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아 Oct 06. 2024

언덕 위의 나의 집


<프롤로그>

서울 달동네 재개발 딱지에서 시작해서 결혼 20년만에 강남 3채와 한강변 재개발까지. 

6살 아들 장가 보낼 준비에 노후 준비까지 끝났다고 생각한지 3년만에 다 잃고, 

다시 원점보다 못한 마이너스가 되었습니다. 

미치고 환장하게 아까워서 몸의 병, 마음의 병을 얻었지만.

 이제야 비로소 집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 임을 깨달았습니다. 

고통의 시간 속에서의 성찰과 깨달음을 웃기는 글 속에 녹여 마시렵니다. 

깨달음이 혈관을 타고 흘러 오롯이 양분이 되어 

부디 저를 더 성장하게 해주길 바래봅니다.




대학교 3학년 때, 갓 제대한 복학생 선배였던 지금의 남편을 만났습니다.      

같은 해에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고, 

제법 사회인의 티를 갖추어가는 동안 저희의 연애는 계속되었고, 

대부분 알콩달콩, 가끔은 달콤살벌, 울고 웃으며 어느덧 5년이 흘렀어요.     


서로의 집도 가까워 양가를 오고가며 자연스럽게 서로의 부모님께 

아들딸 노릇을 해왔기에, 

이쯤되자 양가에서는 어느 쪽이 먼저랄 것 없이 

자연스럽게 결혼 이야기가 오갔고, 

저 역시 어느새 일상의 일부가 된 이 사람이랑 

당연히 결혼하는 건가부다.. 생각한 것 같아요.     


막상 결혼 얘기가 본격적으로 오가니,

홀시어머니에 손 윗 고모 세분의 혹독한 시집살이를 겪으신 울엄마가 

남편이 위로 누나 셋인 막내 아들이라는 점을 좀 걸려하셨지만,

5년동안 보아온 남편의 장점들을 크게 보셔서 

오히려 불안해하는 저를 달래주셨습니다.     


상견례를 하고...

식장을 예약하고... 

드레스를 보러다니고... 

혼수품 목록을 썼다 지웠다 하며 주말 데이트를 백화점 쇼핑으로 대신하고...

직장 생활과 결혼준비를 병행하며 바쁘게 지내던 어느날 주말 저녁이었습니다.   

  

어머니가 할 얘기가 있다고 부르셔서 좀 일찍 귀가해야 한다며 

저를 일찍 바래다 주고 집으로 갔던 남자친구(이렇게 부르니 되게 어색하네요ㅋㅋ)가

저녁식사를 마치고 설거지까지 마무리한 늦은 시간에 다시 저희 집에 왔습니다.

무슨 날도 아닌데 손에 작은 꽃다발까지 들고요.


어리둥절하는 저를 그냥 지나쳐가더니

과일 주신다고 부엌으로 가는 우리 엄마를 쇼파에 앉히고는  

싱글벙글 신나는 목소리로

“어머니, 저희 신혼집을 어머니가 사놓으셨었데요.^^!!!!!!”

그 표정이 어찌나 상기되고 흥분되어 보였는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올백맞은 아이가 선생님께 칭찬받을 것을 기대할 때,

올림픽 출전 선수가 금메달을 목에 걸고 금의환향 할 때,

저런 표정이 아닐까...

기쁨과 자랑스러움과 기대가 가득한 신나는 모습이었어요.  

   

신혼집은 당연히 전세로 구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머님이 아들도 모르게 예전에 재개발 입주권을 하나 마련해놓으셨나 봅니다

잘은 기억은 안나지만 얼핏 ‘물딱지’라는 단어를 들은 것 같은데 지금으로 치면 

재개발 ‘뚜껑’ 매물 같은게 아니었나 싶어요.     

제가 큰 딸이 아니라 둘째 딸만 되었더라도 그냥 전셋집을 구했을 텐데,

저희 집에선 첫 결혼이고 귀한 큰딸인 제가 

남의 집살이로 신혼을 시작하고 싶게 하고 싶지 않았다는 시어머님의 배려였다고, 

그걸 숨기고 계시다가 오늘에야 이야기해 주셨다며 

남친은 신나서 말단 사원이 정성껏 준비한 자료를 부장님께 보이듯,

우리 엄마에게 ‘브리핑’을 했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직업 군인이셨던 아버님의 월급으로 1남 4녀를 키우며 살아오신 어머니께

그 ‘물딱지’를 사셨다는 ‘1억 9천’이라는 돈은 

다른 사람의 19억과 다르지 않았을 거예요.

그 돈을 모으느라 얼마나 애를 쓰셨을지 이제는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사돈댁의 큰딸인 저를 배려해서 그런 거라 하셨지만..

저 역시 이제 한 아들의 엄마가 되고 보니 알겠어요.

그건 실은... 

하나뿐인 아들 기죽지 않기를 바란 '어머니의 마음'이었다는 것을요....


그러나 그때 저는,

어렸고, 철딱서니 없고, 이기적인 예비신부였네요.     

그 집이 어디냐고 묻자 남친이 자랑스럽게 동네 이름을 말했는데,

“아이구 감사해라.. 어머님이 큰 신경써주셨네!!!” 

하는 엄마와 달리, 저는 호들갑을 떨며 기뻐하기는커녕 

마음이 착잡해졌습니다.

차라리 전세를 살았으면 살았지,

‘그곳’에서 신혼을 시작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저 차아아암.... 철딱서니 없었네요. 쯧쯧...


