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로 가는 길목 수다사로 가는 길이다. 68번 지방도 '상무로' 아스팔트 길 옆에서 코스모스가 산들산들 왈츠를 추고 있다. 곧은 줄기 끝에 핀 여덟 갈래 꽃잎은 걱정도 욕심도 시기도 다 내려놓고 해탈한 듯 바람에 온전히 몸을 맡겼다.
어린 시절 이 길은 아름드리 포플러 나무가 양옆으로 늘어선 모래와 자갈투성이 신작로였다. 그즈음 고향은 여느 농촌마을과 마찬가지로 호롱불이나 남포등을 대신해서 전기가 들어오고 흑백텔레비전이 보급되고 전화가 개통되는 등 이른바 ‘근대화’의 물결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주민들이 외지로 떠난 지금의 시골은 썰물 빠진 갯벌처럼 적막하기만 하다.
다가올 추석이면 ‘민족 대이동’이라는 귀성 물결이 전국 주요 도로들을 가득 메울 것이다. 고향과 부모를 떠나 도시에 정착한 현대인들은 북쪽에 가족을 두고 온 실향민과 다를 바 없는 또 다른 실향민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을 안곡리 저수지 둑 아래 드넓게 펼쳐진 논에 누렇게 익은 나락이 가을 햇볕을 받으며 제 무게에 겨운지 고개를 숙이고 잔물결을 일렁이고 있다. 수다사로 가는 상송리 골목에는 주렁주렁 열린 감이 담장 너머로 얼굴을 내밀었다.
고향에 내려올 때면 자석에 끌리듯 수다사로 발길을 옮기게 되는 것은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다. 노송 숲 사이로 사시사철 그치지 않고 흐르던 계곡 물소리가 그리워서 일까, 샛노란 은행나무 잎사귀들이 본당 아래 마당을 온통 뒤덮던 장관이 보고 싶어서일까, 아니면 어렴풋한 유년기 소풍의 기억 때문일까?
일주문을 지나니 풀어 제친 옷섶 밖으로 불룩한 배를 드러낸 포대화상이 넉넉한 미소로 맞이한다. 지난봄 산들바람에 눈처럼 꽃잎을 흩뿌리던 벚나무들도 긴 폭염의 여름을 잘 견디고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수다사(水多寺)는 천년 고찰이다. 신라 문성왕 때인 9세기경에 진감국사 혜소가 연악산 상봉에 흰 연꽃 한 송이가 피어 있는 것을 보고 그 아래에 절을 짓고 연화사(淵華寺)라 불렀다고 한다. 작년 여름 연악산을 오를 때 산 봉우리 위 하늘로 피어오르던 뭉게구름이 마치 한 송이 흰 연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고려 명종 때 각원이 중창하여 성암사(聖巖寺)가 되었고, 조선 선조 때 사명대사가 다시 수다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한때 대웅전, 극락전, 비로전, 나한전, 시왕전, 미륵전, 봉황루 등 전각과 스물네 개의 방사 등이 들어서 융성했었지만 지금은 대웅전, 명부전, 산신각과 요사채 등만 남아 단출하다.
대웅전을 지키는 본존불은 석가여래가 아니라 뭇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서원(誓願)을 세우고 깨달음을 얻은 자비심 가득한 이타행(利他行)의 부처, 곧 아미타불이다. 보물로 지정된 후불탱화 ‘영산회상도’를 배경으로 용좌(龍座) 위에 가부좌한 아미타불, 가늘게 뜬 눈에 단아한 코와 입, 원만한 얼굴과 법의를 걸친 넉넉한 양어깨에 인자함과 자비로움이 흐른다.
수다사 아미타불/원각사 대세지보살
상체를 앞으로 약간 구부린 자세는 상념에 잠긴 듯하고, 여느 사찰의 대웅전과는 달리 좌우 협시보살도 없이 홀로 앉아 있는 모습에서는 왠지 모를 외로움과 쓸쓸함이 묻어난다. 지난여름 휴가 때 이곳에서 삼십여 리 떨어진 선산의 비봉산에 올랐었다. 봉황의 형세를 닮았다는 그 산 정상에 올랐다가 오른쪽 날개 죽지격인 능선을 타고 내려선 산자락 끝에 작은 사찰 하나를 만났다. "이 절이 바로 그 원각사!" 순간 나도 모르게 저절로 중얼거렸다.
