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꾸준히 무언가를 한다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다. 차라리 한 번 마음을 잡고 몰아치듯이 해치운다면 모를 까. 매일매일 일정한 속도와 양으로 반복적으로 한 일을 해낸다는 건 실로 엄청난 일이다. 생각보다 매일 한 문장씩 모으기도 어렵다. 설사 그것이 완성된 문장이 아닌 한두 문장, 단어 하나일지라도 결국 안 쓴다. 그래도 한 번 변명을 하자면, 글쓰기는 끓는점까지 가는 발화점이 조금 높다. 마치 그 과정이 불로 밥 짓기와 흡사하다. 옛날 옛적 정간에서는 밥을 지을 때를 생각해보자.
먼저 가마솥 뚜껑을 윤이 나게 닦고 문지르고, 땔감을 가져다 그 앞에 쭈그려 앉아 불을 지피면 중간에 긴 장대로 군불 속을 이리저리 헤집는다. 그렇게 숯과 장작을 한데 솎다 보면 어느새 다리에 쥐가 난다. 그제야 잠시 일어나 기지개를 켠 뒤에 이 동작을 몇 번을 반복한다. 본인은 대게 여기서부터 애꿎은 장대기를 집어던진다. 참으로 참을성이 떨어진다는 걸 인정하겠다. 하지만 본디 불씨란 것이 돌보기가 까다롭다. 일단 화기가 그 무쇠솥 밑바닥 전체에 퍼지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게다가 장작도 보관을 잘해야 한다. 비가 온 다음 날 물기를 머금은 나무는 불이 잘 붙지도 않는다. 이렇게 시작부터 폼이 많이 드니 초장부터 별 의욕이랄 게 안 생긴다. 그로부터 꽤 여러 날 동안, 도저히 때울 땔감도 없고 그렇다고 바로 나무를 베서 마련하자니 도끼를 들 힘도 없다. 몸이 흐물흐물 갈피를 못 잡는다. 그저 그때를 기다리는데, 혹자는 무슨 고도를 기다리며 실사 판이냐 당황하시겠지만, 그래도 별도리가 없다. 그래서 고도는 언제 오는 건지, 그래도 가끔은 내셔널지오그래픽 다큐팀이 숲 한가운데서 텐트를 치고 야영 첫날밤부터 보호종을 발견할 때가 있듯이, 저절로 단어와 단어가 그네들끼리 잘 솎아지고 볶아져 하나의 문장이 될 때가 있다. 그런데 이 우여곡절 끝에 초고를 완성한대도 바로 문제가 생긴다. 분명 느낌상으로는 결까지 끌고 간 것 같으나 순전한 착각일 뿐, 계속 기에 멈춰 서 있던 거다. 잘해야 승까지 간 이야기 앞에 우두커니 남겨져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아무래도 글 감옥이란 말이 이래서 생긴 말이지 싶다. 이 황홀하고 끔찍한 감옥의 수감자는 탈고로 형을 마칠 때까지도 이 찜찜함을 안고 간다. 혹은 마지막 맞춤 표를 찍고 나서도 쭉 이어진다. 대체 무슨 그놈의 오타는 매번 같은 곳에서 발생하고, 비문에 목에 막히는 연결되지 않는 문장들이 여기저기 떠돌아다닌다. 그런데 세상에 이런 일이! 이런 허탈함 속에서 매일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 그것도 별로 쓰기가 귀찮을 일상을 월, 일별로 날씨까지 알뜰살뜰히 적어낸 사람이 있다.
유만주.
그간 잊고 있었는데 우연히 그의 일기를 다시 생각해냈다. 계기는 바야흐로 몇 년 전 서울 역사박물관에서 <1784, 유만주의 한양>이란 특별전을 놓쳐 내내 아쉬워한 데서 시작한다. 그간 그 전시를 놓친 걸 찜찜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다시 볼 기회가 생겼다. 그간 사회적 거리두기가 지속되면서 서울 역사 박물관서 새 기획이 열렸다. 현재 진행 중인 전시와 지난 전시를 VR로 공개하는데, 그 기획 안에 이 전시가 껴 있었다. 마침 아티스트 데이트를 참여하는 하루 동안 창조적 영감을 불어넣어 줄 활동 한 가지를 했고, 아티스트 데이트의 주제를 방구석 박물관 구경으로 정했다.
