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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끝, 이별?

이별은 고통의 끝일까?

by 타조

하루의 끝, 침대에 몸을 눕힌다. 불이 꺼진 방 안은 어둡고 고요하다. 어둡고 고요한 공간에 누워 천장을 멀뚱멀뚱 바라보다 가만히 눈을 감아본다. 쿵쾅쿵쾅, 평소에 느껴지지 않던 심장의 박동이 비정상적으로 크게 느껴진다. 심장은 오늘 하루를 쉬지 않고 뛰었지만 그 기척을 고요한 방 안의 침대에 누울 때까지 느끼지 못했는데, 슬픔에 빠진 여인이 바닥에 옆으로 누워 자신의 팔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듯 작은 신음 소리를 내며 훌쩍거린다. 유독 이 순간, 훌쩍거리는 심장의 작은 신음 소리가 내게 크게 다가온다. 눈은 감았지만 정신은 흩어질 생각조차 없이 또렷하다. 어떤 기운이 누워있는 나의 가슴을 지그시 누르는지 답답하고 먹먹한 느낌이 든다. 유달리 크게 느껴지는 심장의 박동을 잊고자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는다. 나를 억누르는 어떤 기운까지 쫓아내 보고자 하는 간절함을 내뱉는 숨에 담는다. 그렇게 여러 번 심호흡을 하다 보면 심장 박동의 느낌은 잦아들지만 동시에 콧구멍을 통해 공기가 빠르게 드나들며 나는 숨 쉬는 소리에 정신이 집중된다. 잠들지 못한 채 바른 자세로 너무 오래 누워 있었는지 몸이 뻐근하다. 살며시 몸을 돌려 옆으로 눕는다. 관자놀이가 베개에 닿은 자세로 누워 오지 않은 잠을 애틋하게 청해 보지만 이번에는 관자놀이의 혈관에서 박동이 느껴진다.


근심과 걱정, 고민, 불안이 머릿속에 가득하면 우울하고 슬픔을 느낀다. 여러 가지 망상을 하게 되고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과 일어나지 않을 미래에 대해서까지 근심과 불안이 퍼진다. 현재 자신의 상황이 무척 괴롭고 힘들기 때문에 불안한 마음이며 앞으로 펼쳐칠 미래에 대한 확신조차 없다면 불안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작은 희망이라도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자신을 위한 격려와 위로의 여유가 생긴다. 한숨 푹 잔 이후에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아침을 맞이할 수 있다. 희망이 우리의 근심과 걱정을 덜어주고 괴로움은 무뎌지며 잊힌다. 마음을 할퀴었던 뾰족하고 모난 고통이 시간이라는 파도에 휩쓸려 부딪히고 깨지면서 다듬어진다. 시간의 파도를 일으키는 것은 마음 회복을 위한 내면의 힘이다. 그런 내면의 힘이 긍정의 낙관주의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세상은 희망으로만 가득하다고 얘기하긴 어렵다. 절망적인 상황도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잠 못 드는 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시간, 미친 사람처럼 휴대전화기의 메시지만 반복적으로 살피는 마음, 기다림과 근심의 망상, 어떤 일을 해도 나아질 것 같지 않다는 절망 속에 쉽게 빠진다. 마음이 불편하고 불행하다고 느끼는 여러 가지 일들이 우리 주변에 많다. 전쟁이나 종교와 같은 사회적인 절망의 상황이 있고 죽음이나 이별과 같은 개인적인 절망의 상황이 있다. 특히 개인적인 절망의 상황에 대해 우리는 취약할 수밖에 없는데,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피부에 와닿는 고통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사랑 속에서도 고통은 존재한다. 여러 가지 다양한 상황이 있겠지만 사랑의 온도차가 존재하는 관계에서 아직 사랑이 남아 있는 사람과 사랑이 남지 않은 마음으로 아직 사랑이 남아 있는 상대를 바라보는 사람, 둘 모두 고통스럽다. 고통스러운 사랑은 결국 이별을 맞이하게 된다. 이별은 지금까지 생긴 상처 위에 더 큰 상처를 남기는 일이 되겠지만 고통을 매듭짓는 가장 손쉬운 일이기도 하다.


