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영화 <봄날은 간다> 속 유지태의 명대사이자 많은 연인들이 한 번쯤은 해 봤을 말.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고 믿었던 적이 있다. 전 남자 친구의 진심 어린 고백에, 헌신적인 사랑과 변함없는 관심에 이 사랑만큼은 절대 변하지 않으리라 굳게 믿었던 적이 있었다. 이 정도로 좋아하는 거라면 영원히 변하지 않겠지. 아직 사랑이 무엇인지 제대로 몰랐던 시절엔 이렇게 진실한 감정은 쉽게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사랑은 변하더라.
영원한 건 절대 없다는, 모든 것은 결국 변하게 된다는 이 변하지 않는 진리를 왜 그땐 몰랐을까.
푸른 하늘에 구름이 모양을 바뀌면서 흘러가듯, 사랑이란 감정은 어쩔 수 없이 바뀌고, 변하고 때로는 이별이라는 모습으로 우리 곁을 떠나기도 한다.
네가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전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얼마나 많은 날을 속으로 이 말을 외쳐대며 보냈던가. 과테말라로 떠난 내 잘못도 있지만, 바람이 난 그에게 달려가 따지고 싶었다. 이 세상 모든 여자가 나 같다면 다시 사람을 만나지도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결혼 따위는 절대 생각하지 않을거란 모진 말로 나를 밀어내지 않았나. 결혼까지 약속했었으면서 나와 관계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그녀와 핑크빛 나날을 즐기고 있었다니. 결국 내가 파혼하게 만들어 놓고 그는 새로운 삶을 준비하고 있었다. 기가 찼다. 절규라는 말은 이때 쓰는 거구나, 몸소 깨달은 순간이었다.
찾아가서 귀싸대기라도 때려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는데 얼마나 많은 힘을 썼는지. 정신을 놓을 정도로 미쳐버린다는 것이 이런 뜻일까. 손을 덜덜 떨면서 모든 걸 확인하는 순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불같은 감정들이 콸콸 터져 나왔다. 그런 감정을 받아 줄 준비가 없었던 나의 마음에 소용돌이가 매섭게 휘몰아쳤다. 마음 한가운데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았고 평생 한 번도 꾸지 못했던 악몽에 사시나무 떨 듯 벌벌 떨며 잠에서 깬 적도 있었다.
그래,
그런 시간이 있었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은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 내 자리에서 내 몫을 하며 나름 잘 살고 있다. “네가 그러고도 인간이냐?” 라며 따지고 싶었던 마음이 이제는 “그래, 그럴수도 있지" 라는 마음으로 변했다. 생각해 보니 그 사랑은 딱 거기까지 였을 뿐인데 그땐 왜 세상이 무너져 내린 것 같이 아파했는지. 허 참. 정말 시간이 약인가. 나 같은 여자를 옆에 끼고 사는 사람도 있고 그와 같은 사람을 주워간(?) 사람도 있으니 짚신도 다 제 짝이 있나보다.
사랑의 감정도 변하듯이 분노의 감정도 변한다. 나를 오랫동안 지배했던 분노 대신 평온한 마음이 찾아왔고 이제는 그가 밉거나 원망스럽지도 않다. 오히려 나에게 이런 추억을 준 그에게 감사하고 또 그 나름대로 힘든 시간을 보냈을 그에게 미안하기도 하다.
인생에서 버릴 건 하나도 없다고 하지 않은가. 사랑은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 되는 건 아니라는 걸 뼈아픈 이별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일방통행이 아닌 쌍방통행으로 이뤄져야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는 걸 뒤통수 한 대 얻어맞고 알게 되었다. 행동이 없는 사랑은 팥 없는 찐빵 일 뿐이다.
버리고만 싶었던 과거의 기억은 나에게 이런 큰 교훈을 남겨주었다. 잃은 것도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법이다. 이제는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의 속성을 조금이나마 알겠으니 사랑이 변한다는 그토록 화가 나지도 않는다.
때론 모든 감정에 유효기간이 있다는 것은 큰 위로가 되니까. 그래서 내게 오는 모든 감정을 온전히 느끼려고 노력한다. 어차피 영원한 감정은 없으므로.
소개팅남과 사귀기 시작한 후 많은 일이 있었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동생으로 인해 집안에는 거센 폭풍이 휘몰아쳤다.
그리고 나는 부모님 집을 나와 독립했다.
그 후로 3년 뒤, 우리는 결혼을 했다. 신혼생활 중 코로나가 터졌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팬데믹을 같이 견뎌낸지 일 년이 넘었다. 24시간 같이 붙어있으면서 아직까지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으니 그것만으로 선방한 것 같다.
결혼으로 사랑의 결실이 맺어졌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사랑은 둘이서 꾸준히 노력하며 일궈가야 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결혼을 했다고 해서, 예전 같은 감정이 없다고 해서, 사랑이 퇴색된 것도 아니다. 강렬했던 사랑의 잔해는 오히려 결혼을 통해서 다른 형태로 태어났다. 굉음을 내며 눈 부시게 나타났던 빅뱅이 잔잔한 밤하늘의 빛을 내주는 새로운 별로 변한 것 같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우주에 작게 반짝이는 이 별이 참 좋다.
남편을 만나 처음 손을 잡았을 때 느꼈던 불꽃 튀는 스파크는 이제는 없지만 서운하지 않다. 오히려 어제와 다를 것 없는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에서 그 전에 느끼지 못했던 편안함을 느낀다. 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집안 청소를 한다. 물론 우리 둘이 같이. 하지만 해도해도 끝 없는 집안일 때문에 쌓였던 스트레스가 빨래통에서 발견한 남편의 뒤집어진 양말을 보고 터지기도 한다. (양말 좀 제대로 벗어 놓으라고 몇번을 말해!!) 내가 누군가의 양말의 속사정(?)까지 알게 되다니. 결혼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서로의 습관과 같이 살면서 만들어가는 우리만의 루틴은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친밀함을 안겨준다. 불꽃 같은 스파크는 아닐지라도 일상의 무료함이 주는 잔잔한 안정감이 좋다. (양말을 제대로 벗어준다면 더 안정적일 것 같다.)
이제는 눈빛만 봐도 설레고 마음이 녹아내렸던 감정이 없다고 해서 아쉽지 않다. 사랑이 변했다고 어리석게 탓하지도 않는다. 사랑이란 감정은 원래 변하기 마련이니까. 도리어 시간이 지나면서 올라오는 새로운 감정들을 환영하려 한다. 모든 감정의 파도를 같이 느낄 수 있는 인생 파트너와 함께.
그와 함께 변해가는 우리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와 함께 그릴 수 있는 꿈이 있다는 사실은 다시 심장을 뛰게 만든다.
작은 반딧불이 마음을 밝혀주는 것 같다.
그래서 더 이상 사랑이 변하는 것이 두렵지 않다.
그렇기에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질문에 도리어 이렇게 묻고 싶다.
사랑이 어떻게 안 변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