실제 전시는 화면은 화질이 좋아서 확대하면 웬만한 글씨와 유물의 디테일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연신 갇힌 액정화면 안에서 유물과 표제와 설명 부분을 각각 확대해 봐야 하기 때문에 전시 전체가 분절된 느낌을 들게 만든다. 그래도 확대의 확대를 통해 설명 판 표제어 하나하나 실제 유물과 대조해 보면서 빠트리지 않고 살펴볼 수 있어 수업을 받듯이 내용을 정리해가며 볼 수 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전시는 국내 전시 화면이 아니라, 일본에서 열린 전시 실황을 찍은 것이었다. 모든 설명이 일어로 쓰여 있어 이 '일알못'이 전시된 유물의 자세한 내막을 알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문득 그간 딱 한 번 읽고 두 번 다시 펼쳐볼 생각을 못 했던 유만주 일기 선집이 생각났다. 그 자리에서 집 어딘가 묻혀 있던 책을 가져왔다.
일기를 쓰다 1 - 흠영 선집 / 유만주 지음, 김하라 편역, 돌베개 출판
일단 책의 두께는 매우 얇아 한 손에 들고 읽기 편하다. 물론 선집이니만큼 일기 원본 전체를 담은 책이 아니다. 원본은 총 24권으로 그가 성인이 된 해부터 34살 요절할 때까지 내리 쓰던 글이라 분량이 어마어마하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갑자기 한문 천체가 되어 선집에 소개되지 않은 일기 내용도 엿보고 싶다. 그만큼 이 청년의 일기는 지금 봐도 친근하니 그 문장에 정이 간다. 가령 요즘 사람들은 모두 돈을 좋아한다며 역시 돈이 최고라는 푸념 하거나, 장원급제도 못한 가난한 무명의 서생인 자신이 한심하다 자학하다가 곧 책 쾌를 만나서는 수소문하던 책을 구해 들뜬 간서치의 마음을 고백한다.
"세상만사 아무 미련 없건만 오직 책만은 버릇처럼 미련처럼 남았네.
어찌하면 일 년 같은 긴 하루를 얻어,
아직 못 본 세상의 책들을 다 읽을 수 있을까?"
보자마자 전 세계의 책 덕후들이 함께 눈물지을 문장이다. 언젠가 중고 서점에서 산 머그에도 이런 비스름한 뉘앙스의 글자가 쓰여있다.
so many books, so little time.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참으로 사람 사는 건 그대가 살던 거기나 여기나. 이런 다소 귀여운 한탄 외에도 조금은 더 심각한 고백도 곳곳에 보인다. 아니, 잊을 만하면 나와서 조금 당혹스러운데 본래 문장 끝마다 느껴지던 위트와 명랑함이 어느 지점에서는 분노로 바뀌어 있다. 읽는 내가 다 미안해질 정도로 어떤 시점에서 그는 자신의 세계를 미워한다. 그런 그 사람이 걱정돼서, 계속 장을 넘기다 보면 어떤 근원적인 불안이 읽힌다. 양반의 책무를 다하지 못하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하는 일에 대한 불안이 읽힌다. 양반의 책무를 다하지 못하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하는 일에 대한 불안이.
당대에는 과거에 붙는 일이 당대 모든 양반의 의무였고, 그 자신만의 꿈은 역사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냥 그저 그런 역사가가 아니라, 자신만의 문장을 쓸 수 있는 저술가가 되고 싶다고. 하지만 자신에게는 애초에 재능이 없는 게 아닐까 걱정한다. 어쩌면 이 모든 시도가 헛수고, 헛소동일지도 모른다고. 어째 수백 년 전 고민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 되려 생경하다. 어찌 이렇게 이심전심으로 무언가를 너무 사랑하면, 갖지 못할까 두려워하다 종국에는 히스테리 발작의 일환인지 그 일을 안 할 핑곗거리를 열심히도 찾는 모습까지 낯설지 않다. 하지만 그는 결국 용자다. 그럼에도 일과 월, 날씨까지 아니 그 해 연도까지 또박또박 긴긴 한자로 적었다. 십수 년을. 어떨 때는 그냥 오늘 날씨만이라도.