내일 아침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 늦은 밤에 달려왔다며 

남친은 지금 바로!! 공사중인 그곳에 가보자고 했습니다.

이미 밤 10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는데요.

혹시라도 출근에 지장 있을까봐 10시 반이면 잠 잘 준비를 하고

누구보다 제일 먼저 사무실에 출근하던 남편이  

아직 사회초년병의 군기가 바짝 들어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자랑하고 싶은 그의 마음이 얼마나 컸을지, 

이 글을 쓰면서 다시 느껴지네요.     


일단 따라나서긴 했는데...

가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어요.

어떻게 연기를 하나... 

좋아해야 하는데... 신나해야 하는데....

그래도 공사 중인 새 아파트라니 다 지으면 괜찮을까..

여러가지 생각을 하며 그곳에 도착했는데...     

글쎄 자동차가... 

하염없이 위로 위로... 구불구불 언덕으로 올라가는 거예요.

공사장 가림막 최대한 가까이 차를 대고 저를 내리게 하더니 

동별 위치와 평형별 평면도가 나온 아파트 브로셔를 내밀며

‘우리집’이 저~기 쯤이라고 손가락을 뻗었습니다.


안 그래도 아파트 단지 전체가 경사 심한 언덕빼기에 지어지고 있는데

남편이 가리킨 저희 동은 제일 작은 평형이어서 그런지

그중에서도 하필이면 제일 꼭대기였습니다      

신나하는 남편과 달리 점점 말이 없어진 저....

다시 차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는데,,, 

그만.. 참았던 울음을 와앙~ 터뜨린 거예요.


남편은 처음엔 당황해서 왜? 왜? 하다가...

애처럼 계속 울기만 하는 저를 물끄러미 보다가

이내 가만히 앞만 보드라구요. 

남자들이 아무리 눈치가 없다고 해도. 5년을 하루같이 만난 연인 사인데

제가 기뻐서 우는지 슬퍼서 우는지 그걸 몰랐겠어요...     

“어머! 오빠 너무 고마워!!!”

와락 껴안고 뽀뽀쪽!을 기대했던 남편은

예상하지 못한 제 반응에 처음엔 당황하는 듯 한참 보기만 하더니

꺽꺽 울던 제 울음소리가 훌쩍훌쩍으로 잦아들 즈음..

한숨을 한번 쉬고는,

‘진짜 너무하다 너....’

혼잣말처럼 하고는 시동을 걸었습니다,


구불구불..내려오는 그 언덕길이 어찌나 길게 느껴졌는지..

영영 평지로 못 내려갈 것 같이 아득했던 것 같아요. 그때..      

저희는 오랜 연애가 자연스럽게 결혼으로 이어진터라

결혼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편이 제게 제대로 프로포즈도 안하고 결혼했다고

눈을 흘기곤 하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남편은 그날.. 거기서 

제게 정식으로 프로포즈를 하려고 했었데요.

꽃다발도 그래서 준비했던 거구요.


근데...그런 마음을 제가,,,

산통을 깬 정도가 아니라

아주 처참하게 짓밟은 겁니다...     

요즘도 가끔 남편이 그럽니다.

그날 받은 마음의 상처는 평생 가도 아물지 않을 거라고요.

자존심 상하고, 속상하고, 비참하고..

그날 그 언덕길을 어떻게 운전하고 내려왔는지 기억도 안난다고요.

미안한 마음은 들었지만 싫은 걸 어떡해요.....ㅠㅠ     


그렇게 공기 무겁게 남친이랑 헤어지고

집에 와서 엄마에게 거기 안살겠다고...

‘천’자도 싫은데 ‘봉’자는 더 촌스럽다고...

구불구불 한참 올라간 산꼭대기 끄트머리에 집이 있더라고...

땡깡을 부리다가 철딱서니 없다고 된통 야단만 맞았습니다.

친정아버지도 그러는 저를 보시더니,

우리가 저 기집애를 공부시킨답시고 너무 편히, 잘못 키웠다고 

엄마한테까지 역정을 내셔서 저는 입을 다물고 말았구요...

(이름이 나와버려서.. 이쯤 되면 이곳이 어딘지 아실 것 같은데

혹시라도 지금 이곳에 거주중이거나 투자하신 분들이 계신다면 

너그러이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때는 개발을 막 시작한 달동네였고...

서울이고 지방이고 집값의 개념도 없던 20년 전의 어리석은 저는

철딱서니까지 없어 뭐가 귀한 줄도 모르고 천방지축이었어요.)     


그 후로도 남편 눈치를 보며 

그 집은 전세주고, 우리는 다른 집에 전세가자고 얘길 해봤는데

남편은 시어머니께 직접 말씀드리라고 하더라구요.

차마 그럴 용기는 안나서 내내 부루퉁~ 한 채로 결혼준비를 했어요.     

마침내,결혼식을 하고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우리집에서 하룻밤,

시댁에서 뜬 눈으로 또 하룻밤을 자고

아직 공사 마무리가 안되서 어수선한 언덕길을 올라...

드디어 처음으로 ‘우리집’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문을 여는 순간 저는 깜짝 놀라고 말았어요.

신발도 벗지 않은 채로 현관에 서서 바라본 거실에는 

글쎄... 글쎄....

악!!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저는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다음 회로 이어갑니다.)



(배경 이미지 출처: https://blog.naver.com/airmart/22246691411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