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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음 Oct 07. 2020

ADHD 자가진단과 변명

20점 기준의 62점

나는 각종 심리테스트의 광팬이다. 스스로를 잘 모르니 누군가 나를 정의해주는 게 좋은가 보다. 나는 엉망진창이라는 면에서 일관적이어서 대개 비슷한 결과가 나온다. 특히 MBTI는 테스트마다 ENFP를 벗어난 적이 없어서 웃기기도 하고 안 웃기기도 했다.


내게 두 번째로 큰 충격을 줬던 건 역시 ADHD 자가진단이었다. 나는 거의 모든 항목에 [항상 그렇다]를 체크하며, 이런 게 왜 테스트 거리인지 의문을 가졌다. ‘안 그런 사람도 있단 말이야?’ 하는 거였다. 테스트에선 20점 이상부터 ADHD를 의심하라던데 난 62점이었다.


1. 일을 순서대로 진행하기 어렵다.


나는 협업을 좋아하지 않는데, 바로 이런 항목 때문이다. 스스로 순서를 짜는 것도 남이 만든 순서에 편입되는 것도 잘 못한다. 내게 일의 순서를 만들라는 건 온 우주의 행성을 국민체조 대형으로 정렬해보라는 것과 같다.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결과적으로 안 된다.


2.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준비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다.


뭔가를 하려 할 때, 가장 시간을 오래 잡아먹는 항목은 ‘마음먹기’이다. 욕실로 직행해 샤워기를 트는 것보다 침대에 누워 ‘머리 감아야 하는데’라는 생각에 파고드는 편이다. (이건 불편하게 안락하다) 모순적인 것은 완료 기한까지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이 유일한 동기부여라는 것이다. 나는 보통 ‘좆됐다’는 확신이 들 때부터 움직인다. 그리고 어찌어찌해낸다. 내게 있으면 안 될 어떤 신체기관이 될 수는 없기에......


3.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시작하지만 끝마치기 어렵다.


밥 먹으면서 책을 보다가, 인스타그램을 켠다. 그때 문득 세탁기 속 빨래가 보인다. 건조대가 꽉 차 있으니 우선 갠다. 중간에 사진을 몇 번 찍고 친구에게 전송한다. 시계도 보고 싱크대도 한 번 본다. 벌써 세 신데 설거지 하기 싫다는 생각을 하며 물을 마신다. 아 참, 책 읽는 중이었지? 하다 보면 먹다 만 밥상과 개지 않은 빨래가 보이는 것이다. 내겐 작은 일도 큰 일도 이런 식이다.


4. 책을 읽거나 대화하는 도중 쉽게 주의가 분산된다.


분산된다기 보단 빻아져 흩날린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앞서 ADHD 동지들의 에세이를 찾기 힘들었다고 썼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왜인지 알 것도 같다. 책을 읽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쓰겠는가? 능력 없단 말이 아니라 본인 글을 완독하는 것조차 힘든 일이기에 하는 말이다. 남이랑 대화할 땐 주변 소음때문에 힘들다. 나는 직접 만나 커피숍에 가는 것보다 카카오톡이 좋다. 듣는 것보단 읽는 게 낫고 카톡 대화는 다시 찾아볼 수도 있으니 말이다.


5. 어떤 일에 과도하게 집중한다.


이건 ADHD에 대한 가장 큰 오해와도 상통하는데, 사실 ADHD는 어떤 일에도 집중을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흥미가 없으면 집중력을 유지하기 힘들다. 반대로 흥미도가 높다면? 당연히 과하게 집중한다.


6. 정밀한 일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다.


정밀할수록 주의력은 반비례한다.


7. 조심성이 없어 실수를 많이 한다.


이건 내 묘비석에 한줄평처럼 새겨져도 반박할 수 없는 문장이다.


8. 다른 사람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는다.


그건 다른 사람이 어떤 말을 하냐에 따라 다르다. 내 앞에 앉아 떠드는 이가 용서받을 수 없는 핵노잼이라면, 내 집중력 또한 지구 내핵으로 파고든다. 내겐 갑자기 바람 소리,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명료해지고 이 콘크리트 건물이 세워지기 전 터를 잡고 살았을 원주민 두더지들의 억울한 호소까지 들려온다. 결국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긍정의 YES이고 나도 내가 남의 말 좀 들었으면 좋겠다.


