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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lvia Apr 11. 2021

13. 그렇게 우리 연애는 시작됐다


영화 <노팅힐>에 이런 대사가 있다. 


You see,
I think you’ve forgotten
what an unusual situation you two have. 
To find someone you actually love, 
who loves you, 
I mean...
the chances are always minuscule.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날 좋아할 확률은 너무 낮아.




한때는 사랑에 대해 너무 시니컬해져 있어서 내가 누군가를 가슴 뛰도록 다시 좋아할 거라 생각을 하지 못했고 설사 그런 사람을 만나다 하더라도 나는 그럴 자격이 없다 생각했다. 영화에서 말했듯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날 좋아하는 그런 확률은 너무 낮으니까. 그런 낮은 확률에서 요즘 말로 찐 사랑을 찾는다는 것은 건초 더미에서 바늘 찾는 거랑 다를 바가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게다가 믿었던 전 남자 친구와 헤어질 때 심장을 도려냈던 여러 말은 나에게 “사랑 자격 미달”이라는 레이블을 붙여 놓았다. 한때는 너무 좋아하고 존경하던 사람이 날카로운 칼날 같은 말로 비수를 꽂고 떠나버리니 내 몸과 마음은 오랫동안 마비된 상태였다. 


그와의 이별 이후 사랑하고 싶지도 않았고 사랑받고 싶지도 않았다. 더 이상 상처 받기 싫어 마음의 문을 꽁꽁 닫아 놓았고 그렇게 닫힌 문은 좀처럼 열릴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깜깜한 세계에 나 스스로를 갇혀 놓으니, 내가 일고 있는 이 세계 말고는 다른 세계가 존재할 거라고는 상상도,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이 옛 연인과 함께 한낱 한순간에 증발해버렸으니까.  


그러다 생각지도 못한 시기에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그것도 이미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과거에 - 심지어 중학생 때부터 - 여러 번 부딪힌 적이 있었던 인연이라니! 



용기를 내어 그에게 다가갔고, 그에게 내 마음을 전달했는데 그가 내 마음을 받아 주었다. 하늘에 별 따기와 다름없다고 생각한 그 낮은 확률이 나에게 일어난 것이다. 로또를 맞은 기분이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후, 그의 세계와 나의 세계는 우리 둘만의 새로운 세계를 탄생시켰고 환하게 비추는 태양 같은 빛은 우리를 따뜻하게 감싸 안아 주는 듯했다. 


네가 좋고,
너를 좋아하는 내가 좋고,
나를 좋아하는 네가 좋아. 

그러니까
아..

너무 좋다.


말로만 듣던, 영화에서만 보던 이런 세상이 존재하다니.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고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는 그런 기적 같은 일이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니! 거짓말하지 않고 세상이 핑크빛으로 물들어가 가는 것만 같았고 그와 함께 하는 모든 순간은 황홀 그 자체였다. 


신기하게도 내 인연을 만나니 마음과 몸이 알아서 반응을 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의 손길이 살짝 스쳐만 지나가도 내 몸에는 찌릿찌릿한 전율이 쫙 돋았고 어찌할 바를 몰라 몸이 마비가 됐다. 전 남자 친구의 상처로 느꼈던 마비와는 차원이 다른 마비였다. 전 남자 친구에게는 미안한 소리지만  그와 있을 때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이 사람을 통해 느끼고 있었다. 


토론토 아일랜드에서 집에 돌아오는 길, 스트릿카에서 내 머리를 쓰다듬던 그의 손길 때문에 아직도 정신이 멍한 상태였다. 종착역에 언제 도착했는지도 모르게 시간은 지나 우리가 헤어질 시간이 왔다.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 찰나, 소개팅남이 말했다. 그동안 자기에게 항상 먼저 연락하느라 수고했으니 앞으로는 자기가 먼저 연락할 거라 한다. 걱정 말라하며 나에게 잘 가란 인사를 해 주는 그의 등 뒤로 씩 - 미소가 지어졌다.


어머. 드디어! 

이 돌하르방 같은 남자가 먼저 연락을 한다고 하는구나!

오우 예!! 




내 노력이 헛된 것이 아니었구나. 아예 양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다행이라 생각하며 기분이 날아갈 것 같은 발걸음을 따라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약속한 대로 그는 며칠 후 만나서 영화를 보자는 연락을 했다. 일주일 내내 심장은 두근거렸다. 남자 친구와 여자 친구로 가지게 되는 첫 데이트였으니까.  벤자민 버튼의 현란한 해석을 들려준 사람이기에 어떤 영화를 보여줄지 한껏 기대하고 그와 함께 첫 영화를 봤다. 