이 책 『일기를 쓰다』를 다시 읽으면서, 새삼 그의 꾸준함에 감탄하게 된다. 그러다 문득 일기를 재밌게 쓰던 시절이 있었음을 생각해 냈다. 언젠가 아주 오래전에 일기를 썼지만 언젠가부터 쓰지 않았다. 일상이 너무 시시해서 그랬나, 매일 악필로 글자를 쓰다 다음날 본인도 못 해독 불가하던 것이 지쳐서 그랬나, 모르겠다.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스스로 즐기며 쓰던 일기를 안 쓰기 시작했다. 어쩌면 일기장을 열어보던 텀이 점점 길어지던 그때부터, 그럼에도 계속 썼다면 지금쯤 수년간 일기를 쓰는 기인이 될 수 있었을까?
한참을 생각했다. 지금 보니 이 하루란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더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꼭 한국사 오백 년처럼 큰 대하드라마가 아니라도. 대려 작은 일상일수록 더 세세하게 전과 후의 일들이 더 선명하게 보인다. 조금만 노력해서 천천히 숨을 고르면, 오 년이나 십 년의 간의 일을 이어 보는 것보다 더 세세하고 정확하게 보인다. 그날 하루에 내가 본 세상은 어땠는지를,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느끼는지를 느낀다. 이렇게 정말 작은 일은 삶의 모든 감각을 깨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낸다. 그간 무기한으로 미뤄두던 활동을 해보는 것만으로도, 그 주에 바로 나만의 과업이 생긴다. 나름 이 방구석 은둔 생활 중에도 특별한 일이 자신 안에서 생긴다. 오늘도 내일도 어제와 똑같대도 다음 주가 기다려진다. 그렇게 하루하루 쌓아가는 느낌이 중요한 것 같다.
물론, 이 느낌만으로 큰 변화가 오지는 않는다. 여전히 오늘만이 확실하고 내일은 그저 희뿌연 공포가 지배한다. 실제 어떤 괴물이 광폭하게 울지도, 징그러워하는 벌레가 출몰하는 악몽도 아닌 채로 그저 고요한 침묵의 봄 같은 그다음 날. 이다음날 일상은 그전의 상태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매일같이 관복을 입고 도성 안으로 출타하는 대신, 집안의 살림을 돌보고 서책을 정리하며 자신의 소임을 기다리던 그는 결국 과거에 붙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평생을 프로 시험 낙방객의 신분으로 살았다 볼 수 있다. 아무리 씩씩한 그이라도 매번 실망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시험 본 날 음울한 일기를 읽어본다.
"지난 일들을 생각해보면 그 사이 한 계단도 오르지 못하고 돌아와, 이 뜰을 마주
했다. 지난 4년이 이처럼 우습다. "
꽤 자주 이런 허탈함이 그 일기 안에서 되풀이된다. 하지만 이 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산 세상에 대한 사랑이 묻어 있다. 당연히 반복되는 일상 안에서도 꽃송이와 같은 사람들을 책들을 계절을 귀히 여겨서, 흠모하면서. 꼭 그런 느낌이다. 그의 문장은. 시작하면서도 끝내면서 내내 자기 등 뒤에 오는 사람에게 보내는 서신 같다. 먼 시공을 넘어온 당부. 설사 깜빡깜빡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한대도 제발 꺼지지만 마라. 최대한 영영 꺼지지 않을 만큼만 불씨만 살려내도 괜찮다. 혹여 어제저녁에 연속해 꺼트리면 다시 이다음에 한 번씩 살려 본다. 살살 호호 불어가면서, 작은 아이를 어르고 달래듯이. 어쩌면 이는 백신을 스스로에게 놔주는 일과 다르지 않다. 통상 백신의 효용이 그렇듯 한 사람이 자신만의 창조성을 지켜내면 그 주변도 안전해진다. 그러니 한번 오늘도 내일도 살살 모닥불을 피워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