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내 사랑
푸르던 하늘 곳곳이 타들어가기 시작한다. 평온하던 나의 마음도 기울어가는 태양을 따라 조금씩 붉게 타들어간다. 태양이 언제나 같은 자리를 지키리라는 나의 믿음은 기울어가는 태양을 잡지 못한다. 내 믿음이 설령 잘못된 것이었음을 애써 외면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나는 기울어가는 태양을 보며 어둠이 곧 들이닥칠 것을 짐작했으면서도 나의 믿음 하나에 기대어 태양이 다시 솟구쳐 오르기를 희망했는지도 모른다.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 불가능한 희망을 꿈꾸었던가? 어떤 구원의 불빛이 나를 향해 손을 뻗어줄 것이라 철석같이 믿었던 것 같다. 그렇기에 어둠의 시작을 알리는 석양을 넋 놓고 그저 바라만 보았다. 찬란하던 석양빛에 매료되어 깊은 감상에 젖은 채 말이다. 그런데 기어코 태양이 지고야 말았다.
산등성이로 넘어간 태양은 하늘에 여분의 빛을 남겨두었고 땅은 당연하듯 고요하게 어둠을 맞이했다. 온몸을 순환하는 피의 따뜻한 온기와 심장의 박동은 태양이 없는 세상에서도 내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곧 심장이 뛰는 것이오, 혈관을 통해 온몸으로 영양분과 혈액의 온기를 전달하는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나는 제자리에 서서 점점 어둠에 물들어가는 하늘과 땅을 하염없이 바라만 보았다. 황혼의 순간에 나는 혼자였다. 땅거미가 짙어져 이젠 발 디딜 가까운 곳만 식별이 가능하다. 달빛이나마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가녀린 희망의 끈을 잡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빛이라도 있다면 위안이 될 것 같았기에.
방금 전까지 멋진 석양빛을 품어 아름답게 물들었던 구름이 어느새 하늘을 가득 채웠다. 희망의 달빛마저도 내게서 앗아갈 요량이던가? 나의 시선은 초점조차 맞추지 못한 채 허공을 이리저리 훑으며 구름 사이로 빛을 내어줄 달을 좇는다. 달빛이라도 있으면 구름의 명암을 관찰할 수 있겠지만 이조차도 어렵다. 달이 구름에 가려진 것이 아니라 뜨지 않았다. 지금 나는 당혹스러운 어둠을 맞이했고 길을 잃었다. 분명 밝은 태양을 좇아 희망을 품었지만 그 태양이 모습을 감추리라고는 감히 생각지도 못했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말한다. 내일이 오면 다시 태양이 뜬다고. 내일은 다시 태양이 떠오르는가? 그들에게는 오늘의 찬란했던 태양과 아름다운 풍광이 그저 일상의 반복일 뿐인가? 사람들이 말하는 내일은 내게 다시없을지도 모른다. 이미 해넘이로 사라져 과거가 되어버린 그 풍경이 가져다준 황홀경은 내가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것이었다. 하늘은 또 어떠한가! 따뜻하고 포근하게 내려앉는 햇살과 청명한 하늘, 기분 좋게 두 뺨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 모든 것이 완벽했다. 넋을 잃고 바라본 태양과 온기가 가득한 들판이 나를 맞이했다. 나의 삶이 이대로 충분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어떤 시련도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던 것 같다. 그래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길을 걸었던 것뿐이다.
누구나 그렇듯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을 마주했을 때의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더욱이 나의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 앞에서 허탈할 뿐이다. 오열하며 분기탱천하거나 무기력하게 침잠하거나 이를 악물고 와신상담하거나 번뇌의 얽매임에서 해탈하거나. 어쩌면 오열하다 무기력함을 느끼고 와신상담하다가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순서대로 겪지 않을까 싶다. 나의 당혹감도 이와 다르지 않으니 이제는 내일이라는 것이 당도하여 태양이 다시 떠오른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방금 저물어버린 태양과 같다고 여길지 미지수다. 복잡한 심경으로 밤을 맞이한다. 밤이 깊어지고 마음도 덩달아 깊은 공허에 둘러싸인다. 부여잡을 것 하나 없이 칠흑 같은 공허 속을 헤맨다.
이제 무엇이든 결정을 내려야 할 시점이다. 저물어버린 태양에게 작별을 고하거나 다시 떠오를 태양을 반갑게 맞이해야 한다. 두 개의 태양이 같은 것이라면 내일 솟아오르는 태양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내 마음은 그 둘을 과연 같은 존재로서 느낄 수 있을는지 알 수가 없다. 다시 솟은 태양이 단지 밝게 빛나고 있다는 것 외에도 기분 좋은 바람과 향기, 포근한 온기, 청명한 하늘까지 모든 것이 그대로일 수 있을까? 내일에 태양이라는 것이 떠오르기는 한단 말인가?
무엇이 되던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다. 내가 그렇게 갈망하던 태양에게 인사하는 일.
안녕, 나의 태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