저라면 그렇게 못했을 것 같거든요.
고마운 줄 모르고 싸가지 없이 지 생각만 한다고
새아가고 뭐고, 우리 아들 맘 아프게 한다고 미워했을 것 같아요.
그 후로도, 결혼 20년 세월 내내
그런 어머님의 현명하고 지혜로움에 감탄하고 많이 배웠습니다.
일요일 아침 남편이 늦잠을 잘 때면
저는 일부러 안방 창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3층 아래 테니스장에서 나는 소음이 더 잘 들려서
모처럼의 달콤한 주말 아침잠을 방해받은 남편도
이 집을 싫어해라~ 그래서 제 죄책감을 좀 덜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근데.. 그렇게 신혼 생활이 3개월쯤 지났나요.
남편도 저도 진짜로 이 집에서는 더 이상 못살겠다 하는 이유가 생겼습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저도 ‘그것’ 때문에 너무 힘들었는데,
생각해보니 이걸 핑계로 이 집에서 나갈 수 있겠다
꾀가 나드라구요...
그 이유가 뭐냐구요??
망할놈의 체리색 몰딩 때문에 글이 너무 길어져서...
짜증나고 지루한 분들 계실 것 같아서~
투비 컨티뉴드.... 하겠습니다.
궁금하면 500원!!!! (이거 바로 알아들으시는 분 년식 인정..ㅎㅎㅎ)
<시스티나 성당 천장 벽화를 그리던 미켈란젤로도 이렇게 목이 아팠겠지...목빠져라 뜯어내다 결국 울어버린, 그 시절 공포의 체리 몰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