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ylvia Apr 11. 2021

12. 고백이 망설여질 땐 정면 돌파하세요

직진녀의 시원한 고백: 나? 난 네가 좋아!

매직 아워, 또는 골든아워


강렬한 오후의 햇빛은 지나가고 은은한 황혼이 드리우는 시간. 세상 모든 것을 따뜻한 색상으로 감싸 안아줄 수 있는 낭만이 가득 차는 시간. 마법에 걸린 것처럼 모든 것이 황홀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라 매직 아워라고 부르기도 하고 색상이 부드럽고 따뜻한 금색으로 빛나는 시간이기도 해서 골든아워라고 불려지기도 한다는 이 시간. 일몰과 일출 전후로 고작 30분 정도 되지 않는다. 


뜨거운 햇살 아래 제대로 보지 못했던 사물들이 새로운 옷으로 탈바꿈을 하고 짙은 초록색 나무들도 부드러운 금색 옷으로 갈아입는 그 시간에 토론토 아일랜드에 그와 내가 있었다. 



그 날, 매직 아워로 물들었던 토론토 아일랜드. 


소개팅남의 신들린듯한 벤자민 버튼 해석을 들은 뒤, 우리는 온타리오 호수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강렬한 오후의 햇살 아래 눈이 부시게 반짝이던 호수가 어느덧 매직 아워로 인해 부드럽게 변하고 있었다. 


차분하고 따뜻한 금색 빛 햇살이 그의 얼굴을 감싸는데 얼마나 멋있게 보이던지. 우리 둘은 마법에 걸린듯한 매직 아워에 홀려 걷고 또 걸으며 끊임없는 대화를 했다. 삼세판에 끝을 보겠다는 결심에 얼마 남지 않은 매직 아워의 힘을 빌려 대화의 방향을 "우리"로 이끌고 가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햇빛이 고즈넉하게 하늘을 붉은빛으로 물들이고 있을 즈음,  그들은 마법에 걸리듯 서로에게 빠졌고 그때부터 그들의 불꽃 튀기는 사랑은 시작됐다..라고 이야기가 끝났으면 좋으련만 그날의 매직 아워는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 


마음 한구석에는 빨리 결말을 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그날 매직 아워가 너무 아름다웠기에 그에게 어떻게 내 마음을 고백할지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이 시간을 즐기자. 만약 지금 고백했다가 그가 "노"라고 대답하면 이렇게 아름다운 골든아워가 자칫 새드 아워로 변해버릴지도 모르고 그럼 그 뻘쭘한 뒷수습은 어떻게 할 텐가. 토론토로 돌아가는 배도 같이 타고 와야 하는데. 너무나도 현실적인 생각과 마음이 뭉클할 정도로 아름다웠던 골든아워 덕에 너무 많은 고민하지 않고 대화를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내버려 두기로 했다. 


해가 서서히 온타리오 호수 뒤로 넘어가는 것을 보며 닿을 듯 말 듯 한 그와 나 사이의 거리에서 줄 타리를 하듯 우리는 밀당을 했다. 돌려서 말하다가, 때로는 요점을 향해 말하다가. 대화의 밀당을 하면 할수록 내 마음은 얼마나 더 설레었던지. 그래, 내가 언제 또 이렇게 심장이 쫄깃할 정도로 두근거려보겠어. 



말로만 밀당을 하다가 토론토 아일랜드 떠나기 전, 그래도 한번 제대로 된 밀당을 해보겠다고 간단한 스킨십을 시도해 보려 했다. (이렇게 진취적인 적이 없음..ㅎㅎㅎ) 해가 진 후라 밤바람은 쌀쌀했고 그래서 난 연신 손 시리다며 내가 아는 최대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그에게 시그널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누구인가. 굳건한 돌 같은 돌 하르방 아녔던가. 내가 뭘 하던 소개팅남은 끄-떡-없었다. 




아이고, 이 느려 터진 사람아, 이거 내 손 잡으라고 신호 보내는 거거든?? 이 신호 몰라?? 이럴 때는 손을 잡아주던지 외투를 벗어 따뜻하게 해주는 거라고. 내가 지금 말하고 있잖아. 나 춥-다-고! 손 비비면서 말하고 있잖아. 나 춥-다-고! 답답해 죽겠네. 대화는 그렇게 물 흘러가듯 잘해놓고선, 호의가 있다고 표현을 해놓고선 왜 결정적인 타임에는 무반응인 거니.. 응?? (나만 한국 드라마 너무 많이 본 건가.. 다른 신호를 보냈어야 했나.. ㅎㅎㅎ) 





하아..

모르겠다 진짜. 



어쩔 수 없이 승부수를 걸었던 토론토 아일랜드에서는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실망스러운 마음으로 토론토로 돌아오게 되었다. 



