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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lvia Apr 10. 2021

11.너와 나의 시간이 교차하던 순간

인생은 타이밍!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어른들이 종종 하시는 말씀이 있다.


인생은 타이밍!



어렸을 때는 이게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

인생은 타이밍이고 삶의 모든 일은 다 때가 있다는 말. 

그런가 보다.. 하고 별생각 없이 살았는데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은 이 말의 뜻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2008년에 나온 데이빗 핀처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라는 영화처럼 이 삶의 진리를 아름답게 해석한 영화도 없지 않나 싶다. 지금은 내 마음속 탑 10 영화 리스트에 들어갈 만큼 좋아하는 영화로 자리 잡았지만 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사랑하기까지 난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주 오래전, 전 남자 친구와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본 적이 있다. 시간이 거꾸로 흘러가 할아버지로 태어났다가 아기로 생을 마치는 벤자민 버튼의 이야기. 나의 호기심을 채우기에 충분한 신선한 플롯이었고 게다가 브래드 피트가 나온다니 기대를 한껏 품고 영화관에 갔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영화가 너~~ 무 재미없는 거였다. 벤자민은 할아버지로 태어나 점점 젊어지다가 브래드 피트 외모가 피크 찍었을 때 사랑하는 여인인 데이지와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린다. 시간이 흐를수록 계속 어려지는 자기 모습을 못 견뎌 가족을 잠시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서 생을 마감한다. 뻔한 것 같은 스토리 때문에집중하려고 노력했지만 잘되지 않았고 영화 보는 내내 하품만 쏟아질 뿐이었다. 영화관을 나와서 이해를 하지 못했기에 찝찝했고 머릿속에 계속 이 한마디가 맴돌았다: "So what?"



몇 년 후, 과테말라에 살 때 이 영화를 다시 한번 보게 되었다. 심심하게 혼자 보내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이런저런 영화를 검색하는데 벤자민 버튼이 떴다. 그때는 이해 못 했지만 이번에 보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영화를 틀었다. 


다른 수많은 영화도 많았을 텐데 왜 이 영화였는지는 모르겠다. 전 남자 친구와의 관계가 금이 가기 시작했을 때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와 함께 했던 시간을 기억하고 싶어 무의식적으로 이 영화를 골랐을 수도 있고, 영화 평론가들이 아름답다고 칭찬한 영화를 이해하고 싶다는 도전정신이 생겨서 골랐을 수도 있겠다. 


이유야 어쨌건 난 벤자민 버튼의 삶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꼭 이해하고 말리라~하는 오기로 중간까지 버텼지만 이런 야심 찬 내 결심을 비웃기라도 하듯, 벤자민 버튼을 끝까지 볼 수 없었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고 흥미롭지도 않은 무미건조한 스토리. 이번에도 실패했다는 생각과 괜한 시간만 낭비했다는 생각에 이 영화가 싫어졌다. 



난 그냥 영화 문외한으로 사는 걸로.

예술적 감각이 없는 내 탓인 걸로. 

벤자민 버튼. 

너의 삶을 이해하기엔 난 너무 부족하구나. 

예술적이지 않아 미안해. 

너와 나는 맞지 않는 거 같으니 여기서 그만하자. 

이제 안녕. 잘 가~



그렇게 이 영화를 내 기억 속 저 멀리 보내버렸다. 

내 기억 속 상자에서 이렇게 점점 잊혀 갔던 이 영화가 몇 년 후,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다시 내 삶에 등장했다.


어디서?





소개팅남과의 세 번째 데이트에서. 





소개팅남에게 내 과거를 털어놓으면서 전 남자 친구의 잔해를 정리하기 시작하고 우리가 이미 수년 전 알게 모르게 지나쳤던 사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무조건 이 사람은 내 운명이라 생각했다. 아니,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내 마음이 이미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난 그런 확신이 가득 차 있었는데 이 뜨뜻미지근한 소개팅남은 두 번째 데이트 후에도 아무런 미동이 없는 거다. 분명 너도 좋은 시간 보낸 거 같은데 왜 연락이 없니? 응? 왜? 아직도 진지한 관계로 급속도로 발전할 거 같아 두렵니? ㅡ.,ㅡ ;; 



하이고.

