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잘 자고, 잘 놀고, 잘 먹는 게 장땡이다
요즘엔 그런 걸 누가 믿어하겠지만 필자는 철석같이 믿는 미신이 있었는데 ‘섣달그믐날 밤 잠자면 눈썹이 하얘진다’는 말이었습니다. 젊은이들을 위해, 섣달(설이 있는 달=설달=섣달)그믐은 그다음 날이 정월 초하룻날인 설날 전날 밤이란 것입니다. 어렸을 적 가족들은 건넛마을 박 씨 할아버지의 하얀 눈썹 얘기까지 거들면서 절대 잠을 자서는 안 된다는 걸 강조하였습니다. 겁이 난 우리 형제들은 그럼 그 할아버지도 섣달그믐날 잠을 자서 눈썹이 하얘진 거라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그래 하룻밤 정도야 하면서 버티는데 밤이 깊어질수록 졸린 잠을 쫓는데 힘이 들고 어른들의 말소리가 띄엄띄엄 들리다가 점점 멀어지는 듯하였습니다. 깜짝 놀라 일어났는데 아뿔싸 아침이 환해져부렀습니다. 밤새 아무 일 없었겠거니 하고 있는데 작은 형이 “야 네 눈썹 하얘졌어. 거울 한 번 봐!” 거짓말처럼 들렸지만 혹시나 하고 거울을 보니 양 눈썹이 진짜로 하얘진 것입니다. 울음보가 터지려는 걸 참으며 눈썹을 만지니 하얀 먼지 같은 게 날리더군요. 어른들한테 밀가루는 전 부치는 데만 필요한 게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도대체 왜 섣달그믐에 잠자면 안 된다고 했을까요? 그냥 좋게 해석하여 온 집안 식구가 설 준비를 하는데 어린이라 할지라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함께 거들어야 한다는 훈화만은 아닌 뭔가 있는 건 아닐까요? 알고 보면 그냥 미신이라 여겼던 여기에는 오래된 ‘신화적 배경’이 있습니다.
왜 하필 섣달 그믐밤일까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옛날에는 인간이 죄를 많이 지으면 죽는다고 믿었습니다. 어렸을 적 무서운 말 중 하나가 ‘죄로 간다’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은 필시 나쁜 짓을 하면 죽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자는 짐승(을) 잡으면 죄로 간다'라든가 물건을 함부로 쓰거나 낟알을 함부로 버려도 따라붙는 말은 '죄로 간다'였습니다. 사람의 뱃속에는 세 마리의 죽음의 벌레가 있는데 바로 ‘삼시충(三尸蟲)’이란 것입니다. 요놈은 사람이 죄를 짓도록 화를 내게 한다든가 질투를 내도록 충동질을 합니다. 왜냐면 빨리 죽어야 제삿밥을 얻어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짜증 부리거나 인간이 죄를 짓는 건 바로 이 삼시충 때문이라는 것인데, 요놈은 우리 뱃속에 있기 때문에 몰래 나쁜 맘먹은 것까지 다 알고는 기억해 두었다가 섣달그믐날 사람들이 잠든 사이에 우리 몸을 빠져나가 하늘에 있는 옥황상제께 고해바치는 임무를 띠고 있습니다. 그러면 옥황상제는 죄에 따라 사람의 수명을 깎습니다.
우리가 한 살 한 살 먹을 때마다 늙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란 것입니다. 더 이상 깎을 수명이 없으면 비로소 인간이 죽는다는 얘기로 동양신화 중 하나인 『산해경』이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신화는 도교에서 적극 받아들여 하늘이 내려준 사람의 수명을 120년으로 봅니다. 이리하여 생긴 도교식 수련법인 경신(庚申)수련법이란 게 있다고 합니다. 고려시대 때는 경신수야라는 풍속이 흥행했는데 그렇지 않아도 놀기 좋아하는 우리 민족, 왕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전 백성이 이날 밤엔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밤을 불태웠다고 합니다. 특히 충렬왕 때는 국고가 바닥날 정도였다고 하니 얼마나 놀기를 좋아했으면 그랬을까 싶습니다. 이런 놀이성이 조선시대에 와서 유교라는 이념에 억눌리고 억압받아 감정을 드러내는 것조차 저급하고 사악한 것으로 취급받았습니다. 고려 때부터 흥행하던 밤샘 연회는 조선조에 와서 유교의 성리학이 확립된 성종으로부터도 200년이 지난 영조 때 드디어 사라졌는데, 영조는 신하들의 등쌀에 못 이겨 밤샘 연회를 금지하는 대신에 등불을 밝히고 근신하면서 밤을 새우도록 명하였습니다. 섣달그믐날 밤 온 집안에 등불을 훤하게 밝혀놓고 수세(해지킴이)를 하는 풍습은 이렇게 생긴 것입니다.
