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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lvia Apr 11. 2021

14. 고마웠습니다. 잘 가요 옛사랑

비로소 그를떠나보낼수 있었다

소개팅남을 만나고 우리가 사귀기 시작하고 난 뒤, 운명이란 거에 대해 굉장히 시니컬해져 있었던 내가 세상에는 운명이라는 게 정말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믿기 시작했다. 이렇게 우리가 만나게 된 게 운명이라면, 다른 인연도 운명이 아니었을까? 내가 맺는 모든 사람과의 인연은, 그것이 좋던 나쁘던, 그저 우연히 일어난 게 아니라 필연적인 이유로 나에게 일어난다는 말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세상은 크고 길게 보면 필연적으로 움직이지만
짧은 순간순간은 우연적으로 움직인다.



이런 생각이 마음에 자리를 잡기 시작하니 그제야 비로소 난 내 옛사랑에 대해 새롭게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나쁘다고 생각했던 그 인연이 사실은 그렇게만 나쁜 것도 아니란 걸 알게 되었을 때, 몇 년 동안 머릿속에 끼어있던 자욱한 안개가 걷히며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분명 나는 너무 아팠지만 그것 또한 내가 내 인생에서 기꺼이 받아들이고 감싸 안아줘야 하는 하나의 손님이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니 그와 함께 보냈던 시간을 새롭게 다시 정리할 수 있었다. 몇 년 동안 마음속에 가득히 쌓여있던 감정을 분리수거하고, 과거를 재해석하고, 나를 토닥이고.. 그렇게 열심히 마음 청소를 하며 그를 놓아주었다. 내 마음의 굴레에서, 내 과거에서, 내 현재와 미래에서. 





나보다 더 빨리 우리의 관계를 잊고 새로운 인연을 찾아 떠난 그를 오랜 시간 동안 많이 미워했고 원망했었다. 때로는 그렇게 아파하며 보낸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내 감정이 이런 걸 어떡해. 다른 사람들은 이별을 잘만 극복하고 잘 살아가는데 대체 나는 왜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지. 도대체 난 뭐가 문제가 있어서 이걸 이렇게 회복을 못하는 걸까. 


코스타 리카 여행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나를 감싸 안아주고, 내 인생에 빅뱅처럼 등장한 사람을 만나 그를 통해 옛사랑을 다시 재해석하니, 난 딱 그만큼 아파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 이유가 있다고 하지 않은가. 내가 보낸 그 시간은 그 시간대로의 이유가 있었고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었다. 그냥 나는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었던 것뿐이다. 


그런 마음이 드니 더 이상 그가 밉지 않았고 그와 함께 했던 시간이 쓰레기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 나에 대한 해석도 다시 할 수 있게 되었다. 쓰레기 같은 시간을 가지고 있는 내가 아니라 한때 멋졌던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냈던 나로 말이다. 나를 더 당당하게 받아들이니 그 사람을 원망할 필요도, 미워할 필요도 없어졌다. 나를 더 힘들게 하는 그런 바보 같은 일을 왜 해? I deserve better than this. 소중한 나한테 더 이상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를 얽매어 오는 감정들, 이제는 안녕. 



이렇게 감정이 제대로 다 정리가 되고 나서 비로소 그가 이해되었다. 새 인연을 만나 룰루랄라~ 떠나버리고 완전히 탈바꿈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그였기에 나만 힘들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뒤돌아보니 그도 참 많이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국제 학교에서 가르친다고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과테말라라는 나라로 2년 동안 훌쩍 떠나버린 나를 기다리는 것도 지치지 않았을까. 입장이 바뀌었다면 나는 2년을 기다릴 수 있었을까. 떠난 사람보다 뒤에서 남겨진 사람이 더 힘든 법인데 그때 나는 그걸 이해할 수 없었다. 내 마음의 폭이 넓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때는 그러지 못했다. 그게 내 최선이었다. 그 사람도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의 노력을 알아보지 못했고, 그렇게 방치된 그의 감정은 우리 사이에 금이 가게 하는데 충분했다.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니

불타오르던 분노도

나를 갉아먹었던 미움도 

감정의 폭풍이 지나가고 남은 허탈감도

어차피 내가 다 겪고 감싸 안아야 할 감정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혼자 남아서 하루하루 고군분투하며 살았을 그에게 미안하기도 하다.


정말 시간이 약인 걸까. 



어떤 것의 끝은 다른 무언가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가 나를 떠나 주었으니 내가 이렇게 나와 꼭 맞는 사람과 만날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서로 떨어져 있던 시기에 그가 조금만 더 솔직해줬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진한 아쉬움도 있지만 그때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변하는 감정을 어떻게 할 수 없었을 거라고. 서로의 미래에 함께하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그 약속을 지킬 만큼 우리의 인연은 길지 않았던 것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고, 우리의 인연은 거기까지였을 뿐이다.  