이 남자.

못쓰겠네, 증말!! 



하지만 난 도저히 얌전한 고양이처럼 그의 연락을 기다릴 수 없었다. 내 마음은 이미 내가 걷잡을 수 없는 거센 파도가 휘몰아치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만 있을까. 그럼 어쩔 수 없지. 어떡하겠어. 안달 난 사람이 먼저 다가가야지. 


그래서 난 이번에도 또! 그에게 먼저 데이트 신청을 했다. ㅎㅎㅎㅎㅎㅎ


벌써 세 번째다. 



여자의 자존심? 

그런 거 다 상관없었다.

자존심이 뭐임? 



신기하게도 자존감이 회복되고 나니 자존심을 내다 버리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운명의 짝을 만났는데 이것저것 잴 시간이 어디 있나. 


마음이 가는 대로 직진. 

쭈욱 -

빵빵 -  




그래서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번 주 주말 날씨 좋다고 하는데 토론토 아일랜드 갈래? 이렇게 좋은 날씨 그냥 보내기 너무 아깝네." 


"응~ 그래~!" 




하아...

너 뭐냐 진짜.. 


이렇게 흔쾌히 오케이 할 거면서 대체 왜 먼저 연락을 안 하니?? 

앙?!?!



어쨌든 오케이 했으니 난 이 세 번째 데이트에 승부수를 걸기로 했다. 로맨틱 데이트 끝판왕인 토론토 아일랜드 가자고 했으니 말 다 했지. 내가 데이트 물어보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삼세판으로 끝. 난 깔끔한 게 좋으니까. 세 번째 만남으로 우리 사이 단판(?)을 내리라는 다짐, 아니 각오를 하고 그와의 데이트를 준비했다. (무슨 각오 까지야...;; ㅎㅎㅎㅎ) 



말은 이렇게 하지만 그와의 만남을 기다리는 그 일주일은 그렇게 설렐 수가 없었다. 토론토를 잠시 벗어나 토론토 아일랜드를 갈 생각을 하니.. 눈 떠 있던 그 일주일의 모든 시간은 온통 그 사람 생각뿐이었고, 승부수를 건 세 번째 데이트를 어떻게 할지 행복한 고민을 하며 보냈다. 이따금씩 만약 이 관계가 내가 원하는 데로 가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으나 도로 다시 괜찮아졌다. 그를 다시 만나 대화할 생각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으니까. 그래서 걱정보단 설렘이 앞섰고, 행여나 잘 안되더라도 그 사람과 그동안 몇 번의 만남을 가질 수 있었음에 감사하기로 했다. 


청량했던 그 날 날씨. 아직도 그 공기를 잊을 수 없다.


높고 푸르른 가을 하늘, 뜨거운 여름이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려 바삭한 햇빛을 비추던 9월의 어느 날, 예쁘게 단장을 하고 내가 좋아하는 분식집에서 떡볶이와 김밥을 사서 그를 만나러 갔다. 떡볶이와 김밥 + 끝내주게 좋은 날씨 + 토론토 아일랜드 나들이 = 로맨틱 오브 로맨틱 (즉,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라는 방정식을 혼자 세우고 들뜬 발걸음으로 그를 만났다. 


이렇게 철저히 준비된 나의 데이트 계획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개팅남은 어느 때와 다르지 않게 나에게 반갑게 인사했고 우리는 토론토 아일랜드로 가는 배에 올랐다. 


토론토 아일랜드에 도착해 호수가 잘 보이는 비치로 가서 준비해 온 비장의 무기인 떡볶이와 김밥을 꺼냈다. 떡볶이 하나 먹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자기가 먹어본 떡볶이 중에 최고 맛있다고 하며 엄지 척을 날려주었다. 후훗.  내가 계획했던 대로 모든 게 차차 흘러가는 군. 역시 치밀한 계획을 세운 보람이 있었어. 



