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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낡은 서랍 속의 사랑

오래된 사랑의 기억

by 타조

정오 무렵의 햇살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채 한가득 쏟아진다. 푸른빛의 하늘엔 오직 태양만이 걸려있다. 낮 기온이 영하를 맴도는 추운 겨울날이지만 하늘만큼은 맑고 투명하다. 제법 먼 거리까지 또렷하게 볼 수 있는 시야가 형성되어 높은 건물을 통해 바라본 풍경은 가슴을 뻥 뚫어준다. 밝은 햇살이 비치는 곳과 그림자가 드리우는 곳 사이에 명암의 대비가 뚜렷하다. 높은 건물들이 사방을 가득 채웠지만 건물들 사이로 드문드문 산등성이를 볼 수 있다. 겨울이라 그런지 산등성이에서는 푸른 생명의 기운을 찾아볼 수조차 없이 짙은 고동색 일색이다. 그나마 봄이 되어야지만 그 좁은 건물 틈새에서 생명의 기운을 얼핏 느낄 뿐이다. 오히려 길가의 가로수에서 초록빛을 찾는 것이 더 쉬우리라.


한낮의 햇살이 큰 창문을 통해 거실로 한가득 쏟아져 들어온다. 거실 창가 쪽 바닥에 가득 내려앉은 햇살의 조각들은 손으로 집어 들어 올릴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단순한 착각일 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바닥에 맺힌 햇살을 향해 손을 뻗는다. 그럼 그렇지... 손을 오므리면 잡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손에는 어떠한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다. 당연한 결과를 예상하면서도 가끔 얼토당토않은 일들을 시도한다. 그런데 이런 허무할 것 같은 시도가 생각보다 신선하다. 그럼 그렇지라고 생각하며 피식 웃게 되는데 그 상황에서 가벼운 희열을 느낀다.


이렇게 햇살이 좋은 날에는 반가운 사람을 만나 즐거운 이야기로 마음을 가득 채워야 한다. 함께 보내는 시간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 아니한가. 그러나 평일 한낮은 모두가 직장에서 일하기 바쁜 때다. 한낮의 햇살에 자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축복받은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다. 물론 밤을 지새우며 일하는 사람들이나 생활고에 시달리는 이들에게는 한낮의 햇살이 여유로울리는 만무하겠지만 말이다. 어쩔 수 없이 따뜻한 이불속에서 마음의 울적함을 달랠 영화 한 편을 감상하면서 평소 누리지 못한 평일의 소소한 행복을 누린다. 그러다 문득 목마름을 채우러 나온 거실 바닥에서 햇살 조각을 발견하게 되었고 태양이 하늘 높이 떴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내 허기를 느낀다.


적당히 허기를 채우면 하오의 늘어지는 햇살 탓에 나른한 기운이 몸을 휘감는다. 이 좋은 날, 낮잠으로 소중한 시간을 채우지 않겠다는 강력한 집념이 나를 이끌어 몸을 일으켜 세운다. 선반에 놓인 커피 캡슐 보관 상자 앞으로 걸음을 옮긴다. 원래 다채로운 색상으로 여러 가지 맛의 커피 캡슐이 존재했던 상자는 언제부터인가 한 가지 색의 캡슐만 가득하다. 사람이 자신의 색채가 뚜렷해지고 자아를 찾아가는 시기를 사춘기라고 했던가? 요즘 여러 가지 방면에서 늦깎이 사춘기를 겪는 중인가 싶다. 이조차 나이 먹고 무슨 어설픈 생각인가 자문하며 피식 웃고는 커피머신에 한 가지 색뿐인 캡슐을 집어넣고 추출버튼을 누른다. 벌써 10년이 넘게 사용하고 있는-하얀 선으로 들소가 그려진-새카만 오페라 공연 기념 머그컵 안에 커피를 담는다. 김이 나는 머그컵을 식탁에 내려놓고 의자에 앉으며 창밖을 바라본다. 여전히 맑고 투명한 하늘과 선명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머그컵을 입 가까이 가져가면 따뜻한 기운이 입과 코 주위를 감싼다. 달콤 쌉싸름한 커피 향이 들숨을 타고 코를 향긋하게 어루만진다. 적당히 온기를 머금은 머그컵에 입을 가져다 대고 조심스럽게 커피를 한 모금 입으로 빨아들이면 커피 향이 입을 통해 코로 넘어가서 비강을 가득 채운다. 코로만 향을 들이켤 때보다 더 깊은 커피 향이 느껴진다. 따뜻한 액체의 목 넘김은 또 얼마나 기분이 좋은가! 모든 게 만족스러운 이른 하오의 시간을 한가로이 보내면서 잠시 옛 기억을 떠올린다.


