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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gelo Apr 10. 2021

<1> 시작의 글

재판부는

 "A 씨가 만취 상태로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고,

반성하고 있는 점 등을 모두 참작했다"

라고 집행유예에 대한 양형사유를 설명했다.


119 구급대원 폭행사건에 대한 형사재판에서

피고에게 징역 X개월 집행유예 Y년의 판결이 선고됐다.


피고가 재심을 청구하지 않음으로써 재판은 끝났지만

나의 트라우마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나는 현직 119 구급대원이고

해당 폭행사건의 피해자이다.

주취자를 이송하는 과정에서 심한 폭행을 당했고

공무집행 중이라는 사유로

변변찮은 대항을 할 수 없었다.


10년 남짓한 재직기간 동안 무난히 지내오던 내게

폭행사건은 엄청난 후유증을 안겨 주었다.

폭행이 있었던 공간에서 업무를 지속하는 것은

내게 큰 정신적 고통을 주었다.

하루에 9시간, 혹은 24시간 내내(주말 당직)

반복되는 환자 이송 업무.

때문에 해당 사건의 기억은 늘 망령처럼 따라다녔고

폭언을 일삼는 환자는 날이 갈수록 늘어갔다.


경험상 구급출동의 1/3 이상이 취객으로 인한 신고였다.


머리 출혈? 대부분 주취로 인한 낙상이 원인이다.

쓰러짐? 주사를 거하게 부리고 있더라.

현장의 환자 발생을 우려하는 경찰의 공동대응요청?

술 먹고 싸운 현장에서 머리카락을 잡혔다고 한다.

전신쇠약?

술 깨는 약 좀 맞게 병원 좀 데려가 달란다.


이 모든 상황에서 구급대는

어떻게든 환자를 병원에 이송해줘야 다.

그래야 뒤탈이 없다.

탈이 난 건 정작 나였다.

나는 업무 그 자체에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다.


‘활력징후도 괜찮으시고

특별히 다치신 곳도 확인되지 않으시네요.

약주 드셨으면 집에 가셔야지

119에 신고하시면 안 됩니다.

희는 들어가 보겠습니다.’


혹여 이러고 귀소 했다가

그 사람이 민원이라도 제기한다면?

oh my god, 그날엔 모든 게 뒤집어진다.


주취자를 이송하지 않았는데 추후에 외상을 입었거나,

검사를 해보니 뇌출혈이 있었다던가,

강도사건을 당하거나 해서 곤란해진 사례가 심심찮게 내려온다.


담당업무 하기도 벅찬데 민원 답변서 쓰기,

민원 유발자 낙인효과로 인한 평판 저하,

자존심 제쳐두고 취하해달라고 사과하기 등의 문제로

구급대는 민원에 취약하다. 너무, 너무 취약하다.


민원인이 공무원 친절의 의무 들먹이며

불친절했다고 한마디만 곁들여도

이 조직은 직원에 대한 징계를 검토한다.

고객의 컴플레인에서 자유로운 급여생활자가

어디 있겠냐마는 이건 좀 너무하지 않은가?

의료 관련 지식 및 관련 업무 경험이 전무한 자가

관리자 직함을 달았다는 이유로

관련 학과를 전공한 구급대원에게 현장활동이 미흡했다며

전 직원 앞에서 '꼽'을 주고 민원인에게 사과를 강요한다.




나는 폭행사건으로 인한 후유증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시도를 했다.

임상치료. 심리상담, 운동, 휴가, 취미생활 등등...

하지만 딱히 효과는 없었다.


미각을 상실한 사람에게 진상된 수라상이랄까?

씹어도 향이 나지 않는 고기였고,

삼켜도 시원하지 않은 국물 같았다.


업무에 임하며 자주 반복되는 비슷한

(주취자를 곱게 눕혀서 병원 이송해줘야 되는 뭐 같은)

상황마다 나의 심장은 빠르게 - 얼굴은 발갛게 -

목소리 톤은 한없이 올라갔다.


동료들에게 ‘함께 일하기 불안하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고성을 지르며 항변하기도 했다.


내가 더 이상 뭘 어떻게 해야 하냐고.


혹자는 묻는다.

그렇게 힘들면 업무를 바꿔보거나 일을 그만두라고.

남자 나이 마흔에 다른 일 찾기가 쉽지 않다.

보직을 바꾸는 것 또한 내 의지대로 되지 않는다.

구급대원 하겠다고 특별 채용된 입장에서

보직을 바꿔달라 인사고충을 쓰기도,

인사팀에서도 나 대신 다른 누군가를 꽂아 넣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겠는가. 받아들일 수밖에.


나를 죽일 수 없는 고통은 나를 강하게 만들 뿐이라고

자위하며 '존버' 할 수밖에.

나의 인생은 길고 나의 남은 공직생활도 길다.

살 길을 찾아야 한다.

트라우마를 극복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온갖 방법을 다 써보고 마지막으로 글쓰기를 시도해본다.

심리상담사가 강력히 추천한 방법이다.


글쓰기를 하면 내면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더라.

막상 다시 읽어보면 별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더라.

글쓰기를 하다 보면 또 다른 묘수가 떠오를 수도 있다더라.


‘ 여러분의 고민, 생각, 걱정거리를 떠올리면 마음이 불안한가?
그럼 저자는 그 내용을 먼저 종이에 써보라고 한다.
사례자 A는 자신의 불안함을 그대로 생각나는 대로 적어본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짐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무슨 감정일까?
 
생각해보건대 어느 정도 정리가 된 감정 추스르기, 쓰기
라는 정리를 통해 새롭게 계획을 세울 수 있는
방법이 수립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 쓴다 쓰는 대로 된다, 후루카와 다케시       



글을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지만 쉽게 쓰여지지 않았다.

애초에 독서를 즐기지 않았고 작문에 취미가 없었던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게 된 건

운동, 심리치료, 장기휴가 등의 방법들이 신통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내려준 마지막 동아줄이라고 생각하고 글을 썼다.

혹시나 글쓴이가 나라는 게 드러날까 봐 많은 내용을 각색했다.

익명의 가면을 쓸 때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었다.


글을 쓰며 하나 깨달은 게 있다.


폭행 사건은 트라우마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긴 했지만,

이미 나의 멘탈은 작은 자극에도 허물어질 정도로

연약해져 있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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