하지만 감탄에 바로 이어진 질문, 이거 대체 어떻게 만든 거냐며 나에게 비법을 묻는데...



비법은 무슨 비법.

분식집 떡볶이야.

내가 이걸 어떻게 만드니..

이 정도로 떡볶이 할 줄 알면 내가 분식집 차렸지..




내 말에 껄껄 웃더니 그래도 이렇게 준비해 준 정성에 감동을 했는지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고 계속했다. 내가 만들었다면 그가 느낀 감동이 두 배가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그가 그때 "이 여자다!"라고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까지 가진 않았고 대신 떡볶이를 시작으로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었다. 



영화를 전공한 소개팅남은 자연스레 영화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여러 영화에 대해 얘기를 하다 나에게 툭 던진 질문.



"처음 봤을 때 이해 못 했다가 나중에 다시 봐서 이해된 영화가 있어? 난 어떤 영화는 처음 봤을 때는 이해를 못 했다가 나중에 두 번 보고, 세 번 보고.. 그렇게 몇 번을 보면 이해가 돼서 결국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게 되는 영화가 있더라고. 나한테 벤자민 버튼이 그런 영화야." 



쿵. 



벤자민 버튼? 

내 기억 속 저 멀리 날려버린 그 영화?

이해가 안 돼서 짜증 나게 만든 그 영화?

그게 너 마음속에 깊은 곳에 자리 잡았다고? 




왜?

난 이해 못 하겠던데!!




하지만 영화를 전공하기까지 한 그도 벤자민 버튼을 처음 봤을 때 이해를 못 했다고 하니 이상하게 동질감이 생겼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어떻게 이 영화를 이해하고 좋아하기까지 되었는지. 그에게 물었다.




"이 영화가 왜 좋은데? 

왜 처음에는 몰랐는데 두 번째 봤을 때 이해가 갔어?" 



그러니 그가 영화에 대한 경이로운 해석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나도 이게 무슨 영화인가 했어. 그저 포레스트 검프와 비슷한 종류의 영화라 생각했거든.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 다시 보니까 알겠더라고. 늙은 노인으로 태어나 아기가 점점 젊어지다가 생을 끝낸 그런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벤자민 버튼의 삶을 통해서 시간의 개념, 인생의 타이밍,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해 감독은 얘기하고 싶었던 거야. 


우리는 대게 시간이 직선형으로 흘러간다고 생각하잖아. 과거 -> 현재 -> 미래. 


그런데 이 영화는 시간의 개념을 아예 바꿔버려. 그래서 시작부터 아주 거대한 거꾸로 가는 시계를 보여주면서 이 영화는 시간, 타이밍에 관한 이야기일 거라고 관객에게 메세지를 보내지.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케이스가 뉴올리언스에 나타나. 버튼 집안에 태어난 아기인데 할아버지 모습을 하고 태어난 거야. 그것도 아주 꼴 보기 싫은 늙은이로. 벤자민의 삶은 우리가 끝이라고 생각된 곳에서 시작하는 거지. 미래는 현재에 존재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시간은 직선형으로 흐르는 게 아니라 원형을 그리면서 흘러가는 걸지도 몰라. 


아주 어린 나이에 벤자민은 데이지를 요양원에서 만나. 데이지 할머니가 요양원에 있었거든. 데이지와 같이 놀고 싶지만 늙은 할아버지 모습을 하고 있는 벤자민은 데이지와 쉽게 친구가 되지는 못해. 오히려 데이지 하러미는 저런 이상한 애와는, 아니 이상한 늙은이와는 놀지 말라고 하며 데이지를 보호하려 하지. 하지만 데이지는 벤자민이 비록 겉으로는 늙어 보여도 속은 자기와 똑같은 아이라는 걸 알고 둘은 친구가 돼. 그리고 꽤 오랜 시간 동안 그냥  "아는 친구 사이"로 지내. 각각 자기의 삶을 살기 시작하거든. 하지만 데이지가 사고를 당하고 더 이상 발레를 하지 못하게 되면서 그 둘 삶은 바뀌게 되지.