하루 종일 걸은 덕분에 우리는 배가 너무 고파서 다운타운에 있는 일본 라멘집에서 늦은 저녁을 먹기로 했다. 배에서 내려 일본 라멘집으로 가는 택시 안. 느닷없이 어디선가 갑자기 퀴퀴한 냄새가 차 안을 덮쳤다. 택시 아저씨의 방귀 냄새였다. 갑자기 소리 없이 강타한 방귀 덕분에 뒷좌석에서 앉아있던 우리는 조용히 놀라는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고 문자를 주고받으며 소리 없이 깔깔 웃었다. 아저씨의 소리 없는 강력한 방귀만큼이나 강력한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 



그런데 택시 아저씨의 방귀가 뭐라고, 이게 뭐라고 이상하게도 이 일로 인해 우리가 한층 더 가까워진 거 같았다. 이 세상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우리 둘만 간직한 듯한 느낌이었다. 우리 둘만의 시간에 일어난 우리 둘만 아는 긴밀한 비밀. 그와 나 사이에 수많은 연결고리가 있었지만 택시 아저씨의 냄새나는 방귀야말로 우리의 사이를 처음으로 인정하는 사건인 듯했다. 


방귀 사건을 뒤로하고 일본 라멘집에 도착해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은 듯 우리는 라멘을 먹었고 또 라멘을 먹는 동안은 별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계속 얘기할 타이밍을 찾고 있었지만 좀처럼 딱 맞는 시간을 찾을 수가 없었다. 신데렐라가 된 것처럼 12시 전에, 오늘의 마법이 풀리기 전에 이 사람의 마음을 단단히 잡아놓고 싶어 내 마음은 급해지고 있었지만 우리의 발걸음은 이미 집으로 가는 스테이션을 향하고 있었다. 




하아..


돌려서 말해도 안되고, 그 어떤 시그널을 줘도 안되고, 아무리 봐도 이 돌 같은 소개팅남은 나에게 먼저 다가올 거 같지 않은데.. 그럼 이럴 때는 어떻게 하지? 



뭐.. 별다른 수 없지.  



정면돌파




그래, 지금까지 그랬던 거처럼 쭉쭉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내 손안에 쥐어진 카드는 다 써버린 상태였고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다는 생각에 나는 올인을 하기로 했다. 이리저리 머리 굴리고 또 굴리지 말고 직진해서 뚫고 나가보자! 시간은 지금이야. 카르페 디엠. Seize the day!




그래서 그에게 물었다. 




"어.. 저기.. 그러니까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응? 우리? 글쎄.. 너는 우리가 어떻게 될 거 같은데?" 


나를 떠보는 듯한 얘기를 하면서 소개팅남은 한 얘기를 덧붙였다. 


"난 네가 상처 받는 걸 원하지 않아." 


그러니 당최 이 사람은 고백할 생각이 없는 거군. 이건 그냥 내가 고백하라는 소리네. 하아.. 




그럼 어쩔 수 없지. 

내가 고백하는 수밖에. 

난 21세기 신여성이니까.


직진녀답게 이번에도 당당하게 그에게 말했다. 


나? 난 네가 좋아. 그것도 아주 많이. 그래서 네가 괜찮다면 난 너랑 사귀고 싶어. 그전에도 말했듯이 나도 너처럼 진지한 관계를 원하지 않아. 그러니 그거에 대해 부담 가지지 않아도 돼. 하지만 네가 싫다면 그것도 괜찮아. 너와 함께 했던 시간 동안 너는 내가 바랐던 그 이상의 것을 나에게 주었어. 너로 인해서 난 과거에 남아있던 감정을 청소할 수 있었고 내가 나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거든. 네가 내 말을 들어줬기에 난 자유로워진 것 같아. 나에게 이것을 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해. 그렇기에 우리 관계가 잘 되지 않는다 하여도 난 너에게 항상 감사하면서 살 거야. 내가 받을 상처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는 없어. 내 생에 한 사람이 나의 얘기를 그렇게 정성 들여 들어준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한 추억을 가진 사람이 될 테니까. 너와 함께한 시간은 잊지 못할 시간으로 난 기억할 거야.

이게 내가 지금 너와 우리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야.

그래서..
 나랑 사귀어 볼래?" 


와우.

남자만 고백하라는 법 있나! 여자가 다가가면 지는 거라고 누가 그랬나! 



나도 내가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말할 줄 몰랐는데 정면돌파를 하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아무런 시작도 안 했는데 혹시나 잘못될 미래에 대해, 아직 받지도 않은 상처에 대해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난 미래를 사는 게 아니라 지금을 살고 있고, 지금의 나는 그가 미친 듯이 너무 좋을 뿐이었다. 나는 네가 좋고, 너를 좋아하는 내가 너무 좋은 걸. 