알 길 없던 수다사 목조 아미타여래좌상의 조성 내력이 1968년에 이곳 원각사(圓覺寺) 대세지보살 상의 복장 유물이 발견되면서 밝혀졌다는 얘기를 알고 있던 터였다. "순치(順治) 육 년 구월 선산 서부 연악산 수다사에서 아미타불, 관음보살, 대세지보살을 조성했다."
복장유물이 말해주고 있는 기록의 순치 육 년 구월, 오랑캐라 멸시하던 청(淸)의 연호로 적힌 때를 헤아려보니 1649년 가을이다. 병자호란이 끝난 지 십여 년, 인종이 승하하고 8년 넘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있다 돌아온 효종이 즉위한 해이다. 그 해 구월 효종실록에는 ‘금성이 낮에 나타났다’는 기록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띈다.
바야흐로 백곡이 여물어가는 계절, 하늘은 높고 맑아 밤이면 꽃이 만발한 메밀밭처럼 별들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릴 듯 서로 다투어 빛났을 것이다. 불상 조각에는 수조각승 희장(熙藏)을 비롯한 당대의 이름난 조각승 여덟 명이 함께 참여했다고 한다.
아물지 않은 전란의 상처를 보듬으며 병자년의 치욕을 씻고자 절치부심 ‘북벌’을 벼르던 때, 삼존불 조성 불사에 쏟은 정성과 인근 백성들의 관심은 지극했을 것이다. 서쪽하늘에 뜬 개밥바라기별이 새벽 샛별이 될 때까지 끌과 정을 손에서 놓지 않고 이어갔을 불사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머리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어깨 높이로 든 오른손과 무릎 위에 놓은 왼손으로 연꽃을 든 미려한 원각사 대세지보살상이 떠올랐다. 몸을 앞으로 약간 구부린 그 모습은 영락없이 수다사 아미타불과 빼어 닮았었다. 일제 강점기인 1931년 근처 도리사의 주지 하정광 스님이 원각사를 개축했다고 하니, 그즈음 시대의 격랑에 휩쓸려 원각사로 옮겨갔을 것이다.
대세지보살상만 자리했다는 원각사 원통전에는 어느 때인가 주존불과 관음보살상을 새로 조성했는지 삼존불이 정좌하고 있다. 내력이 밝혀진 만큼 수다사에서 옮겨 온 대세지보살상은 본래 자리로 돌려보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란으로 가족과 생이별하고 청국으로 끌려간 수많은 백성, 죽지 못하고 돌아온 환향녀(還鄕女), 땔감을 지고 힘겹게 마을로 내려오는 초부(樵夫), 뽕잎이 한가득 든 망태기를 멘 아낙, 꿈을 좇아간 탄광촌에서 꽃상여에 실려 돌아온 순이 삼촌, 아리랑 열 두 고개보다 더 힘들었던 보릿고개,... 궁벽했던 벽촌 민초들의 삶은 고통스럽고 세월은 모질었을 터이다.
370여 년 전 어느 가을날 이곳 수다사에서 함께 세상에 온 수다사 아미타불과 원각사 대세지보살, 그리고 행방을 알 수 없는 관음보살은 긴 세월 스스로 이산(離散)의 아픔을 안고 지금껏 삶에 지친 사람들을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따뜻이 품어주지 않았을까.
수다사 대웅전 뜨락에 올라섰다. 낯익은 아미타불을 다시 마주하니 왜 이곳으로 발길을 옮기게 되는지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옅고 온화한 미소 뒤에 외로움과 쓸쓸함을 감춘 채 마치 내 마음을 헤아리고 "많이 힘들었지? 너무 아파하지 마라." 라며 조용히 위로의 말을 건네는 듯했다.
오랜 세월 뿔뿔이 흩어져 숱한 중생들을 위로했을 수다사 삼존불이 나란히 함께 모여 앉을 날은 언제쯤일까? 환향(還香)의 마음으로 대세지보살과 관음보살의 환향(還鄕)을 기원하는 합장을 하며 단풍 들 채비에 바쁜 은행나무를 뒤로하고 일주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