데이지 사고 났을 때 벤자민이 나레이션으로 했던 말 기억나? 만약 그녀 친구의 신발 끈이 끊어지지 않았더라면, 만약 트럭이 조금만 더 일찍 움직였더라면, 만약 택시 기사가 조금만 더 집중을 했더라면, 단 몇 초의 차이만 있었더라면, 데이지는 사고가 나지 않았을 거야. 그 나레이션 말이야. 영화를 보면서 이 "만약에.."라는 나레이션이 인생의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잘 나타냈단 생각이 들었어.



If only one thing had happened differently: if that shoelace hadn't broken; or that delivery truck had moved moments earlier; or that package had been wrapped and ready, because the girl hadn't broken up with her boyfriend; or that man had set his alarm and got up five minutes earlier; or that taxi driver hadn't stopped for a cup of coffee; or that woman had remembered her coat, and got into an earlier cab, Daisy and her friend would've crossed the street, and the taxi would've driven by. But life being what it is - a series of intersecting lives and incidents, out of anyone's control - that taxi did not go by, and that driver was momentarily distracted, and that taxi hit Daisy, and her leg was crushed.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데이지가 이 사고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벤자민과 결혼을 하진 않았을 거야. 하지만 인생에 모든 일이 그렇듯 때가 되면 일어날 일은 일어나야 할 시기에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잖아. 그래서 이 사고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일어나야 할 시기에 일어났고 결국 이 일로 인해 벤자민과 데이지는 가정을 꾸릴 수 있게 돼. 



이 둘이 어렸을 땐 벤자민이 너무 늙었었고, 벤자민이 성인이 되었을 때는 데이지가 너무 어려서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다가 둘의 나이가 교차하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그러니까 둘이 만나야 했을 시기에 둘은 다시 만나는 걸 보면서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말이 그렇게 와 닿더라고.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어.


You are exactly and precisely where you need to be right now.
지금 네가 있는 곳이 네가 있어야 할 곳이라는 것.




이 사실은 가끔 삶이 너무 힘들거나 고단한 시간을 보낼 때 많은 위로가 돼. 모든 것은 때가 있고 지금 나는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다는 거 말이야. 한 영화에 이런 메시지를 담는 게 쉽지 않은데 이 감독은 이걸 이렇게나 아름답게 풀었더라고. 


그리고 내가 또 신기하게 생각했던 건 벤자민 버튼이 태어나고 유년시절을 보내는 곳이 요양원이라는 점이야. 왜 하필 요양원일까? 다른 세팅도 많았을 텐데. 그런데 요양원을 이야기 시작하는 곳에 놓음으로써 죽음이 있는 곳에서 새로운 삶이 태어난다는 걸 또 말해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무언가의 끝은 또 다른 것의 시작이라는 것. 그러니 무언가와 이별을 할 시간이 와도 너무 낙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 사고로 통해 데이지는 모든 것이 다 끝나버렸다고 절망을 하지만 이 암흑 같은 시기 속에서 새로운 삶이 다시 시작되잖아. 삶의 한 챕터의 끝에서 다른 챕터가 시작하는 거지. 그것도 벤자민과 같이하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삶이.  


요양원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죽어가는 할머니 할아버지 친구들을 보면서 벤자민은 어렸을 때부터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을 해. 그리고 이 둘은 떼려야 결코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걸 어린 나이에 알게 되지. 그래서 벤자민은 이미 알아. 자기가 결국 아기가 되어 죽을 거라는 걸. 그런데 자기가 어떻게 죽을지 아니까 벤자민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남은 인생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도 너무나도 잘 아는 거야. 그래서 자기의 방식으로 후회 없는 삶을 살기로 선택을 해. 신기하지 않아? 어떻게 죽을지 알면 어떻게 살아햐 하는지는 너무나도 쉽고 명확하게 알 수 있다는 사실이 말이야. 이 영화에 신기한 포인트가 한두 개가 아니야. 


삶이 있으니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으니 삶이 있다는 것. 이런 철학적인 요소를 감독이 영화에 녹여냈더라고. 자칫하면 지루하거나 진부하게 보일 수도 있을 러브 스토리를 통해서 말이지. 


