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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gelo Apr 10. 2021

<2> 사건이 일어나던 그 순간

“스위스 치즈 이론에 의하면 사고를 유발하는 결함(구멍)들이 항상 잠재해있는데, 이 결함들이 한꺼번에 나타날 때 대형 사고로 이어진다는 이론이다.
다양한 안전장치가 작동하여 사고를 예방하기도 하지만
모든 안전장치는 완벽하지 못해
구멍이 우연히 일직선이 되면 큰 사고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


그 날을 스위스 치즈 이론에 비유하자면,

구멍이 중첩되다 못해 사고가 회오리감자처럼

치즈의 심장부를 관통한 날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구급출동, 구급출동, 남자 낙상환자입니다.


출동지령이 내려왔다.

평소 3명이 탑승했지만 휴가자가 발생하여

운전요원을 제외하면 구급대원은 나 혼자 뿐이었다.


현장은 주소만 읽어 봐도 그림이 그려지는 유흥가였다.

저 멀리서 머리에 피를 흘린 채 주저앉아 있는 중년 남성이 보였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관할 구급차는 어딜 가고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나...

현장에 도착했다고 무전을 날린 후 환자에게 다가갔다.


열대야가 지속되는 여름밤에는

주취자들이 밤새도록 술을 마셔대고 곧잘 119 구급차를 불러댄다.

신고자도 주취, 환자도 주취. 협조가 될 리 없다.


평범한 환자를 병원에 이송해주는 걸

난이도 B랭크로 분류한다면,

지금 같은 주취자 관련 출동은 난이도 S랭크라고 할 수 있다.


신고자의 위치가 부정확해서 한참 헤맨 탓에 현장 도착이 늦었다.

신고자와 환자, 구급대원 셋 다 예민해있는 상태.

국민의 세금 운운하며 시비를 터는 보호자를 운전 주임님이 달래고

나는 피범벅이 된 환자에게 다가갔다.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감으며 대화를 시작했다.


 “머리가 찢어지셨네요. 병원 가보셔야 될.....”

 “A병원 가자고!!!”

 “그 병원은 여기서 매우 멀고 저희 119는 가장 가까운 응급실 이송을 원칙으로...”

 “야 이 개XX  XXXX XXXXX XXXX!!! ”


다친 곳이 머리이기에 어떻게든 이송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예 권역이 다른 A병원이라니...

차라리 환자가 만취상태로 말이라도 못했으면 좋았으련만.

이런 상태로 인근 응급실 갔다가 선별 진료소에서

환자가 다른 병원 가겠다고 말해버리면 답이 없다.

협조 안 되는 주취상태의 환자를 달가워하는 응급실은 없다.


피로에 찌든 눈빛으로 나를 보는 운전요원에게 미안한 눈빛을 보냈다.

그리고 힘겹게 의견을 냈다. A병원으로 이송합니다 주임님.  


드레싱을 마치고 주들 것에 환자를 눕혀 차량에 탑승시켰다.

환자는 술기운이 올라 구역감이 있었는지 계속 상체를 세웠다.

주들 것 바깥으로 고개를 내빼려고 했고 헛구역질을 지속했다.


 “주임님 우리 조금만 빨리 갈게요.”


이 상황이 너무 싫었던 나는 액셀 좀 밟아달라고 요청했다.

환자의 구토에 대비해 비닐봉지를 귀에 걸어주었다.

구급차가 빨리 달리다가 급정거하면 다칠 수도 있으니

들 것에 기대어 달라고 말하려던 찰나,

찌릉내와 땀 냄새가 섞인 손바닥이 별안간 내 얼굴을 향했다.

환자, 아니 '그놈'이 내게 손찌검과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운전요원이 차량을 정차하고 뒤로 와서

가해자와 나를 떼어낼 때까지 나는 무방비로 폭력에 노출됐다.




얼얼했다. 입 안에 비릿한 피맛도 느껴졌다.

상황실에 무전으로 경찰을 요청하자 거기가 어디냐는 답신이 왔다.


