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악인도, 절대 선인도 없다.
"누군가 소를 죽여주어야 소고기를 먹을 테고, 누군가 호랑이를 죽여주어야 호환을 면할 테고 누군가 나쁜 놈을 죽여주어야 살인강도, 역적이 없어질 테고, 날이면 날마다 살생은 아니 끊이는데, 죄인은 날로 날로 늘어만 가는데, 성현은 무엇을 했느냐! .. 살아생전에는 죄인들 덕분에 덕을 높일 수 있었고 죽어서는 또 극락 꽃밭에서 소요하는 신세, 그래 대성은 무엇이냐!"
미친 것처럼 소리소리 지르는 동안 김환의 사유는 '말짱 헛거'라고 외친 것에서 진전을 하고 있었으나 절망의 소리임에는 다를 바가 없고 갈팡질팡 실상 그 자신 자기 입술에서 튀어나가는 말의 뜻을 헤아리고나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 기탄없이 말한다면은 선생님의 말씀, 그것은 자기변명입니다... 사십 고개를 넘었으면 시시껄렁한 옛일쯤 잊을 일이지.... 죄인은 거룩한 희생자라 스스로 말하면서 뭣 땜에 이십 년을 허송하였던가요?"
길상의 입에선 확실한 말이 나왔다.
사흘 밤으로써 김환의 깊은 상흔은 치유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깊이 박힌 뿌리가 사흘 밤으로 뽑혀질 까닭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길상은 김환의 외침으로 오히려 자신이 굳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나서는 그 자신을.
김두수의 마음도 묘하게 허전해지기 시작한다. 다리의 통증이 차츰 덜해가니까 대신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노인의 시체가 실려나간 날 밤 김두수는 꿈을 꾸었다. 도포를 입고 살이 피둥피둥 찐 아비가 '이놈 거복아!'한다...
어머니의 모습도 꿈속에서 마주한다.
천장을 멀뚱멀뚱 쳐다보는데 이것은 또 어쩐 일인가. 김두수는 당황한다. 눈물이 볼을 타고 자꾸만 자꾸만 흘러내리는 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