그럼 오래 사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삼시충은 섣달그믐 때 단 하루 하늘나라에 올라가서 옥황상제께 보고를 하니까 이날 하룻밤만 참고, 잠을 안 자면 늙지도 죽지도 않을 것이란 결론이 나옵니다. 눈썹이 하앻지는 건 섣달그믐날 밤 잠자는 동안 삼시충이 그동안의 죄업을 몽땅 옥황상제께 고해바쳐 나이를 갑자기 많이 먹어 노인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여기서 의심 가는 대목 한 가지! 미인은 잠꾸러기라는 말이 있는데 이들은 섣달 그믐밤에도 늘어지게 잠을 자서 ‘미인박명’이 되었을까요? 즉, 삼시충이 드나드는 것도 모른 채 잠만 자다가 수명을 다 깎아 먹었기 때문에 박명하는 걸까요? 미인박명이 나온 배경은 중국의 소동파(蘇東坡)가 쓴 시 <박명가인(薄命佳人)>이라는 게 있다는데 이 시에서 '자고가인다명박(自古佳人多命薄=예로부터 미인은 운명이 기박한 사람이 많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가인명박(佳人命薄)이 현재에 이르러 '미인박명(美人薄命)'으로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미인박명'이란 미모가 뛰어난 여자는 그 운명이 기구하거나 길지 못함을 뜻하는 말로 불행한 일이 따르기 쉽고 요절하기 쉽다는 말인데, 당시 무슨 과학적인 통계가 있었다든가 하는 건 아닐 테고 아마 세인으로부터 주목받는 미인이다 보니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을 거고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다 보니 차츰 미인은 빨리 죽더라는 확증편향에 빠진 게 아닐까 추측됩니다.
그러나, 미인박명은 의학적으로 보면 완전히 틀린 얘기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잠을 충분히 자야 머리도 맑고 피부가 탱탱해지는 미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화적으로는 미인박명이 맞을 수 있겠지만 의학적으로는 ‘미인장수’가 맞다는 역설에 부딪히게 됩니다. 「사회과학과 의학」 2024년 8월호에는 ‘외모와 장수: 예쁜 사람이 더 오래 살까?’라는 제목의 연구 결과가 실렸는데, 외모의 매력과 수명 사이의 연관성 연구로 미국 애리조나주립대의 코너 M.시핸 부교수와 텍사스 오스틴대 대니얼 하머메시 교수가 8개월간 공동으로 진행한 논문입니다. 1957년 위스콘신 고등학교 졸업생들을 2022년까지 8,386명을 추적, 조사하였는데, 연구 결과 졸업 사진에서 매력 없는 얼굴로 평가된 사람들의 수명은 짧은 ‘우려스러운 연관성’이 관찰되었으며 통계적으로 유의미했다고 연구진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여성의 경우 남성보다 차이가 컸는데, 외모 매력도 6등급에 속한 여성은 그 외 여성들보다 평균 2년가량 일찍 사망했다는 것입니다. 시핸 교수는 “여성이 외모에 대해 견뎌야 하는 불균형적인 사회적 압력과 판단을 반영하는 것 같다”고 합니다. 덜 매력적이라고 여겨지는 여성은 수입이 적고 교육 수준이 낮은 남성과 결혼하는 경향이 작용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별 걸 다 연구하는 미국이 부럽긴 합니다.
좌우지간 대한민국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좀 속돼 보이지만 잠 잘 자고 잘 놀고 요즘 뜨고 있는 먹방처럼 맛나게 먹어야 할 것입니다. 심리학자 매슬로우가 얘기한 욕구 5단계 중 생리적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수 조원을 가진 재벌이나 무소불위의 권력자도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요즘 신화를 잃어버리고 살고 있는 점이 안타까워 오래된 옛 얘기를 해보았습니다. 신화와 전설은 문학과 예술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재미’의 요소, 즉 놀이의 요소이기도 합니다.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 ‘겨울 왕국’ 등이 모두 북유럽의 신화인 켈트 신화가 원천인 게 증명해 줍니다. 여러분들이 즐겨 찾는 스타벅스의 상징도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바다의 요정 사이렌을 갖다 쓴 것입니다. 사상 최초로 달 뒷면에 착륙하여 중국인들을 들썩이게 만든 달 탐사선 창어(중국어 발음)도 달의 여신이라는 ‘항아’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바야흐로 21세기는 스토리텔링 시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