이미 이 사람과의 세 번의 만남을 통해서 난 많은 것을 얻은 후였기에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인생에 내 이야기를 이렇게나 잘 들어주고 내 마음을 자유롭게 해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행운이 아니던가. 그런 행운같이 찾아온 행복한 시간을 가지고 사는 것도 앞으로 내가 살 인생에 힘이 될 거란 걸 알았기에 이 사람에게 고백을 하는 게 두렵지도 않았다. 


내가 이렇게 얘기를 하고 나니 정작 소개팅남은 엄청 놀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정면돌파를 할 줄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이 여자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당당하고 자기가 원하는 게 뭔지 확실히 아는 애구나. 매력적이다!"라는 생각이 그의 얼굴에 그대로 나타났다. 


후훗.

그래, 이때는 내가 봐도 쫌 멋있었다. 

넌 나를 알면 알수록 더 많은 매력에 빠지게 될걸?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이 자신감은 뭐죠..ㅎㅎ) 

그의 표정을 보고 이제 됐다!라는 느낌이 왔고 당당한 자신감을 앞세워 쐐기를 박듯 그에게 한 번 더 물었다. 



그래서, 

나랑 사귈 거야 말 거야? 



그러더니 그가 어깨를 으쓱이면서 대답한다:



ㅋㅋㅋㅋㅋ 정말 표정이 딱! 이랬다 ㅋㅋㅋㅋㅋㅋ


"그래~ 한번 사귀어보자!" 



하이고. 참 오래도 걸리셨네. 그까지 것 한번 지르고 보지 뭐 그리 뜸을 들였는지. 나중에 남편에게 왜 이렇게 데이트 신청을 안 했냐고, 왜 그리 뜸 들이며 나한테 먼저 고백하지 않았냐고 물어보니 남편은 나를 보자마자 이 여자애는 함부로 대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더 조심스럽고 신중했었다고 한다. 자기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 정확히 모르는 때에 괜히 진지한 관계를 가졌다가 서로에게 상처만 주고 끝나는 관계가 될지 모르는 두려움도 있었기에 쉽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한다. 



하지만 난 알고 있었지. 

내가 원하는 게 무언인지 그때는 너무 정확하게 알고 있어서 그 누구에게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고백을 그에게 할 수 있었다.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는 용기를 빌려 마음이 가는 대로 솔직 담백하게 전달한 진심은 그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충분했다.  



그렇게 12시가 되기 전, 내가 바라던 대로 그날의 마법이 풀리기 전의 나는 내가 원하는 결말(?)을 맺을 수 있었고 그의  "Sure!"이라는 대답과 함께 우리는 함께 집으로 가는 스트릿 카에 올라탔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난 뒤라 우리 둘 사이에는 묘한 기운이 돌았다. 어떻게 할지 몰라 앞만 바라보고 있었던 내 머리 위로 그의 손이 살짝 스쳤고 이내 그는 내 머리를 천천히 몇 번 쓰다듬어 주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살짝만 닿은 그의 터치였는데도 불구하고 난생처음 겪는 전율이 온몸을 감쌌다. 



찌리릭. 

이런 게 전기가 통한다고 말하는 건가. 

머릿속은 팡~팡~ 폭죽이 연신 터지는데 얼마나 찌릿찌릿하던지. 소설에서나 봤던 "불꽃 튀기는 사랑"이라는 표현을 몸소 깨닫게 되었다. 괜히 그런 말이 나오는 게 아니었구나. 그와의 대화에서만 느껴졌던 불꽃과는 전혀 다른 레벨의 불꽃, 지진, 천둥 번개가 그의 터치와 함께 전해졌다.  



그의 손길이 느껴지던 그 짧은 순간, 진정 우리 둘만 남겨둔 채 나머지 세상은 온통 검은 바탕화면으로 바뀌는 것 같았다. 짙게 내린 검은 하늘에 반짝이는 건 그와 나의 별뿐이었다. 나의 시간과 그의 시간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세상은 멈춘듯했고 온 우주 속에 우리 둘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광범위한 우주 안에서 우리 둘의 빅뱅이 새로운 우주를 탄생시키고 있었지만 거기에 있던 그 누구도 이 엄청난 순간을 목격하지 못했다. 우리 둘 외엔.



이렇게 우리 사이엔 엄청나게 큰, 그 무엇으로도 잴 수 없는 전류가 흐르고 있는데 스트릿 카를 타고 가던 다른 사람들은 어쩜 그리 세상 평온하던지. 우리의 세상은 형형색색의 밝은 폭죽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지만 주변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의 시간을 유유히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어떻게 이렇게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는지 신기할 뿐이었다. 



그렇게 누군가에게는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가는 지극히 평범한 시간 속에서 우리는 새롭게 탄생한 우주에 발을 들여놓았다.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우리만의 지극히 평범한,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특별한 시간은 시작되었다. 

이전 11화 11.너와 나의 시간이 교차하던 순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