아... 여기는.. 매번 병원 이송할 때마다 지나는 길인데도

당황스럽게도 여기가 어딘지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아, 119에 신고하는 사람들이 이런 느낌이겠구나.

그 와중에도 딴생각이 들었다.

내가 맞았다는 현실감이 없었다.


여기가 어딘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말문이 막혔고

그다음에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버렸다.


경찰은 금세 현장으로 왔다.

그 와중에 가해자는 아파 죽겠다며

병원에 데려다 달라고 주장했다.

내가 머리에 감아준 붕대를 풀어버리고

다시 출혈이 있는 상태.

경찰은 신원을 확인하더니 일단 병원에 보내야 되지 않겠냐고 물었다.

사이다처럼 가해자를 체포하거나 하지는 않았고 사고 접수만 하고 유유히 사라졌다.

현장에 또 다른 구급대가 도착했다.

그들은 내게 가해자의 인적사항과

부상 경위 알려달라고 말했다.

비로소 나는 정신을 차렸다. 아... 경위!!!


상기 본인은...으로 시작하는 경위서를 시작으로

앞으로 작성해야 할 산더미 같은 행정업무가 떠올랐다.

그때서야 비로소 정신이 좀 들었다.

통증보다, 지독한 분노와 환멸이 느껴졌다.

극심한 두통도 몰려왔다.   


퇴근해서 쉬고 있던 특별사법경찰이 현장으로 왔다.

내근 업무 하는 소방관으로 나와 면식이 있는 주임님이었다.

주임님께서 반의사불벌죄인 폭행과 다르게

이건 공무집행 방해이며 형사처벌을 받게 된다고 알려줬다.

병원 진료를 받으라고 당부했다. 상해진단서가 필요하단다.  

당직관에게 전화가 와서 선심 쓰듯 오늘은 출동하지 말고 쉬라는 말을 들었고,

운전하는 반장님은 쉴 새 없이 나를 위로해주는 말을 건넸다.

듣는 둥 마는 둥 내 시선은 온통 창문 밖으로 쏠려 있었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그 밑에 삼삼오오 모여

2차를 가네 택시를 잡네 한잔 더 합세

하하호호 떠드는 무리들을 보았다.

아 저들은 저렇게 행복해 보이는데 나는 이게 뭔가...


늦은 시간에도 불이 꺼지지 않은 아파트의 창문을 보았고,

편의점에서 컵라면 먹으며 창밖을 바라보는 사람과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필사적으로 시선을 외부로 돌리려 노력을 하다 보니

어느덧 센터에 복귀했다.


현재의 상황에 대해, 나에 대해서 생각할수록 머리가 지끈거렸고 가슴이 죄어왔다.

센터에 도착하니 동료들이 모두 사무실로 나와서 나를 걱정해주었다.


 “... 뭐... 크게 다치지는 않은 거 같아요.. 괜찮아지겠죠...”


화면보호기가 돌아가는 모니터. 누가 틀어놨는지 아무도 보지 않는 TV.

동향보고를 쓰고 있는 서무주임님.

자다가 깨어나 사무실의 조명에 아직 눈이 적응되지 않는 동료들.

상기된 표정으로 날 응시하는 팀장님.

행정업무 하다가 지령을 받고 후다닥 나간 탓에

어지럽게 서류가 펼쳐져 있는 나의 책상.

나는 삐걱대는 소리를 내는 의자에 앉았다.

그때 문득 깨달았다.


지금 이 폭행사건은 점화원 (주 1) 일 뿐.


구급업무로 인한 나의 트라우마는

꽤 오래전부터 내 안에 차곡차곡 적립되어 왔다는 것을.




(주 1) 점화원 [ source of ignition, 點火源 ]


: 가연성 가스나 물질 등이 체류하고 있는 공간에

불이 붙을 수 있는 근원으로,

전기적인 스파크나 충격 등에 의한 불꽃 등이

화재 발생의 점화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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