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2)_성난 영혼 김두수와 김환의 이야기

절대 악인도, 절대 선인도 없다.

by 제이쌤
"누군가 소를 죽여주어야 소고기를 먹을 테고, 누군가 호랑이를 죽여주어야 호환을 면할 테고 누군가 나쁜 놈을 죽여주어야 살인강도, 역적이 없어질 테고, 날이면 날마다 살생은 아니 끊이는데, 죄인은 날로 날로 늘어만 가는데, 성현은 무엇을 했느냐! .. 살아생전에는 죄인들 덕분에 덕을 높일 수 있었고 죽어서는 또 극락 꽃밭에서 소요하는 신세, 그래 대성은 무엇이냐!"
미친 것처럼 소리소리 지르는 동안 김환의 사유는 '말짱 헛거'라고 외친 것에서 진전을 하고 있었으나 절망의 소리임에는 다를 바가 없고 갈팡질팡 실상 그 자신 자기 입술에서 튀어나가는 말의 뜻을 헤아리고나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 기탄없이 말한다면은 선생님의 말씀, 그것은 자기변명입니다... 사십 고개를 넘었으면 시시껄렁한 옛일쯤 잊을 일이지.... 죄인은 거룩한 희생자라 스스로 말하면서 뭣 땜에 이십 년을 허송하였던가요?"
길상의 입에선 확실한 말이 나왔다.

사흘 밤으로써 김환의 깊은 상흔은 치유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깊이 박힌 뿌리가 사흘 밤으로 뽑혀질 까닭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길상은 김환의 외침으로 오히려 자신이 굳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나서는 그 자신을.


토지 8권에서는 유독 김환과 김두수의 이야기에 깊은 잔상이 남는다. 김환은 최서희의 어미, 별당아씨와 달아났던 구천이다. 최서희의 할머니 윤 씨 부인이 절에 다니러 갔다가 동학당 김개주에게 겁탈을 당하고 남몰래 낳은 자식이 바로 구천이다. 그러니 구천이는 최서희 아버지 최치수의 동생이며, 별당 아씨는 구천이는 형수인 셈이다.


최서희를 어릴 때부터 곁에서 모시던 머슴인 길상은 지금 최서희의 남편이 되어있다. 조선은 일제 치하의 암흑 속이고, 양반이고 상놈이고 다 같이 나라 잃은 식민지 백성인 판국에, 신분 따위가 개나 줄 계급인 세상이지만, 세상이 뒤집힌다고 뿌리깊이 박힌 사람들의 관념까지 하루아침에 갈아 엎어지는 건 아니다. 그런 세상에 주인집 애기씨의 남편이 된 길상 또한 마음속에 늘 해결되지 못한 무거운 감정을 가지고 살아내는 인물이다.


그런 길상과 구천(김환)이 오랜 시간이 지나 만나 주먹다짐까지 해가며 주고받는 이야기들이다.


길상은 서희에게 구천이 윤 씨 부인이 낳은 자식이라는 얘기를 어렵게 내놓는다. 그럼 그것이 복수였냐 묻는 서희에게 길상은 말한다.


"그것은 사랑이었소."




또 목에 걸린 가시같이 불편한 인물 하나. 김두수(김거복)

최치수 살인을 도모했던 사람들 중 하나인 김평산의 큰 아들 김거복. 김평산이 처형되고 아내 함안댁은 거무죽죽하게 썩어가는 나무에 목을 매고 죽었다. 심성 고운 둘째 한복이 와는 달리 거복이는 심성이 거칠었다. 그 거친 심성에 그런 일들을 당하고 나니 거복의 삶은 끝 모르게 나쁜 방향으로 흘러갔다. 김두수로 개명하고 회령에서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순사노릇도 한다. 금녀에게 몹쓸 짓을 하며 끈질기게 금녀를 찾아다니던 김두수는 금녀가 쏜 총에 부상을 당한다. 김두수는 악랄하고 치졸하고 야비한 짓들을 하며 살아간다.


김두수가 입원해 있는 병실에는 죽음을 앞둔 노인도 있고, 개복수술을 한 소년도 있었다. 노인에게는 아들, 손주, 며느리까지 온 가족이 돌아가며 찾아온다. 소년의 곁에는 부골스럽게 생긴 어미가 옆을 지킨다. 물 챙겨주고 머리에 손도 얹어보곤 한다. 찾아오는 사람이라곤 개미새끼 한 마리 없는 김두수.


김두수의 마음도 묘하게 허전해지기 시작한다. 다리의 통증이 차츰 덜해가니까 대신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노인의 시체가 실려나간 날 밤 김두수는 꿈을 꾸었다. 도포를 입고 살이 피둥피둥 찐 아비가 '이놈 거복아!'한다...
어머니의 모습도 꿈속에서 마주한다.

천장을 멀뚱멀뚱 쳐다보는데 이것은 또 어쩐 일인가. 김두수는 당황한다. 눈물이 볼을 타고 자꾸만 자꾸만 흘러내리는 게 아닌가.


그렇게 퇴원한 김두수는 다시 악인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지금 읽고 있는 9권에서 금녀와의 잔인한 마지막 만남과 동생 한복이와의 만남이 예고된다.





성난 영혼들. 김환과 김두수.


두 인물 모두 상처의 깊이가 너무 깊어, 그 밑바닥을 차마 마주 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외면하며 살아가는 듯 보여 나는 그들을 질책할 수만은 없다.


죄인은 거룩한 희생자라 말하면서, 분노와 죄책감 등의 감정 속에 평생 괴롭게 살아가는 김환. 이리 둘러대고 저리 매쳐봐야 형수를 데리고 달아난, (그 사실을 모를지라도) 주인집 마님을 데리고 달아난 천하의 죽일 종놈이다.


꿈에 본 부모의 모습에 자신도 당황할 만큼 눈물을 아내면서도, 그 감정을 모른 체하며 악인으로 살아가는 김두수. 용을 써봐야, 그 잘난 최 씨 집안의 최치수를 살해한 살인 죄인의 자식에서 벗어날 수도 없으니 선심 따위를 바랄 바에야 힘을 갖고 그 힘으로 다 짓밟으며 살아가기로 결심해 버린 것이다.


두 사람의 결말은 아직 모르지만, 용기를 내었으면 좋겠다. 자신의 상처 밑바닥을 마주할 용기를. 쓰리고 아프겠지만 그러고 나면 세상을 용서할 수 있을지도, 결국엔 자신을 용서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


세상에 절대 악인도, 절대 선인은 없다.


그렇게 토지를 읽으며 세상을 배워나간다. 누구의 삶이든 하찮은 삶은 없으며, 그렇게 밖에 살 수 없는 수많은 인간들이 모여 살아가는게 세상이구나. 세상을 이해하고 나를 이해하는 그 길에 '토지'가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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