영화의 제목은 <It's only the end of the world>. 굉장히 아티스틱 한 프랑스 영화였다. 영화 보는 내내, 대체 왜 이 영화를 고른 건지 의문만 가득 쌓여갔다. 내가 영화 문외한이라서 도통 스토리를 못 잡겠는 건가, 무식한 티를 내고 싶지 않으니 영화 끝나고 나면 아는 척이라도 해야 되는 건가..? 


하지만 영화가 흘러갈수록 이런 생각보다 다른 생각이 내 머릿속을 도배하기 시작했다. 


과연 이 남자는 내 손을 잡을 것인가?! 



그래, 이 점이 이 날의 관건이었다. 워낙에 돌하르방 같은 사람이라서 내가 무슨 사인을 줘야 하는 건지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지금까지 데이트 신청을 내가 먼저 했으니 손도 내가 먼저 잡아야 하나? 아님 이 남자를 기다려야 하나? 손잡는 것도 내가 먼저 리드를 해야 하는 건가? 


알쏭달쏭 혼자서 온갖 생각을 하며 영화를 보는 '척' 하고 있을 때, 다행히도 그가 먼저 손을 내밀어 주었고 남은 영화 상영 시간 동안 그 손을 놓지 않았다. 휴우.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 정도 돌하르방은 아니었네. ㅎㅎㅎㅎ 


그가 손을 잡는 순간 심장이 너무 두근거려서 혹시 이 심장 소리가 그에게도 전해지면 어쩌나 걱정도 했다. 이렇게 심장이 뛰어본 적이 언제였던가. 미친 듯이 날뛰는 심장을 잠재우고 싶었지만 이것이 내 말을 들을 리 만무했다. 원래 처음부터 영화가 그렇게 흥미롭지 않았지만 그가 내 손을 잡은 이후에는 더더욱 영화에 집중할 수 없고, 심오한 영화 스토리 뒤로 내 눈앞에는 그와 내가 함께 할 꽃길 같은 앞날이 펼쳐지고 있었다.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르는 1시간 40분이 그렇게 흘러갔고 그도 이 영화가 별로였는지 이 영화를 골라서 미안하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날의 감정이 기억날 뿐이다. 영화 보고 나서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 던 우리 둘. 구름 위를 떠 나니는 기분. 달콤했던 그날 밤의 공기. 


우리는 같이 버스를 기다렸다. 가을의 청량한 밤공기는 쌀쌀했지만 영화 상영시간 동안 오랜만에 과하게 일을 한 내 심장을 식혀주기에는 딱 좋았다. 


버스를 기다리며 쭈뼛쭈뼛 서 있기를 몇 분. 무심코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고 그는 나를 내려다보며 내 눈을 쳐다보고 있었다. 서로의 눈빛이 통했다. 말을 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모든 말을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이미 금색 빛 황홀함이 우리를 감싸고 있었지만 그 빛이 한층 더 진해지는 느낌이었다.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마법의 가루를 뿌려놓은 것만 같았다.


그가 한 발자국 가까이 나에게 나가 왔고 나도 그에게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갔다. 우리 둘은 자석이 서로에게 끌리듯 거부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 서로에게 안겼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첫 키스를 했다. 




또르르르 

땡 땡 땡!  




언젠가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키스를 하면 머릿속에 은방울 굴러가는 듯한 종소리가 들린다고. 그렇게 황홀한 말은 대체 누가 생각해 낸 건지. 뭐 키스가 별거라고 그렇게 과장을 해서 말할까나. 그전 키스 경험 (?)에서는 느껴보지 못했기에 이 말은 거짓말이 분명하다고 믿고 있었는데 이 남자와의 첫 키스 단 몇 초 만에 이 말도 안 되는 말이 사실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은방울이 아름다운 선율을 그리며 구르고 또 굴러갔다. 은방울이 뭔가. 새해를 맞아 울리는 새벽 종소리보다 더 웅장한 울림이 내 머리와 마음을 강타하고 있었다. 하나의 은방울이라 생각했던 것이 어느 순간 백 개가 넘어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온몸에는 전율이 흐르다 못해 터져 버릴 거 같았다. 아니, 이미 터진 것 같았다. 영화관부터 날뛰던 심장은 멈출 줄 모르고 제 맘대로 수직선을 그리며 맥박을 올려가고 있었다. 자석처럼 붙어버린 우리 사이를 통해 그의 심장소리가 나에게도 전해졌다. 쿵쾅거리는 그와 내 심장을 진정시키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심장아, 제발 진정해. 왜 그러니! 가을바람이 아니었다면 쉴 틈 없이 계속 열심히 일하고 있는 심장 덕분에 땀이 낙엽 떨어지 듯 우수수 흘렀을지도 모른다. 