처음에는 이런 것들을 보지 못해 영화가 별로라고 생각했고 데이빗 핀처가 왜 이런 영화를 만들었을까 의문이 들기도 했었어. 그런데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 그러니까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원을 그리며 흘러갈지도 모른다는 것,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것, 그리고 죽음이야말로 삶을 완성하는 빼려야 뺄 수 없는 요소라는 걸 깨닫게 되니 이 영화는 너무나도 아름답고 천재적이란 생각이 들었어. 




그날 토론토 아일랜드의 노을.




와...


이미 콩깍지가 단단히 씌워져 있었기에 소개팅남이 뭘 하던 멋있게 보였지만 내가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영화를 신들린듯한 해석으로 풀어주니 뭐.. 이건 게임 끝이었다. 



그의 영화 해석을 듣고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는 건 말을 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나 이해를 하고 싶어도 이해를 할 수 없었던 영화가 내가 그 당시 느끼고 깨달은 인생의 진리를 그토록 아름답게 담고 있었다니. 이런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긴 해석을 다른 누구도 아닌, 운명의 상대라고 느끼고 있던 소개팅 남으로부터 듣다니. 이게 운명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콩깍지 씌고 안달이 나면 뭔들 운명이 아니겠냐만은..ㅎㅎ)



소개팅남에겐 말하거나 티를 내진 않았지만 그의 영화 해석을 듣고 영화 속에서나 일어날 법할 일을 우리가 바로 그 순간 겪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내 마음은 터질 것만 같았다. 데이지와 벤자민처럼 오랜 시간 동안 옷깃만 스치며 만날 듯 만나지 못했던 우리 두 사람이었다. 수년 전 같은 중학교를 다녔었고 그 이후 대학교 캠퍼스에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마주치는 일이 많았을 텐데도 전혀 서로의 존재를 알지도 못한 채 각자의 삶을 열심히 살뿐이었다. 공통분모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절대 만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우리 둘은 신기하게도 인연의 끈이 닿아 결국 만나게 되었다. 지금은 눈부신 온타리오 호수를 보며 마치 우리 이야기인 것 같은 벤자민 버튼의 영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였다. 



벤자민과 데이지의 삶이 교차했던 그 순간에 우리가 있었다.  



이 정도면 말 다 한 거 아닌가. 


내 마음은 이미 천둥, 번개, 지진, 온갖 난리도 아닌 오케스트라의 항연이 펼쳐지고 있는데 소개팅남은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에 대해 얘기는 하지 않은 채 다른 주제로만 대화를 이끌고 나갔다. 



네가 말한 인생의 타이밍, 그 중요한 순간에 우리는 지금 놓여있는 거라고! 벤자민이랑 데이지가 드디어 만난 그 순간에 우리가 있다니까. 그걸 알아 몰라? 응? 지금 내 마음이 방방 뛰고 있는 보여 안 보여?



과연 뜨뜻미지근한 소개팅남은 우리 사이에도 자기가 해석한 영화 같은 요소가 있다는 걸 캐치했을까 아님 그냥 모른 척하는 걸까. 긴가민가한 그의 마음을 대체 어떻게 확인해야 하지? 토론토 아일랜드를 하루 종일 걷고 그와 대화를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엔 계속 이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오늘이 내가 승부수를 건 날인데 이미 해는 저물었고 하루가 끝나가고 있었다. 오늘 아니면 안 돼! 하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으나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엄청난 시그널을 보냈는데 이 사람은 대체 돌로 만들어졌는지.. 내 시그널에 그저 미미한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아휴.. 답답해라. 



그렇게 별다른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토론토로 다시 돌아오는 배에 우리는 올라탔다. 

어둑하게 내린 밤 위로 반짝이는 토론토 스카이 라인을 보며 잠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Listen to your heart and make the best out of it. 






그래,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마음의 소리를 듣고 네가 원하는 걸 찾아가.



그래서 난

많은 생각하지 않고 

심플하게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내 마음의 소리에 솔직하게 응답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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