사랑의 마음이 남아 있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로 고통받는다. 사랑의 마음이 남아 있지 않은 사람은 상대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고통받는다. 어떤 사람의 고통이 더욱 괴로운지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남아 있는 사랑의 온도가 뜨거울수록 고통의 크기도 비례한다. 원치 않는 이별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은 얼마나 많은 눈물을 쏟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될까?


사랑의 기억은 달콤한 향기가 난다. 비록 사랑하는 과정에서 오해와 다툼이 있었겠지만 그조차 사랑의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는다. 그러나 이별의 기억은 가슴이 미어지는듯한 고통으로 남는다. 오랜 시간 후 회상하는 이별의 기억은 닳고 무뎌져 고통마저 희미해진다. 한순간 이별의 고통보다 축적된 사랑의 기억이 애틋하고 아련한 향기를 풍긴다. 희한한 일이다. 그렇게 괴롭고 고통스러운 이별이었는데 말이다. 결국 고통의 끝은 이별일까? 하지만 고통을 감수하겠다는 의지로 상황을 바꿔볼 수 있는 용기를 내어 본 이후에 이별을 고민해 봐도 좋지 않을까? 소중하게 가꿔온 사랑을 너무 쉽게 잃을 순 없으니 말이다. 결국 자신의 선택에 따른 문제이다.


절규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에드바르트 뭉크라는 노르웨이 화가도 사랑으로 고통받았다. 뭉크는 해군 장교의 아내인 밀리 헤이베르그를 사랑했다. 자유연애주의, 팜므파탈의 기질이 다분했던 매력적인 유부녀인 밀리에 푹 빠진 뭉크는 그녀와 6년간 밀회를 한다. 하지만 밀리에게, 뭉크는 그저 놀이대상 이상 이하도 아니었으며, 결국 남편과 이혼 후 바로 다른 남자와 재혼해 뭉크에게 상처를 남겼다. 첫사랑에게 배신이라는 큰 상처를 받은 뭉크는 이후 여성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을 작품에 담아냈다.


그는 베를린에 정착하여 '검은 돼지'라고 불렸던 작은 술집에서 많은 화가, 문인, 철학자들과 교류하며 지냈다. 그러던 중 자신의 소꿉친구이자 먼 친척인 다그니 유을을 만나 교제한다. 그러나 다그니는 뭉크를 포함한 여러 예술가들의 뮤즈였고 하필이면 뭉크의 친구인 스타니스와프 프시비셰프스키, 요한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와 교제하여 사각관계가 형성된다. 다그니 유을도 보헤미안 기질이 농후한 여인으로 이들과 데이트를 즐기며 느긋하게 경쟁을 즐겼다. 결국 다그니는 1893년 프시비셰프스키와 결혼식을 올리게 되고 뭉크는 배신감과 분노에 사로잡혀 '이별', '질투'를 그리고 자신을 떠나간 다그니를 모델로 한 '마돈나'를 그리게 된다.


그 후 한동안 좌절에 빠졌던 뭉크는 툴라 라르센이란 여자와 교제하게 된다. 그동안 뭉크를 떠나 상처를 주었던 여자들과 달리 뭉크와 깊은 관계를 가졌지만 그 사랑이 너무 지나쳤다. 그녀는 뭉크에게 집착하기 시작했고 결혼을 요구했다. 점점 툴라를 멀리하는 뭉크에게 툴라는 자살하겠다고 협박한다. 뭉크는 결국 툴라에게로 돌아와 툴라를 말렸는데, 하필이면 이때 총이 발사되면서 뭉크의 왼쪽 3번째 손가락이 관통당하는 사태가 생기고, 뭉크는 결국 영영 왼손의 중지를 잃고 만다. 그래놓고 라르센은 3주 뒤 다른 화가와 결혼했고 이후 뭉크는 아물지 않은 사랑의 상처를 가슴에 새긴 채 독신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뭉크는 사랑으로 큰 고통을 겪게 되었고 이별도 그의 고통을 덜어주지는 못한 듯하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이별을 막을 방법은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쌓여 결국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무서운 이야기가 뭉크의 삶에서 드러난다.


나 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진달래꽃, 김소월>


김소월의 시에서는 이별조차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름답게 맞이한다. 어떻게 자신을 떠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저런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을까? 우리의 삶에는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며 사랑도, 이별도 우리의 선택이다. 다만 고통에서 자신만 해방되기 위한 이별은 선택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림 에드바르트 뭉크, ‘이별’, Oil on canvas, 1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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