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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지향점

인류애를 향한 사랑

by 타조

자신의 불행을 기원하는 사람이 있을까? 인생은 절대로 우리의 삶을 떠밀지 않는다고 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에 공감한다. 숱한 역경 속에서 좌절한 적도 많지만 돌이켜보면 두껍게 내려앉은 짙은 안갯속을 헤맬 때조차도 나는 나의 삶을 사랑했다. 희망을 그리며 바로 곁에 다가와 앉은 불행에 눈길조차 주지 않으려 했다. 불행을 외면하려 했지만 그 불행은 나를 그의 한가운데 가져다 놓았고 나는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애써야 하는 고난의 여행자였다. 내딛는 발걸음마다 아프고 괴로워서 나를 놓아주지 않는 불행에 한탄과 욕설을 내뱉었다. 불행에 맞서 아픈 발걸음을 굳이 옮겨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 머릿속에 가득했고 불행에 온전히 휘감겨 그 자리에서 불행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라는 속삭임에 시달리기도 했다. 불행을 외면하려 했지만 한 걸음도 떼지 않고는 벗어날 길이 전무했기에 결국 나는 불행한 삶을 이어가고 싶지 않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건강한 의지의 다리를 움직여 한걸음 한걸음 내디뎠다. 화마가 집어삼킬듯한 뜨거운 고통으로 숨쉬기조차 어려웠으며 불행은 그런 고난의 여행자를 심술궂게 관찰했다. 하지만 결국 불행으로부터 벗어나서 되돌아보았을 땐 내 삶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불행에 잠식당하기를 완강히 거부했다고 느꼈다. 고통을 딛고 일어나 걸음을 옮긴 나의 의지와 내면 깊숙이 자리한 아름다운 삶에 대한 갈망, 그리고 사랑을 오래도록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삶의 경험이 쌓이면서 내 삶의 행복은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함께 살아가는 사회가 행복한 곳인지 여러 차례 되묻는 사건을 경험하고 목격했다. 되돌아보면 정확하지는 않지만 나조차도 미성숙한 상태로 여러 사람에게 폐를 끼친 일이 있었다. 여러 경험과 사유를 밑바탕으로 우리의 미성숙한 정신상태가 진정한 의미의 행복을 우리에게서 빼앗아가고 있다고 느꼈다. 가난과 질병, 기아 등 생존과 관련된 문제도 인간의 성숙한 태도에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러다가 먼저 태어나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역할이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미성숙한 존재가 성장하며 과거의 지식과 지혜를 습득하여 성숙해지는 것이니까.


나이가 어지간히 든 사람을 대접하여 이르는 말, 선생. 우리는 부모와 교사, 주변의 모든 사람을 통해 배움을 얻는다. 심지어 우리는 종종 나이가 어린 사람으로부터도 배움의 기회를 얻는다. 더불어 문화나 사회의 구조, 이론 등 거대한 시스템도 배움을 주는 선생님의 역할을 한다. 어리석게도 나의 결론은 이미 많은 학자들이 수세기 전부터 주장하던 내용이었고, 거인의 어깨에 오르는 일에 게을렀던 나태함을 반성하며 지금이나마 바람직한 말과 행동, 태도를 통해 성숙한 존재로 살아가려 애쓰는 중이다.


연륜으로 얻은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영감을 주고 인생의 안내자가 된다는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지식과 경험을 사유하고 관조하여 지혜로 숙성시킨 사람이 성숙한 어른이라는 생각은 아무리 생각해도 옳다. 우리는 그런 어른으로부터 세상의 규칙을 배우고 예의를 익히며 고매한 품성을 지닌 기품 있는 어른으로 거듭나야 한다. 하지만 세상을 둘러보면 다 자란 성인의 모습이지만 어른으로서의 품격을 지니지 못한 사람을 어렵지 않게 만난다. 또한 자본이나 권력, 개인주의와 같은 외부 요인들도 미성숙한 성인을 양산하는 데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 어른이 아닌 성인이 늘어날수록 더 팍팍하고 기계적인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아이들은 주변의 어른을 보며 성장하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미숙한 성인과의 경험이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매우 크다. 그렇기에 아이들의 문제가 단순히 성장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바람직한 경험의 부족과 줄어든 어른들의 관심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공동체 구성원으로부터의 가르침을 자주 받는다면 아이들의 정신이 더 일찍 성숙하고 건강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공동체 구성원은 몸만 자란 성인이 아닌 정신이 성숙한 어른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그런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다음 세대에 다시 건강한 인간의 품격을 전달하는 선순환, 단순히 지식 교육이 아니라 삶의 교육이 인생 전반에서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겠느냔 말이다.


친절하게 알려주었을 때 나를 바라보던 아이들의 눈빛은 자못 진지했다. 꾸지라고 나무라는 것도 가르침이지만 그것은 가장 손쉽게 선택하는 미숙한 방법일 뿐이다. 담배를 피우는 아이들, 길에 침을 계속 뱉는 아이들, 큰 소리로 공공장소에서 떠드는 아이들에게 바람직한 방법을 안내하려는 의지가 무두에게 있다는 사회적인 약속과 믿음, 단지 한 사람의 어른의 목소리가 아니라 모두가 같은 생각으로 너희를 지켜보고 있다는 바람직한 공동체성이 발휘된다면 누구나 어렵지 않게 아이들에게 진지한 안내자가 될 수 있다.


개성과 몰상식이 구분되지 않고 상존하는 시대에 어떤 구성원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게 좋을까 싶어 많은 시간을 고민하며 글감을 모아 글을 써보았다. 거대 집단의 소수에 대한 폭력이라는 이야기는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개성을 말살시키려는 상황에서 떠올릴법한 말이다. 나는 몰상식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를 강조할 뿐이다.


이 글은 우리의 삶과 궤를 같이 한다. 우리의 삶이 곧 아이들과 맞닿는 삶이므로. 그리고 세상에는 언제나 아이들이 존재할 것이므로. 그들과 같은 하늘을 공유하며 살아야 하므로. 그래서 우리는 인류애를 품은 어른이 되어야 한다. 어두운 밤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야 한다. 왜 우리가 다음 세대를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하냐고 묻지 마시라. 이미 우리도 이전 세대 어른들로부터 관심과 사랑을 받아왔고 그것은 당연히 어른으로 성장한 우리의 몫이라는 점을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까. 우리의 지향점은 인류애를 갖춘 어른이다. 우리의 마음에는 인류애를 갈망하는 사랑이 숨쉬고 있다.


사진: UnsplashMike Ral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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