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에 겐자부로
오에 겐자부로.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이자 살아있는 양심, 장애를 가진 아이를 키우는 한 아버지이기도 하다. 이번에 신곡을 읽으면서 그가 단테의 신곡을 몇 년간 꾸준히 읽고 기록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는 3년마다 읽고 싶은 책을 골라 그 작가의 모든 작품, 원작, 번역서, 연구 자료까지 전부 읽는 어마어마한 독서가이기도 하다.(읽는 인간/ 위즈덤하우스/ 2015.07.23) 내가 오에겐자부로를 처음 알게 된 건 고척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이 책 덕분이다.
그 당시 하루키 때문에 닥치는 대로 일본소설 쪽 코너에서만 서성 거렸는데 덕분에 하루키 소설 외에도 《창가의 토토》나 《영원의 아이》같은 다른 일본 소설을 발견했고 무라카미 하루키와 비슷한 무라카미 류 작가의 『코인 로커 베이비스』라는 어마어마한 소설까지 우연히 발견했을 때였다. 재밌는 책만 쏙쏙 잘 고르는 내 손에 스스로 감탄하며 뭘 골라야 할지 망설임 없이 표지만 보고도 착착 책을 뽑아 들었다. 우연에서 연결되는 운명의 힘을 믿으며 책을 골랐던 청소년기였다. 순박해 보이는 아이가 나무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앞에 노년의 신사를 쳐다보는 그림 한 컷만 보고 주저 없이 이 책을 골랐다. 맹해 보이면서도 촌스러운 이 아이를 지나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단 이유가 컸고
나는 그가 얼마나 유명한 작가인지도 모르고 일부러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을 스스로 발굴(?)했다는 엄청난 착각을 하며, 이미 들어본, 유명한 책 보다 늘 남이 안 읽을 것 같은 책을 '발견'하는 기쁨에 더 치중하곤 했다.
우연히 재밌는 소설을 연달아 발견해서 스스로 나의 안목에 엄청 감탄하던 때였기에;;; ㅋㅋㅋ 생각하니 어리석은 중생이요, 착각은 자유라더니, 교만이 하늘을 찔렀다.
뭐, 이 책도 읽자마자 내가 싫어하는 장르인 에세이인 것을 곧 알게 됐고 뭐여, 이거... 소설이 아니네 하고 며칠은 덮어놓다가 심심하던 찰나 다시 뒤적이기 시작한 시점부터 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산만하게 둥둥 떠있는 내 정서와 달리 차분하면서도 진솔한 문체에 빠져버린 탓이다. 진지하고 철학적이고 분명 어려운 책인데 다정다감한 말투 때문인지 쉽게 술술 읽혔다. 그의 대부분 책이 바로 이런 친근한 말투를(문체) 가지고 있는데 덕분에 다소 어려운 이야기라도 집중해서 듣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이 책은 유년시절부터 시작된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고 담담하게 그려낸 작가의 생각이 깊이 담겨있다. 아내인 오에 유카리가 그림을 그렸고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가만히 조금씩 생각하며 ‘나의 나무’와 유년을 떠올리며 읽기 좋은 책 같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 J.M. 바스콘셀로스의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란 책이었으니까. 그 제목에서 이끌리듯 이 책을 잡은 인연이 이렇게 나무로 연결되는구나도 싶었다.
나우앤톡 독서모임 두 번째에서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와 이 책을 함께 읽어봤다.
