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두었던 비상금이라도 찾은 건가. 무슨 금덩이라도 나왔나 싶어 얼른 가보았다. 남편은 함박미소를 지으며 컴퓨터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고 화면 속에는 해맑게 웃고 있는 내 아이들이 있었다. 어디서 찾았는지 스마트폰 이전의 핸드폰으로 찍은 흐릿하고 딱 옛날 사진 같은 것들이었다. 유물은 유물이었다. 남편은 팔을 끌어 앉아보라더니 동영상을 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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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신나게 스키를 타고 있었고 어느 정도 스피드가 줄었을 때 아들은 머리가 간지럽다고 헬멧을 만지작거렸다. 동영상을 찍고 있는 아빠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뒤이어 딸도 간지럽다고 아빠를 불렀다. 그러는 사이 저만치 멀어져 있던 나에게 다가왔다.
"여보, 애들이 머리 간지럽대."
"엄마, 머리 간지러워."
"참아봐. 못 참겠어?"
나는 한쪽만 장갑을 벗고 그 자리에 선채로 허리만 굽혀 헬멧을 벗기지 않고 머리를 통통통 때려 주었다. 그걸로 가려움이 해소가 된 건지 아이들은 또 유유히 스키를 타고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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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나는 배를 잡고 웃었다. 천진난만하고 조그맣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너무 귀여웠다. 남편은 계절 스포츠 하나쯤은 할 줄 알아야 한다며 큰아이가 5살 때부터 스키를 가르쳤다. 아이들은 어린데도 스피드를 즐길 줄 알았다. 반면 나는 스키를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겨울 스포츠다 보니 얼어 죽지 않으려고 옷은 있는 대로 껴입고 발이 자유롭지 못하니 꼬맹이들을 건사하며 즐길 수 있는 스포츠는 아니었다. 엄마인 나에게는 스키장 외출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사정이 그러하니 동영상속 나의 얼굴은 일그러져 짜증이 만면에 가득하고 겨우겨우 무거운 몸뚱이를 움직이고 있었다.땀이 나서 간지러운 건데 잠깐 헬멧 벗기고 찬바람만 쐐주면 시원할 텐데 그게 귀찮아서 짜증을 숨기고 억지로 하고 있는 꼴이라니.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이들에게 죄스러워 마음이 아팠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이들 온기도 숨결도 미소도 아무것도. 한 번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봐 주질 못했다. 한 번도 따뜻한 품으로 안아주질 못했다. 엄마라는 타이틀만 달고 있을 뿐 엄마 답지 못했다.
시어른들 삼시 세끼에 수발 들어가며 형님네와 한 지붕 아래 북적이며 살아가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서열도 낮은 데다(서열 무시하고 큰소리친 적도 있다ㅋㅋ) 성격도 이 모든 걸 품어줄 만큼 너그럽지도 않다. 그런 사람이 스트레스를 풀 곳이라고는 나약하디 나약한 아이들뿐이었다. 힘들다고 뿌리치고 화난다고 밀쳐내고 귀찮다고 짜증 내고 말 안 듣다고 소리 지르고. 그래서 나는 아이들 사진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다. 많이 안아주지 못한 것이 미안해서, 부드러운 말투로 대답해주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어서,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에 가려 일렁거리는 채로 바라보기만 한다.
아장아장 뒤뚱뛰뚱 걸어가는 아이들이나 포동포동 살이 올라 꼼지락꼼지락 거리는 아이들을 볼 때면 그렇게 이쁠 수가 없다. 만지고 싶고 안아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