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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바다에 다시 빛이 들고

사랑의 빛은 어둠을 뚫고

by 타조

전쟁이라도 일어난 것일까? 사방이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해가지면 달이라도 뜨련만 고개를 들어 올려 바라본 하늘에는 달조차 떠있지 않다. 하물며 그 흔한 가로등이라도 찾아보려 두리번거리지만 아무래도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 빛을 찾는 일은 어지간해선 힘들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눈을 떠보니 이지경인지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어 답답하다. 손에 닿는 것이라도 있을까 하는 생각에 왼팔 오른팔을 조심스럽게 번갈아 휘저어보지만 손끝에 닿는 것이라곤 팔을 휘저을 때마다 밀려 갈라지는 공기의 느낌뿐이다. 앞을 휘젓다가 옆으로, 위로, 몸을 돌려 뒤를 휘저어도 마찬가지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팔을 조심스럽게 휘젓는 것 이상으로 어려운 것은 발걸음을 옮기는 일이다. 비록 뒤를 살피기 위해 제자리에서 발을 돌려 뒤를 바라보았지만, 앞이나 옆으로 발걸음을 옮긴다고 생각하니 두려움이 밀려온다. 어떤 갈라진 틈에 빠지지는 않을까, 아니, 갈라진 틈이라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될 정도의 깊은 협곡이나 낭떠러지에 발걸음을 내딛지는 않을까 무섭다. 심지어 어떤 미지의 존재와 마주하게 되어 해코지를 당하게 될까 걱정도 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해 눈알을 복잡하게 굴리며 시선이 머물 수 있는 곳을 간절히 찾아보지만 답이 없다.


가만... 그러고 보니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현상에 과하게 몰입한 나머지 소리를 내어보겠다는 생각을 하지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크흠 목을 가다듬는다. 목에 힘을 주어 낸 크흠이라는 소리를 나는 느낀다. 그러나 그 소리가 내 몸 밖으로 퍼져 나갔는지 알 수가 없다. 어딘가에 부딪혀 돌아오는 소리가 들린다면 내가 소리를 내었다는 것이 확실할 텐데, 심지어 바닥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소리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크흠이라고 목청 가다듬는 소리를 내었던가? 이번에는 연속으로 목청 가다듬는 소리를 두 번 내어본다. 크흠, 크흠! 그러고는 무슨 소리라도 좋으니 들려오기만을 바란다는 간절한 심정으로 온몸에 잔뜩 힘을 주고 모든 움직임을 멈춘다. 하나, 둘, 셋... 열. 십 초라는 긴 시간을 기다렸는데도 주변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온몸의 감각을 귀에 집중해 보았지만 그 노력은 무위로 돌아갔다. 아! 그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이라 눈을 감을 생각을 해보지 않았구나! 머물 곳 없는 시선이었지만 눈을 감고 한 번 더 청각에 모든 신경을 집중시켜 보자고 다짐한다. 눈을 뜨나 감으나 똑같이 어둡지만 눈을 감았다는 이유만으로 왠지 마음이 조금은 편해진다. 내가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바로 깨닫고는 다시 온몸의 감각을 귀에 집중한다. 어떤 소리라도 좋으니 귀에 닿기만 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전히 귀를 통해 고막을 울리는 어떠한 진동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한껏 긴장을 한 상태의 몸은 무릎과 허리가 약간 구부러진 낮은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 같다. 긴장한 상태로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고 있으니 근육이 경직되어 몸이 무겁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위험한 곳은 아닐 것이라 믿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어쩔 줄을 몰라 계속 긴장하다가는 두려움에 휩싸인 정신이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정신줄을 놓아버릴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나의 상황이 촌각을 다투는 위험은 아니라고 믿는 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어깨를 들어 올리며 숨을 깊숙이 몸 안으로 들이킨다. 어두운 공간에서 작은 빛이라도 찾기 위한 시각과 조그만 소리라도 듣기 위한 청각에 몰두했었다. 이번에는 숨을 들이켜면서 코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집중하게 된다. 내 주변의 공기가 코를 통해 들어온다. 차갑지고 뜨겁지도 않은 적당한 온도의 공기가 내 코를 통해 들어와 천천히 가슴을 부풀이며 폐로 이동한다. 어떤 냄새도 나지 않는다. 무향무취. 어떤 느낌이라도 감지하기 위하여 아주 천천히 숨을 들이켰지만 무의미한 일이 되어버렸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잠시 숨을 멈추었다가 이번에는 어깨와 가슴이 내려가며 거꾸로 폐에서 공기를 몸 밖으로 밀어낸다. 살짝 입을 벌려 코와 입으로 공기를 내뱉는다. 반복하여 실시한 심호흡이 긴장을 풀어준다. 구부정한 자세를 가다듬어 몸을 쪼그린다.