9. 지속적인 정신력을 요하는 직업을 피하거나 싫어한다.


이 경우는 내 호불호 문제가 아니라 그 직업 쪽에서 먼저 나의 특성을 거부한다. 짝사랑은 슬픈 것이지만 상호 혐오라면 해피엔딩이라고 본다.


10.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을 즉각적으로 말한다.


나는 상황을 고려하면서 아무렇게나 말하는 편이다. 남에게 상처 줄 수 있는 일은 최우선적으로 자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내가 미친 농담을 한다고 생각하니까 이건 3점이 적당하다.


11.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다.


나는 천국에 도착하는 즉시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태어나버릴 것 같다.


12. 불필요하게 끝없이 걱정한다.


일단 내 소중한 걱정들을 ‘불필요하다’는 말로 싸잡는 게 기분 나쁘다. 걱정이 왜 나쁘단 말인가? 걱정은 인류가 망하지 않고 2020년까지 기어코 살아남는 원동력이 되었다. 마음은 상했지만 사람은 정곡을 찔릴수록 길길이 분노한다는 이론에도 동의하기 때문에 5점을 내준다. 내가 하는 걱정들을 신명조, 13pt, 줄 간격 160%로 출력해서 이으면 하루치로도 지구 3바퀴 반을 돌 수 있다. 그럼에도 아직 안 미친 이유는 자고 나면 다 잊기 때문이다.


13. 위험을 고려하지 않고 행동한다.


오해다. 충분히 고려한다. 액션에 반영하는 걸 까먹을 뿐이다.


14.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불쑥 대답해버린다.


사람들의 질문이 너무 길다는 이의제기를 하고 싶다. 질문에서 벗어난 장황설일 때도 많고, 동시에 세, 네 가지를 묻는 사람도 쌔고 쌨지 않은가? 하지만 맞긴 맞다. 나는 물음표 살인마이자 물음표 컷팅기다.


15. 차례를 기다릴 때 초조하고 답답하다.


맞다. 줄 설 때 미적대는 사람이 있으면 교양머리도 체통도 없이 화가 난다. 그럴 땐 내 머리통을 치고 싶다. 그만 욕 해!라고 머릿속 전두엽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16. 술, 담배, 게임, 쇼핑, 일, 음식 등에 깊이 빠져든다.


동의한다. 근데 일에 빠진 적은 없다. 사장님이 이 글을 보실 일 없으니 하는 말인데 나는 일하기 싫다는 생각에 중독되어 있다. 이것도 일 중독 중 하나라면 모든 항목에 동의한다.


17. 가만히 있지 못하고 손발을 움직이거나 몸을 뒤튼다.


그렇다. 모션 추적 CCTV 앞에 나를 두면 걔가 꺼질 일은 없다. 행동이 큰 건 아닌데 결코 정지하지 않는다.


18. 말을 지나치게 많이 한다.


나는 좋게 말하면 이야기보따리고 나쁘게 말하면 고장 난 라디오다.


19. 가끔 창조적이고 직관적이며 지적으로 우수해 보인다.


드디어 긍정적인 것이 하나 나왔는데, 이것도 맞다. 내가 마감시간에 추적당하며 짜치는 일들은 가끔 창조적, 직관적, 지적이라는 피드백을 받는다. 진짜 그렇다기 보단 ‘그래 보인다’는 표현이 적확할 것이다. 요즘 내 주변엔 타인의 장점만 봐주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이런 칭찬을 많이 들었다. 어쨌든 그래 보이기라도 한다면 나는 좋다.


20. 가족 중 우울증 조울증 약물남용 충동조절장애가 있는 사람이 있다.

이건 잘 모르겠는데,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은 건 내가 처음이다.






※테스트 항목 출처 https://testharo.com/adhd/test_adult.php

(당연하게도 인터넷 테스트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정확한 결괏값을 얻으려면 신경정신과에 가야 합니다. 저 역시 병원에서 해본 테스트가 가장 정확하고 자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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