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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마른 땅을 적시는 단비

마음을 가득 채우는 사랑

by 타조

매슬로우의 욕구단계이론, 인간의 정신을 분석한 다양한 연구가 흥미롭다. 나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고 대인관계를 넘어 사회 현상까지도 원인을 나름대로 짚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침 댓바람부터 눈을 뜨자마자 매슬로우의 욕구단계이론이 떠오를 줄이야. 아침에 잠에서 깨어 눈을 뜨고 공복의 허기를 느낀다. 그러나 허기보다 더 급한 욕구가 있으니, 그것은 배설의 욕구다. 먹는 것보다 더 급한 욕구를 느끼다니 신기하다. 화장실로 들어가며 떠오른 게 매슬로우의 욕구단계이론이라니.


시급한 생리적 욕구를 해소하고 다음 욕구인 허기를 달래기 위해 아침을 먹는다. 배고픔은 사라지며 안정감을 느끼지만 혼자 아침을 먹으면 사람이 그립다. 매슬로우의 욕구단계에서는 하위의 욕구가 해소되면 상위의 욕구를 추구한다고 밝힌다. 건강이나 안전의 욕구, 사랑과 사회적 욕구, 존중의 욕구, 자아실현 등이 단계별 욕구로 제시된다. 하지만 매슬로우의 욕구단계를 무시하는 상황이 발생하니 꼭 그의 이론이 정답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실제로 같은 비판도 존재한다. 큰 뜻을 위해 생명의 위협도 불사하는 일, 식음을 전폐하고 사랑을 갈구하는 일, 명예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 등 다소 극단적이긴 하나 실제로 일어난다.


커피를 한 잔 진하게 내리면 향긋하면서도 약간 시큼한 커피의 향이 집 안에 따뜻하게 퍼진다. 커피잔을 식탁에 놓고 의자에 앉아 공간에 맴도는 커피의 향기를 크게 들이켜 맡는다. 커피잔을 입에 가져가 한 모금 들이켠다. 외로이 앉아 커피 한 모금을 더 들이켜고는 사랑과 사회적 욕구를 떠올린다. 사랑이 삶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과연 사랑이란 무엇일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사랑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는 듯하다. 어쩌면 숱한 고민들 속에서 사랑을 주제로 떠올렸던 적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는 편이 옳은 것 같기도 하다. 짐짓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 나 혼자 어설픈 정의만 내렸던 적이 있었던 것도 같다. 하지만 그런 정의가 스스로의 사유로 인해 내려진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의 경험과 나의 경험을 적절하게 뒤섞어 내려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게다가 타인을 통한 사랑의 간접 경험은 몸과 마음으로 체득한 경험과 다르게 그저 짐작할 따름이다. 그렇다고 나 스스로 관조하고 사유하여 사랑이 무엇인지 단언할 수 있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세상 모든 게 재밌던 시절에는 하고 싶은 일이 어찌나 많았던지 마음 맞는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취미생활에 심취하여 사랑의 경험은 뒷전이었다. 사랑이 인생을 밝혀줄 만큼 아름답고 행복하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은 깨달았을 뿐이다. 이런 깨달음을 일찍 얻었다면 나의 인생을 사랑으로 가득 채웠을 것이다. 타인의 경험담과 나의 부족한 연애 경험으로는 감히 사랑이 무엇인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려본다.


"나는 나이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吾十有五而志于學), 서른에 뜻이 확고하게 섰으며(三十而立), 마흔에는 미혹되지 않았고(四十而不惑), 쉰에는 하늘의 명을 깨달아 알게 되었으며(五十而知天命), 예순에는 남의 말을 듣기만 하면 곧 그 이치를 깨달아 이해하게 되었고(六十而耳順), 일흔이 되어서는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논어의 위정편에는 위와 같은 문장이 등장한다. 공자와 같은 위대한 학자의 지식을 잠시 차용하자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지식과 경험이 쌓이고 스스로의 노력이 더해져 마흔에 어떤 유혹도 뿌리칠 수 있는 불혹, 쉰에 하늘의 뜻도 깨닫는 지천명 수준에 이를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스스로 나의 지식과 경험,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쌓은 사유의 결과물을 바탕으로 불혹이나 지천명의 수준에 가까워지고 있느냐를 누군가에게 묻는다면 당연히 한참 못 미친다는 증명서를 출력해 줄 것이다. 증명서 공란에 '불합격'이나 '노력이 필요함'의 글자로 아로새겨서 논어의 기준으로 나이에 걸맞지 않은 나의 수준을 나타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의 수준이 논어에서 언급한 수준에 못 미친다고 해도 공자가 인정할만한 자명한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나이가 들면서 생각이 깊어진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누구나 각자의 삶을 관통해 오는 동안 수많은 지식과 경험이 쌓이고 그것들이 자신만의 빅데이터가 되어 여러 현상과 관념에 대해 오랜 시간 사유하고 나름의 정의를 내린다. 나도 사랑이라는 영역에서 지금껏 쌓은 경험을 토대로 지나온 세월을 되새김질했다. 여전히 부족한 경험과 개성 넘치는 한 인간으로서 결코 표준화될 수 없는 결론이겠지만 말이다. 사랑은 상대성을 지니고 있어 나만의 사랑에 대해서 누구의 판단도 필요 없다고 다독여 본다.


