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mes Sidney Edouard Ensor
갑자기 지인에게서 10년만에 연락이 왔습니다. 어떻게 시간이 맞아서 집 앞으로 찾아온 동생을 커피숍에서 맞이하는데 생각보다 신나지 않았습니다. 10년 만에 찾아온 지인과의 만남. 사회적 역할 또는 자본주의 사회와 지위에 대한 질문으로 가득 채우는 대화들. 당시 현실감이 있다고 하기엔 저에게 크게 의미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벨기에 출신의 제임스 앙소르(James Sidney Edouard Ensor)의 예술 세계는 뭉크 작품과 다르게 묘한 기운으로 저를 사로잡습니다. 다양한 원색의 색감들로 묘사된 질감의 표현력과 기괴하고 그로테스크한 가면이 서로 이질적인 요소지만 화면 안에서 의미 있고 기묘한 느낌을 전해주죠. 오래 알고 지내더라도 처음 만난 사람들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1888년에 그려진 "죽음과 가면들(Death and the Masks)"이라는 작품은 화려한 색감으로 표현된 장신구와 의복에서 사회적 지위를 상징성 있게 담아내고, 그로테스크한 가면과 팔다리가 없는 인체의 형상으로 무기력하면서도 공포스러운 사회적 관계의 진실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짧고 덧없는 파티를 즐기느라 정신이 없는 모습은 이미 현대 사회에서도 일어나는 인간관계의 허무함을 전합니다. 앙소르의 작품은 매일마다 쓰고 다니는 가면이 진실된 자기 자신이라는 환상, 그런 덫에 빠져드는 순간이 오면 어떨까? 하는 질문을 하는 거 같네요.
19세기 당시 앙소르는 인상주의와 사실주의의 한계를 넘어 보다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표현을 모색하던 시기의 예술가였습니다. 작품 속의 짧은 붓터치와 묘사방법으로 앙소르 자신의 주관적이고도 감정적 상태를 적극적으로 표현한 심리는 인상주의 영향을 받았다는 걸 보여줍니다. 차이점이라면 앙소르는 화려하면서도 기괴한 가면과 상징적 이미지를 소재로 다뤘고, 인상주의 화가들은 일상적이고 주변 풍경과 인물을 그렸다는 점이겠죠. 하지만 개인의 심리와 사회적 현실을 재해석하고 감정적 표현을 시도를 했던 예술가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앙소르 작품 중 개인적으로 좋아합니다. 부드러운 파스텔 색감으로 가로선의 짧은 붓질로 표현되어 있어서 화면이 양쪽으로 확장되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 늘어난 공간 속에는 기괴한 마스크를 쓴 인물들이 더 있을 것만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앙에 팔다리가 없는 남자의 심각한 표정은 능동적인 느낌보다는 수동적으로 보이며, 마치 감정적 소용돌이 속에 있는 인물처럼 보입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한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진한 화장을 한 마스크를 쓴 채로 그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들의 진실된 표정은 감춰져 있으며, 그들이 이야기하는 많은 것들은 그다지 유쾌하거나 진실한 이야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남자는 입을 꾹 다문 채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무언가를 골똘하게 응시하고 있습니다. 입기 싫은 피에로 옷을 억지로 입어서 화가 잔뜩 난 장면같기도 하죠?
작품 <가면의 세례>는 르네상스 시대 이전의 고전적 종교화의 삼각형 구도를 차용하여 안정감있게 인물을 배치했습니다. 부드러운 색채의 흐름들이 자연스럽습니다. 강렬한 그로테크스적인 뭉크의 그림과는 대조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완성했죠. 죽음의 순간 앞에서 가면을 벗지 못하는 모습. 그런가 모두가 다 벗지 않고 있습니다.
현실로 돌아와 보니 5년 전 제 그릇의 크기가 보입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도 처음 만난 듯한 감정을 이해하지를 못했던 그릇의 크기.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습니다. 자기 생각의 테두리 안에서만 타인을 적용하고 생각하고 평가까지 한다면 좋지 못한 사람이 되는 건 시간문제일 뿐인데, 앙소르의 작품을 보면서 관계에 대해 사유했던 것이 다행이었을지도 모르죠.
사람들은 사회 속에서 가면을 씁니다. 한국에서는 체면이라는 가면을, 자본주의의 가면을 씁니다. 그 가면이 언제부터인가 진짜의 나인 줄 알고 더 이상 가면을 벗을 수 없는 상태가 다다르면 그때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살아가지 않을까요? 그래서 마음의 그릇을 키우는 훈련을 해야 겠다고 생각했던 거 같습니다.
‘아마도 그 때는 나를 좋아하는 사람의 수가 지금보다 많아져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아냐아냐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수만큼 내가 그들을 좋아하고 있을 거야!’
그만큼 모든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그릇의 크기가 정해져 있는 건 아닙니다. 살아가면서 받은 부모와 환경의 영향,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과 인간관계를 거쳐 터득해 나가는 방법, 나이 듦 등으로 인해 그릇의 크기는 넓어지기도 하고 좁아지기도 합니다.
셰익스피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엇보다 너 자신에게 진실되거라. 그러면 밤이 낮을 따르듯 남에게 거짓될 수 없는 법“ 밖을 보기 전, 안을 보는 훈련. 그게 그릇을 키우는 훈련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