탁자 앞에서의 평화로운 순간, 기억을 더듬어 마음이 평온하고 행복했던 장면을 떠올린다. 저장된 기억을 의식으로 퍼올리는 일이 쉬울 것이라 생각했지만 정작 기억을 떠올리려고 하니 잘 되지 않는다. 또한 얼핏 떠다니는 기억의 조각을 하나 발견해도 그것이 어떤 경험에 대한 조각인지 차근차근 되짚어 봐야 한다. 가끔은 기억의 조각으로 떠올린 경험이 내가 찾던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기억일 때도 있다. 기억을 되짚는 과정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가끔은 시간을 내어 떠올리려 할 때에는 떠오르지 않던 것들이 나중에 우연하게 떠오르기도 한다. 어린 시절, 시험, 대학, 친구, 가족, 직장 등의 주제를 정하고 떠올리는 편이 낫겠다. 이런저런 주제를 기웃거리다 사랑이라는 주제에 대해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한다.


초등학생 시절에 남몰래 좋아했던 여학생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다. 어떻게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해야 하는지 잘 모르던 시절이었다.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을 몰라 수업 시간에 힐끗 쳐다보기만 했다. 쉬는 시간에 여학생 주변을 얼쩡거렸고 우연히라도 눈이 맞으면 다른 곳을 쳐다보거나 다른 친구들의 대화로 시선을 회피했다. 그때는 그저 수줍음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러다 답답한 마음에 용기를 내어 친 짓궂은 장난은 호감을 불러일으키기는커녕 실망스러운 반응만 돌아왔다. 결국 아무런 일도 없이 허무하게 마음만 식어버렸다. 작은 일 하나에도 크게 기뻐하고 좌절하던 나의 여린 마음은 이때의 경험을 실패로 저장하게 되었으며 꽤 오랫동안 트라우마로 남게 되었다. 이후로 좋아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고 실패의 두려움에 떨며 뜨겁게 달군 마음을 허망하게 식혀버리는 일이 반복되었다. 중학생 시절, 고등학생 시절에는 여자를 만날 기회 자체가 많지도 않았지만 간혹 생기던 마음 설레는 상황도 혼자만의 설렘으로 끝내고 말았다.


그러나 눈폭풍이 몰아쳐 영원히 삭막할 것 같던 툰드라의 겨울에도 따뜻한 봄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나에게도 사랑의 봄을 맞이할 수 있는 시간이 천천히 찾아왔다. 마음을 표현에 어려움을 겪었던 과거를 딛고 효과적인 마음 표현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여러 경험을 쌓으면서 삶의 노하우를 깨닫는다. 사랑에서도 비슷한 과정을 통해 미숙함을 경험으로 채워나갈 수 있다. 연애의 경험이 쌓일수록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고 강한 유대감을 형성하는 자신만의 노하우가 생기기 마련이다. 단순히 자신의 경험뿐 아니라, 주변의 여러 사람을 통해 보고 들은 간접 경험도 노하우의 쏠쏠한 재료가 된다.


그리고 어떤 경험이던지 양과 질을 통해 깊이를 더할 수 있다. 양과 질이 모두 갖춰진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굳이 양과 질 중에 사랑의 깊이를 더하는 데 더욱 중요한 것은 질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내가 사랑의 경험에 대해서 양과 질을 모두 갖추었다고 보기는 힘들고, 나의 경험이 질적으로 얼마나 깊이를 갖추었는지도 알 길이 없기에 그저 나의 생각을 기술할 뿐이다.


오래된 나의 낡은 서랍 속에서 발견한 사랑은 단순히 과거의 사랑만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주었다. 그리고 사랑에는 이것이 정답이라고 자신 있게 외칠 수 있는 정답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그저 나만의 결론을 내려 볼뿐이다. 사랑이 무엇이고 어떻게 사랑을 해야 한다는 기대를 안고 이 글을 끝까지 읽었다면 조금은 실망스러울 테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과거의 사랑을 떠올려 자신의 사랑을 진지하게 반추하는 일은 꼭 해봄직하다. 행복했던 기억뿐 아니라 괴로웠던 기억에서도 우리의 삶을 이끌어줄 무언가는 존재한다.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은 괜한 표현이 아니다. 실패한 사랑에서도 분명 우리는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으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하나다.


아름답고 행복하게 사랑하자.


사진: UnsplashLiana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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