그 이야기들 중 하나는 골짜기 마을 사람한테는 저마다 '나의 나무'로 정한 나무가 숲의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혼은 그 '나의 나무'의 밑동 - 뿌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 에서 골짜기로 내려와서 인간의 몸속으로 들어가고, 죽을 때에는 몸이 없어질 뿐이고 혼은 자기 나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였습니다. … 〔중략〕
내가 '나의 나무'는 어디에 있느냐고 여쭤보았더니, 죽을 때'똑바로 혼의 눈을 뜨고 있으면 알게 되겠지!' 하는 할머니의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지금부터 서둘러 그걸 알아서 무얼 하려고? 정말로 머리 좋은 혼은 태어날 때 어떤 나무에서 왔는지 기억하고 있지만, 경솔하게 입 밖에 내지 않는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숲 속에 들어가 우연히 「나의 나무」 아래 서 있으면 나이를 먹은 자신을 만나는 수가 있지. 그럴 때, 특히 아이는 그 사람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니까, 「나의 나무」에는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편이 낫지.' 하는 것이 할머니의 교훈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나의 나무'를 기억할 만큼 머리가 좋은 혼이 아니어서 속이 상했습니다. 어느 때인가는 숲에 혼자 들어가서 근사하게 보이는 큰 나무 아래 서서 나이를 먹은 내가 찾아오지 않을까 하고 기다렸던 적도 있었습니다. 운 좋게도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나는 질문을 하고 싶었습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표준어로 물어볼 준비도 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p24~25)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사투리가 아닌 표준어로 또박또박 물어볼 준비를 하는 오에 겐자부로의 유년 시절을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 한쪽이 스르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이 먹은 나에게 고심 끝에 고민하고 생각한 첫 질문이 '어떻게 살아왔습니까?'라니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이 들었다.
얼마 전 재밌게 본 'My name is 가브리엘'이란 프로그램에서도 염혜란 배우님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 누군가 내 인생을 대신 산다고 했을 때 나는 어떻게 살고 있지? 내 모습은 어떤지 돌아볼 수 있었다고. 낯선 누군가 타인의 삶으로 삼 일간 살아가는 콘셉트가 단순히 흥미를 끌고 마냥 재밌지만은 않았던 것은 바로 이런 철학적인 질문과 무게 때문이지 않았을까. 알려진 배우나 가수, 코미디언이나 댄서로서가 아닌 타인이 살아오던 방식 그대로를 고수해서 그 루틴에 맞춰 살아야 한다는 건 '내 삶'이 아니기에 최선을 다하게 하는 책임감과 힘이 있었다. 홍진경님처럼 자신이 과거에 했던 모델일을 그대로 재연해서 떠올리고 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전혀 자신이 살았던 삶과 반대되거나 한 번도 상상조차 못 했던 삶을 살아야 했다. 다른 사람의 꿈이 담긴 삶이기에 이토록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서 조심스럽게 살고 최대한 배워가려는 모습들이 인상적이었다. 불편하고 어색한 순간이 올 때도 많았지만 불쑥불쑥 자신의 '진짜 모습'이 나와도 그 역시 숨길 수 없는 '나'라는 자아이기에 더 재밌게 본 기억이 난다.
마지막 회에서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딸을 지켜보는 엄마도,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 사위를 지켜보는 장인조차도 모두 최선을 다해 사랑하며 열심히 살고 있구나 그럼 나는, 내 삶은 어떤 모습인지 스스로 질문해 봤다.
나의 하루 루틴에 맞춰서 아이들을 돌보고 같이 놀아주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요리를 하는 나의 평범한 하루가 타인에겐 또 무엇을 발견하게 할까. 너무 쉽고, 어렵게 사는 인생이 포인트가 아닌 나는 나의 삶을 사랑하며 살고 있을까, '어떻게'살고 있을까,라는 데 의문이 맺혔다.
이 프로그램의 마지막 회가 끝나고 나서도 이 책을 뒤적였던 건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풍족하지도 않고 그는 없이 행복하지도 않은 소녀였던 - 전쟁과 전쟁 중에 누군들 예외가 있었을까요 - 내 아내는 자가 중독증에 걸려서 회복되기까지 오랫동안 병상에서 행복한 독서의 은혜를 누렸습니다. 그것도 어머니가 되풀이해서 읽어준 미야자와 겐지(宮澤賢治 : 1896-1933, 시인, 동화작가 - 역자 주)의 동화에 귀를 기울이면서 말이죠. 그리고 멋진 리듬과 이미지의 겐지의 문장 한 구절 한 구절을 차례대로 익혔고, 특히 그녀의 상상력은 그런 이미지들을 그림으로 나타나게 했습니다. 그래서 역시 반 세기가 더 지나서도 아이들에게 첼로 켜는 주정뱅이나 생쥐 엄마와 아들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반드시 소녀시절에 상상했던 광경을 떠올려 그것을 종이에 옮기고 색을 칠하는 것이 쉬운 가 봅니다. 그리고 나는 결코 즐거워하면서 편한 마음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소년시절에 종이에 옮겨 적어 익혔던 문장이나 시의 한 구절이 요즈음의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곤 합니다.