소개팅남과 두 번째 데이트에서 전 남자 친구로 인해 자주 갔었던 유티의 Innis College 카페테리아가 지금의 남편과 나를 연결해 주고 있는 또 하나의 고리라는 걸 알았을 때, 그에 대한 사그라들지 않을 것 같은 원망이 이해와 감사함으로 바뀌었고 그것은 인생의 새로운 가르침을 주었다. 



세상에는 좋은 인연도 나쁜 인연도 없다.
Everything is just is.



인연은 그냥 인연일 뿐이라는 것. 세상엔 나쁜 일도 좋은 일도 없다는 것. It is what it is. 나에게 일어난 일을 그 자체로 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그러니 지나간 인연에 대해 좋네 나쁘네 분별하고 판단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처음부터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난 것뿐이니까. 지금 내 앞에 놓인 인연에 쏟아야 할 에너지를 과거 인연을 판단하고 탓하는데 쓰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전 관계를 통해 얻은 이 깨달음은 오늘을 살아가는 내가 예기치 못한 힘든 일을 마주할 때 마음의 평온함을 준다.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자기의 시간에 맞춰, 자기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일어나는 일뿐이라는 사실은 모든 것을 조금 더 덤덤한 마음으로, 때로는 담대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준다. 



힘들 날도 그만의 이유를 가지고 나를 찾아오고
좋은 날도 그만의 이유를 가지고 나를 찾아온다.
이 모든 것이 자기만의 이유를 가지고 나를 찾아온다면,
아니, 나를 찾아와야 하는 것이라면
내가 그들을 거부할 수 없지 않은가.

만약 모든 것이 일어나야만 하는 이유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온전히 그날을 살고
그 순간을 살고
그 삶을 사는 것 외에는 없다. 

고된 하루도 내 날이요
행복한 하루도 내날이요

내가 사는 오늘이 가장 좋은 날이라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왔던 유명한 문구인 카르페 디엠의 참뜻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전 남자 친구가 정말 좋아했던 영화의 하나 문구였는데.. 이것이 이렇게 내 마음에 깊이 박히게 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가 좋아했던 것이라면 거들떠 보지도 않고 거부하기 바빴을테지만, 마음 청소를 깨끗이 하고 난 후로는 이것 또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와 함께 했던 시간은 이렇게 내가 삶을 깨닫는데 참 많은 도움을 주었고 내 눈 앞에 놓인 인연을 놓치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새로운 인연을 시작하며 그때 당시 일기에 여러 생각들을 정리했다. 


그와 이별한 지 3년이 지난 어느 가을 날,

나는 마침내 

내 안에 아직도 남아있던 그와 

마지막 작별인사를 했다. 




그 사람 마음을 내가 다 알지 못하기에 나와 함께한 시간 동안 진심이었는지 아닌지 백 프로 알 수 없다. 

하지만 나와 같이 보냈던 시간만큼 동안은 진심이었다고 믿기로 했다. 그리고 진심을 용기 있게 표현할 수 있었던 멋있는 사람으로 기억하기로 했다.


그래야 내가 겁쟁이와 사귄 여자가 아닌,  삶에 대한 열정이 있고 문학과 예술을 사랑했던, 그리고 그 시간만큼은 이 세상에서 날 가장 어여쁜 여자로 만들어 주었던 멋진 사람이랑 사귀었던 멋진 여자로 남을 수 있으니까. 이렇게 해야 지나간 시간들이 쓰레기가 아닌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지금의 내 삶에 활력소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야 내가 나 자신을 더 사랑하고 더 많은 사람에게 내 마음을 나눠줄 수 있을 것 같다.


이제야 비로소

그 사람을 진심으로 고마워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나를 많이 보듬어주고 이해해 줘서 고마웠고

진심으로 다가와 줘서, 그리고 지속적으로 나에게 관심을 가져줘서 고마웠다고.

날 나로서 사랑해 줘서, 있는 그대로 받아줘서, 내가 싫어한 모습까지고 감싸줘서 고마웠다고 말이다.


당신으로 인해서 지금 난 더 많은 사람들과 삶을 의미 있게 나눌 수 있게 되었고,

당신은 참 멋있는 사람이었고 그리고 난 그렇게 기억할 것이라고,

직접 말할 수는 없겠지만 작은 감사의 기도는 올려야겠다.


이것이 그 사람과 함께 나눴던 시간에 대한 예의이고

나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기도 하니까.

 

 

참 멋있었던 당신.

정말 고마웠어요.

항상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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