하지만 제각각 상대적인 사랑일지라도 사랑에 대해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도 존재한다. 사랑은 우리가 가져다 붙일 수 있는 모든 찬사를 다해도 설명하기 어렵다. 색색의 아름다운 꽃이 만개한 드넓은 꽃밭에 햇살이 아늑하게 사뿐히 내려앉으며 기분 좋은 향기를 가득 머금은 따뜻한 바람이 온몸을 포근하게 휘감는 느낌이라는 극찬도 부족하다. 신비한 어떤 기운이 갑작스럽게 몸속으로 들어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 좋은 상쾌함을 퍼트리는 것 같기도 하다. 사랑의 대상이나 상황이 다를 수 있지만 사랑이 황홀경을 불러일으킬 때 세상이 멈춘 것 같고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 속에 빠진다.


우리는 발 디딜 곳 없는 곳에서 살아갈 수 없고 먹을 것 없이 생명을 부지할 수 없다. 생명의 유지를 위하여 우리의 육체는 필요로 하는 것이 많다. 그러나 육체의 만족을 위해서만 힘쓰며 살 수는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육체와 정신의 결합체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정신의 건강도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정신의 건강을 위해 사랑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사랑이야말로 정신의 생존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존재다.


기억을 떠올리면 나는 누군가의 마음에 충분한 사랑을 전해주지 못한 경험이 있다. 사랑에 서툴기도 했지만 사랑의 가치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사랑의 아름다움에 심취하여 서로의 빈자리에 갈증을 느끼고 마음을 나누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호감에서 시작한 사랑의 마음이 돌봄을 받지 못하여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서서히 공중분해되었다. 서로의 따뜻한 마음이 조금씩 식고 가난해져서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필연적으로 맞이했다. 그때의 경험을 떠올리면 나는 한없이 죄스럽고 서글프다. 사랑에 대해서 제대로 고민할 생각도 없이 그저 흐르는 시간에 따라 자연스럽게 맺고 끊어진다고 믿었다. 흘러가는 강물에 띄운 종이배처럼 스스로의 의지 없이 그저 물결에 출렁이며 휩쓸려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원 없이 마음을 나누고 온기가 넘치도록 사랑할 것임을 다짐한다. 하지만 하나의 문단은 이미 끝났고 수많은 페이지가 넘겨졌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이후에도 여러 번의 사랑이 내 인생에 찾아왔다. 여전히 사랑에 서툴고 사랑의 축복을 어떻게 누려야 온전하게 행복해질 수 있는지 몰랐다. 아이러니하게 지금까지도 나는 사랑에 서툴고 사랑의 불꽃을 활활 타오르게 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래도 곱씹어본 나의 경험을 통해 또, 세상 많은 사람들의 사랑에 대한 간접 경험을 참고 삼아 사랑의 축복을 제 발로 차버리는 멍청한 짓은 더 이상 하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사랑의 축복이 내 인생에 내린다면 말이다.


나의 정신은 메마르고 있었다. 가뭄에 강하다는 식물도 물기 없이 메마르고 갈라진 척박한 곳에서 맥을 못 추었다. 가뭄에는 어쩜 이리도 햇살까지 필요 이상으로 강하게 내리쬐는지... 어떤 씨앗도 척박한 이곳에서 싹을 틔울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기존의 식물은 뿌리를 드러낸 채 제 몸이 바싹 말라비틀어져 생을 마감했다. 내게는 사랑의 단비가 간절하다. 나의 메마른 마음을 사랑의 단비가 촉촉하게 적셔주길. 사랑의 축복이 마음을 가득 채우면 나의 행복과 기쁨을 모아 노래하며 사랑을 찬양하리. 그리고 결심한다. 나의 사랑을 다시는 헛되이 흘려보내지 않겠다고.


사진: UnsplashPete Nowic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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