무릎과 허리를 굽혀 쪼그리고 앉는다. 그리고 팔을 내려 손으로 바닥을 짚어본다.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바닥이 짚이지 않는다. 갑자기 다시 몸이 긴장된다. 온몸이 조금씩 떨리는데 팔을 지나쳐 손으로 전달된 떨림은 더없이 심하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두 손을 서로 부여잡는다. 나는 여전히 바닥을 딛고 서있지 않던가? 분명 내 발옆이 낭떠러지이고, 그곳에서 겨우 몇 센티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 나는 운 좋게도 서있던 것이었구나. 적어도 내가 서있는 곳이 발 붙일 수 있는 곳임을 감사하며 다시 한번 심호흡한다. 천천히 손을 바닥으로 향하고 좌우로 움직여보지만 여전히 손끝에는 갈라지는 공기의 흐름뿐이다. 그리고 팔의 위치를 옮겨 옆, 뒤 모두 더듬는다. 손에 닿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온몸에 소름이 좌악 돋는다. 얼굴은 고정한 채 시선 둘 곳 없는 두 눈이 사방을 휘젓는다. 쪼그려 앉은 자세에서 삐끗하여 발을 헛디딜까 봐 다리에 힘을 준다. 설마... 파르르 떨리는 손을 조심스럽게 무릎 위에 얹고 숨을 두 번 고른다. 아주 천천히 손을 무릎에서 정강이로 더듬어 내린다. 아주 느린 속도로 천천히 내린다. 정강이뼈가 단단하게 느껴진다. 이어 발목에 닿고 발등을 지나 바깥 발날을 향할 때! 손을 멈췄다. 숨도 쉬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눈을 매우 크고 동그랗게 떴고 입술을 앙다물었다.


아주 천천히, 매우 느리게 발날을 지나친 손이 발 밑에서조차 허공을 훑자 갑작스럽게 입이 벌어지고 공기를 몸 밖으로 밀어냈다. 입이 잘못된 것인지 소리가 잘못된 것인지 부정확하여 뭉개지는 헉 소리가 났다. 커다랗던 눈은 더욱 커졌고 심장은 가슴을 뚫고 튀어나올 것처럼 세차게 뛰었으며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별안간 강력한 중력을 느끼며 몸이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정신을 잃었다.