결국 나도 생각했던 것만큼 불행한 소년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p68~70)
그림을 그리는 아내의 유년 이야기도 살짝 들여다볼 수 있다. 내가 이 책을 고른 데는 바로 오에 유카리의 그림이 한몫을 했으니까.
미야자와 겐지는 나도 좋아하는 '은하 철도의 밤'을 쓴 작가이다. 유명한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도 바로 이 책에서 시작됐는데 얼마 전 혜진쌤한테 이 책을 빌려서 다시 읽으면서 마음이 아련해졌다. 책과 기록과 멀어지는 아이들, 우리 아이들 세대가 이런 유년의 여윤을 남기지 않는 것 같아 걱정되는 마음이 들기도, 쓸쓸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직 여러분이 태어나지 않았던 그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줄곧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들자고 말해왔던, 나와 비슷한 또래의 노인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본의 아이들 - 여러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 에게 자존심을 갖게 만들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서 말인가요? 역사 교과서에서, 중국을 위시한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우리나라가 침략했다고 하는 문장을 지우면서 말입니까! 나는 여러분들 대부분이 거꾸로 된 이야기가 아닐까 하고 느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거꾸로 된 이야기를 (자신들을 위해서)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화를 내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일본의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모든 역사 교과서에서, 일본인이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에 대해서 저질렀던 끔찍한 일들에 대한 기록이 지워져 버리고, 일본 아이들이 모두 그것에 대해서 알 수 없게 된다고 해도, 일본을 둘러싼 아시아 여러 나라의 아이들은 역사의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래에는 여러분이 그들과 서로 이야기하고 함께 일하고, 새 세상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중국인들이 '이제 일본에게 사죄를 요구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는 날이 오는 것입니다. 물론 일본정부가 드디어 공식문서로 사죄를 한 이후라고 한다면 기쁜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서 중국인들이, 특히 그 젊은이들이 이렇게 말하기 시작한다면, 미래에 그들과 여러분은 진실로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요? (p138~141)
와, 일본인 중에서도 역사에 대해 제대로 알고 사과하고 '진실'이야말로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이란 걸 말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그리고 그런 말을 하는 작가라니, (물론 이렇게 역사의식을 가진 일본인들이 많겠지만 나는 늘 '일본이 우리에게 사과하지 않은 분노와 서러움'이란 피해의식이 항상 마음 한편에 담겨있었다.) 과거 역사에 대해서도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물론 너희와 상관도 없었던 먼 과거의 이야기가 '미래'에 무엇을 당도하게 하는지 이런 설명을 그동안 누구에게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오늘은 '독도'의 날인데 독도와 다케시마라는 대립 분열만 봐도 역사는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도 어찌 떳떳한 역사만 있겠는가, 우리가 전쟁의 주체가 되어 식민지화한 일이 없다는 것이 나에게 '선한'이미지로만 다가왔을 뿐이지 베트남 전에 참여해서 저질렀던 한국군의 자행들 역시 우리나라 역사의 한 부분이 아닐까. 역사의 주체가 되어 제대로 바라보고 교육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길이야 말로 '진실된 좋은 관계'가 되는 유일한 열쇠가 아닐까.
아들의 역사교육 덕분에 오늘 '독도의 날'도 한 번 더 되새겨본다.
굳이 먼 미래의 나를 떠올리지 않아도 감사하게도 내 옆에서 나를 닮은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나를 바라보게 될 때가 많다.
엄마, 엄마는 무슨 색깔을 좋아해요?라는 단순한 질문을 했던 아이들이
엄마의 어렸을 때 꿈은 뭐였어요?
엄마는 누가 부러워요?
이런 질문을 할 때면
날마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
또 앞으로 어떤 대답으로 채워가며 살아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정직한 대답을 할 수 있도록 조금 부끄러워도 '나'자신의 삶 그대로를 보여줄 수 있는 '나의 나무'를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