별빛인 내리는 듯한 짧은 순간이 지나고 버스가 왔고 우리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또 다음 데이트를 기다려야 했다. 첫 키스 뒤 우리 둘은 공식적인 남자 친구와 여자 친구 사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의 홍수에 젖어 매일 같이 행복하고 매일 같이 설레는 하루를 보냈다. 그와의 데이트를 기다리는 것도 설렜고 데이트하는 것도 설렜고 데이트 끝나고서 다음 날을 생각하는 것도 설레었다. 그 시간의 일분일초는 분홍빛으로 가득 찬 시간이었다. 노랫말 가사처럼 24시간이 모자란 하루하루였다. 



그와 함께 손을 잡고 같이 있는 시간은 처음 느껴보는 감정 때문에 미칠 것 같았다. 마실수록 목이 마르다는 표현처럼 같이 있으면 있을수록 그를 더 원했고 단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라 두렵기도 했던 건 사실이다. 이게 곧 끝나면 어떡하지. 찰나의 감정으로 끝나면 어떡하지. 빛의 속도로 나만 우리 둘의 미래를 그리고 있는 거라면? 만약 그 미래가 오지 않으면 어떡할 거며 하루가 멀다 하고 커져가는 내 감정이 어느 순간 녹아 없어지면 그때 남을 상처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가끔 이런 두려움이 엄습해 올 때마다 마음을 다시 잡고 현재에 집중하려고 했다. 내가 이런 감정을 또 언제 느껴 볼 수 있겠냐며. 이토록 가슴 뛰는 설렘을 두려움이란 감정에 넘기고 싶지 않았다. 



"처음에 내가 그에게 했던 얘기를 생각해 봐. 만약 그가 나를 사귀지 않는다고 해도 난 상처 받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당당하게 말했었잖아. 이렇게 좋은 시간을 가졌던 것만으로도 행복한 추억이 될 테니 걱정 말라고 그를 안심시키기도 했잖아. 그러니까 괜찮아. 이 시간을 즐기고 이 시간을 살고 있는 너와 그를 기억해. 그러면 그 추억은 미래가 어떻게 되든 너에게 힘이 돼 줄 테니까." 



걱정하는 나를 다독이며 하루가 다르게 눈덩이처럼 커지는 감정을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막을 수도 없었거니와 막으려 한다 해도 내가 어찌할 도리가 없는 감정의 크기였으니까. 



한편으로는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는 나 자신이 너무 좋았다.  그와 사귀기 시작함으로써 몇년동안 꼬리표 처럼 붙어있었던 "사랑 자격 미달"딱지를 드디어 떼어낼 수 있었다. 얼마나 후련하던지. 옛사랑을 잊고 우리 관계에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랑을 쏟아붓기로 했다. 그때 더 사랑할걸.. 이런 후회가 들지 않을 만큼 열심히 말이다. 내 다짐대로 매일같이 내 에너지를 우리 관계에 쏟아 넣었는데 이상하게 사랑의 항아리는 붓는 만큼, 아니 그것보다 더 하루가 멀다하고 새롭게 채워져 나갔다.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그 이상의 것들로.  



내 자신이 소모되는 게 아니라 점점 더 강해지는 듯한 경험이었다. 내 사람을 만나면 사랑을 해도 그게 나를 없애는 일이 아니라는 걸 그를 통해 알게 되었다. 사랑이란 말을 재해석할 수 있었고 그래서 그가 더 고마워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헤어진다 하여도 난 이미 그전보다 훨씬 더 강해져 있다는 걸 알았기에 가끔 검은 그림자처럼 찾아오던 두려움도 어느덧 사라져 갔다. 



그렇게 우리 둘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그때의 기적 같은 설렘을 충분히 느끼며 인연의 끈을 더 단단히 묶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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