어렴풋하게 정신이 돌아왔을 때, 주변은 고요했고 나는 어딘가에 누워있었다. 중력을 향해 추락하던 내가 어딘가 부딪히고 구른 후 바른 자세로 누워있게 된 것 같았다. 몸 이곳저곳이 찢겨 피가 나고 뼈라도 부러지지 않았는지 걱정이 되고 무서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몸의 감각을 집중하여 혹시라도 피를 흘리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쓰리고 아픈 부분은 없는지 느껴보려 애썼다. 몸에서는 어떤 고통의 흔적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눈을 떠서 확인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눈을 감은 상태로 눈알을 조금씩 움직여 보았다. 그러다가 불현듯 느꼈다, 덮인 눈꺼풀을 통과하는 빛을. 캄캄한 어둠 속에서 간절히 찾던 빛이 드디어 눈앞에 옅게 드리우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안도감이 밀려왔다. 눈꺼풀에 힘을 주며 천천히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아침 햇살이 투명한 창을 통과해 무겁고 어두웠던 공간을 포근하고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다. 낮게 떠오른 태양이 쏟아내는 햇살은 아직 눈이 부시지는 않았다. 창을 통과한 햇살의 조각이 벽에 맺혔다. 어딘가 익숙한 공간, 나의 방이었다. 방금 전까지 사방으로 어둠에 둘러싸여 공포에 질렸던 나의 심장은 평온하게 뛰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조차 흐르지 않았으며 피부는 소름 돋은 곳 하나 없었다. 자칫 블랙홀처럼 끝없이 빨려 들어가는 공간으로 영원히 추락하고 있다는 당혹감에 정신을 잃고야 말았는데 무척 당황스럽고 두려웠다는 느낌만은 생생하게 떠올랐다.


우리는 여러 상황에서 걱정과 공포, 두려움의 고통을 느낀다. 전쟁이나 자연재해, 재앙과 같은 끔찍한 현실을 마주한 사람들은 하룻밤의 꿈으로 견줄 수조차 없는 공포와 고통의 트라우마에 시달릴 것이다. 어쩌면 삶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이어지는 상상을 초월한 긴 고통의 터널을 지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 터널은 맞은편 출구에 스며드는 빛의 흔적조차도 찾아볼 수 없는, 아니 출구조차 없는 꽉 막힌 미로의 끝이다.


사랑에서도 우리는 절망의 순간과 맞닥뜨린다. 한순간 사방이 보이지 않는 어둠으로 둘러싸이고 어떤 빛도 음성도 우리를 외면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사랑에서 절망을 느끼는 순간은 철저하게 외롭다. 손을 내밀어도 잡을 곳 하나 없고, 나를 구원해 줄 도움의 손길도 없다. 별자리 하나에 의지한 채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돛단배가 칠흑 같은 어둠에 별빛을 잃고 헤매는 꼴이다. 한줄기의 별빛에 영혼을 기대어 왔던 사랑의 항로에 깔린 짙은 어둠이 우리를 절망케 한다. 사랑으로 고통받은 자신을 위해 잠시 주저앉아 절망의 눈물을 흘려야 한다. 그리고 순수한 사랑의 눈물을 고통의 바다에 흐르도록 하자.


충분히 울었다면 이제 일어나 눈을 떠야 한다.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힘겹게 바닥을 짚어 몸을 일으킨 후 용기를 내어 다시 한번 촉촉한 눈망울로 주변을 살펴보자. 절망의 눈물을 방울방울 맺혀 떨어뜨린 사람들을 생각하자. 우리가 건너는 이 절망의 바다는 한 사람만의 고통으로 만들어진 바다가 아님을 알고, 그 바다 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린 후에 다시 빛을 찾아 노를 저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한때 자신이 믿고 바라보던 그 별빛이 다시 눈동자에 들어올 것이다. 혹은 예전의 별빛을 더 이상 따르지 않기로 결심할 수도 있다. 사실 새까맣던 하늘에서 사라진 것은 내가 그토록 진실이라고 여기던 별빛 하나뿐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직 하늘에는 수많은 별이 빛을 내고 있고, 사랑의 항해는 그 어떤 별빛을 따라도 분명 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에.


하나의 빛을 잃었다고 우리의 삶이 무너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하나가 자신에게 너무나 큰 의미와 가치가 있는 빛이기에 우리는 괴롭다. 그래도 사랑의 빛은 어디서고 다시 빛나고 있다. 잔나비의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의 노랫말에는 뜨겁고 열정적이었던 사랑이 떠나 고통스럽고 허무하지만 그래도 다시 찾아오는 사랑을 위해 사랑의 빛을 다시금 밝혀보려는 마음이 드러난다.


반드시 어둠을 뚫고 다시 사랑의 빛을 내는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사진: UnsplashSkull K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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