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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터스 Dec 09. 2020

아티스트 데이트

1. 산책

        






    처음 하는 아티스트 데이트에 뭘 하면 좋을까.

 

    나는 기왕 시간 내서 하는 거, 평소 바쁘다거나 귀찮다는 핑계로 늘 미루어왔던 일들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전시회를 관람하거나 서울의 유명 관광지를 찾아 관광이라도 다녀올 계획이었지만, 때마침 코로나 감염세가 급작스럽게 증가하면서 내 원대한 계획은 그대로 구겨 쓰레기통에 넣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쓸모없게 되어버렸다. 어디 가서 무언가를 하기가 힘든 상황. 나는 뭘 하면서 좋을까 다시금 고민했고, 다행히 30년산 머리는 아직 쓸만한지 내게 괜찮은 아이디어를 던져주었다.

 

   산책을 가자.


    요즘에는 이래저래 바쁜 일이 많기도 했고, 코로나와 길었던 장마 덕분에 잘하지 못했지만, 나는 오래전부터 산책을 즐겼다. 편한 복장을 입고 좋아하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발길 닿는 대로 걸어 다니는 그 시간은 내게 무람없이 엉겨 붙는 상념들과 어쩔 길 없이 쌓이기만 하는 응어리진 감정들을 쓸어내는 데 안성맞춤인 방편이었다. 나는 산책을 하면서 곧잘 생각을 정리하거나 기분을 다스렸으며, 이따금 앞으로 해야 할 것에 대한 아이디어를 구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러면서 몇몇 글들의 소재와 참신한 문장을 얻기도 했고 말이다. 그러니 창조성을 기르기 위한 아티스트 데이트에 산책은 그야말로 안성맞춤인 행위리라. 비록 드문드문 빗방울을 떨어지는 날이라 산책하기에 썩 좋은 날은 아니었지만, 아직 무더운 9월,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 다니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생각하며 나는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섰다.




    거리는 잠깐 새에 또 변해 있었다. 투박한 간판이 인상 깊던 삼겹살집은 앙증맞은 마카롱을 파는 카페가 되어 있었고, 골목을 오갈 때마다 담배를 피우는 취객들로 앞이 뿌옇던 술집은 야반도주라도 떠난 듯 황량한 속내만 보이고 있었다. 길은 잠시만 눈을 다른 데에 두고 있으면 순식간에 화장을 고치듯 낯을 바꾼다. 그래서일까. 아무리 같은 길을 산책해도 쉬이 질리지 않는다. 나는 우산을 고쳐 잡고 그새 어떤 것들이 변했을까 상상하며 평소 잘 걷지 않 동네의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가림막 너머로 보이는 잔해들



    하지만 즐거이 발걸음을 옮기던 것도 잠시, 나는 이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거리가 언제 바뀌었는지도 모르게 바뀐다고 하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기껏해야 가게 몇 개가 사라지고 새로이 생겼으리라 생각했던 거리에는 불과 몇 달 전만 하더라도 멀쩡히 있던 동네가 깡그리 사라져 있었다. 유리 파편이 온 길에 가득했고, 구부러진 유모차, 프레임만 남은 책장 등 온갖 집기들이 볼품없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한때는 건물이었던 잔해들까지……. 마치 폭탄이 떨어진 듯한 풍경이었다. 재개발을 한다는 소문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순식간에 벌어지니, 그리고 실제로 두 눈으로 보니 충격이 장난 아니었다. 불과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사람이 살던 곳이었는데……. 나는 이루 감출 수 없는 허망한 마음을 안고 가림막 사이로, 현장과 맞닿은 경계를 걸어가며 바삐 오가는 포클레인과 잔해들을 바라보았다.



곳곳에 채 치우지 못한 생활들이 버려져 있다



    최근에는 잘 거닐지 않았지만, 내가 막 서울에 올라왔을 때 나는 이 동네를 참 많이도 걸어 다녔다. 처음 올라와 조금이라도 싸고 좋은 집을 구하려 주변 온 데를 누비던 때를 시작으로 심심해서, 괜찮은 가게가 있나 찾아보려고, 지름길을 만들려고, 바로 아래 있는 시장에 가려고, 심지어는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아무 연고도 없이 서울에 와 만날 사람은 없고 하고픈 말은 많았던 내가 쉬이 잠들지 못하는 기나긴 밤을 흘려보내려고 걸어 다닌 수많은 길 중에 이 길 역시 있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냈던 길인데……. 갑자기 이렇게 되니 나는 인사도 없이 사랑하는 이를 보낸 듯 마음이 휑했다.


    오래된 동네였다. 오래전부터 재개발 이야기가 나왔던 만큼 많은 건물이 여기저기 갈라져 낡아 있었고, 거리는 지저분했으며, 배려 없이 솟아난 오르막길은 오르다 보면 괜스레 짜증이 스미던 그런 동네였다. 아마 이 잔해 속에서 피어날 새 동네는 예전보다 훨씬 깔끔하고, 정돈되고, 안전하리라. 산책하기에도 더 좋을 테고 말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토록 서글픈 이유는 짧게나마 이 동네에 스몄던 추억들이 저 잔해 속에 함께 묻혀 사라지기 때문일 것이다. 마주하던 얼굴들과 오갔던 대화들, 그리고 어느 시절 이곳에 내가 있었다는 증거들이 사라지는 것 같아서, 그래서 이리도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이리라. 잊히는 것은, 사라지는 것은 언제나 슬프다. 괜히 가장 슬픈 병이 치매라고 하겠는가.   

   

    나는 찬찬히 동네를 거닐며 오래전, 아직 건물들이 있고 사람들이 지나던 동네의 풍경을 그 위로 겹쳐보았다.


    좁은 샛길로 소란스레 오가던 오토바이

    건물 계단에 오밀조밀하게 앉아 투덕거리던 초등학생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이의 손을 잡고 행복한 미소를 짓던 엄마

    허옇게 센 파마머리를 하고도 높은 오르막길에 거침없이 손수레를 밀던 할머니

    불콰한 얼굴로 구멍가게 앞에서 동네가 떠나가라 웃으시던 아저씨들

    나른한 한낮, 늘어난 나시를 입고 담배를 피우던 연기처럼 거무스름한 청년

    7시만 되면 긴 막대로 천막을 걷던, 끼익하는 그 소리가 내겐 저녁의 발걸음 같던 세탁소의 주인


   지금은 모두가 떠나간 이 동네에, 한때는 그런 풍경이 살고 있었다.




                                                                                                                                         Written by. 김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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