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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사 아미타불

환향(還鄕)

by 장인산 Aug 18. 2020


가을로 가는 길목 수다사로 가는 길이다. 68번 지방도 '상무로' 아스팔트 길 옆에서 코스모스가 산들산들 왈츠를 추고 있다. 곧은 줄기 끝에 핀 여덟 갈래 꽃잎은 걱정도 욕심도 시기도 다 내려놓고 해탈한 듯 바람에 온전히 몸을 맡겼다.


어린 시절 이 길은 아름드리 포플러 나무가 양옆으로 늘어선 모래와 자갈투성이 신작로였다. 그즈음 고향은 여느 농촌마을과 마찬가지로 호롱불이나 남포등을 대신해서 전기가 들어오고 흑백텔레비전이 보급되고 전화가 개통되는 등 이른바 ‘근대화’의 물결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주민들이 외지로 떠난 지금의 시골은 썰물 빠진 갯벌처럼 적막하기만 하다.


다가올 추석이면 ‘민족 대이동’이라는 귀성 물결이 전국 주요 도로들을 가득 메울 것이다. 고향과 부모를 떠나 도시에 정착한 현대인들은 북쪽에 가족을 두고 온 실향민과 다를 바 없는 또 다른 실향민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을 안곡리 저수지 둑 아래 드넓게 펼쳐진 논에 누렇게 익은 나락이 가을 햇볕을 받으며 제 무게에 겨운지 고개를 숙이고 잔물결을 일렁이고 있다. 안곡역은 동쪽의 선산과 남쪽의 개령을 잇는 교통의 결절지에 자리하는데, 개령 현감인 아버지 김숙자의 영으로 절도사 정강수를 맞이하러 안곡역으로 가면서 지은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시 한 수가 『점필재집』 등에 전한다. 


날라리 소리 속에 고삐 안장 정비하고

정절(旌節: 절도사 행차)을 맞이하려 하매 역정이 멀다.

거친 마을 십리에 등불은 창을 뚫는데

이지러진 달 오경에 서리가 신에 찼다.

토끼를 잡고 여우를 치매 참으로 흥취 있는데

솔을 심고 대를 묻기에 어찌 집이 없겠는가!

시내 건너 수염이 언 늙은이 부끄러워했나니

코 골며 달게 자던 잠 새벽 피리소리에 깨다.

_김종직의 <구월 십팔일 효부 안곡역 영 절도사 유작 증 정강수(九月十八日曉赴安谷驛迎節度使有作贈鄭剛叟)>


안곡리를 지나 수다사로 가는 상송리 골목에는 주렁주렁 열린 감이 담장 너머로 얼굴을 내밀었다. 고향에 내려올 때면 자석에 끌리듯 수다사로 발길을 옮기게 되는 것은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다. 노송 숲 사이로 사시사철 그치지 않고 흐르 계곡 물소리가 그리워서 일까, 샛노란 은행나무 잎사귀들이 본당 아래 마당을 온통 뒤덮 장관이 보고 싶어서일까, 아니면 어렴풋한 유년기 소풍의 기억 때문일까?


일주문을 지나니, 풀어 제친 옷섶 밖으로 불룩한 배를 드러낸 포대화상이 넉넉한 미소로 맞이한다. 마당 한 편에 서있는 수령 삼백 년 배롱나무는 사십 년 전 까만 교복 차림으로 소풍 왔던 소년을 잊지 않은 듯 변함없는 모습으로 나를 반긴다. 지난봄 산들바람에 눈처럼 꽃잎을 흩뿌리던 벚나무들도 긴 폭염의 여름을 잘 견디고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수다사(水多寺)는 천년 고찰이다. 신라 문성왕 때인 9세기경에 진감국사 혜소가 연악산 상봉에 흰 연꽃 한 송이가 피어 있는 것을 보고 그 아래에 절을 짓고 연화사(淵華寺)라 불렀다고 한다. 작년 여름 연악산을 오를 때 산 봉우리 위 하늘로 피어오르던 뭉게구름이 마치 한 송이 흰 연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고려 명종 때 각원이 중창하여 성암사(聖巖寺)가 되었고, 조선 선조 때 사명대사가 다시 수다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한때 대웅전, 극락전, 비로전, 나한전, 시왕전, 미륵전, 봉황루 등 전각과 스물네 개의 방사 등이 들어서 융성했었지만 지금은 대웅전, 명부전, 산신각과 요사채 등만 남아 단출하다. 수다사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의승(義僧) 일만여 명을 모아 호국 법회를 연 호국 도량이자, 영남 풍물의 모태요 전국 풍물의 씨앗이 된 삼백여 년 역사의 ‘무을 풍물(風物)’ 탄생지이기도 하다. 정월대보름 때면 뻣상모를 쓴 상쇠를 선두로 꽹과리, 징, 북, 장구를 든 건넛마을 풍물패가 온 동네를 집집마다 돌며 지신밟기를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대웅전을 지키는 본존불은 석가여래가 아니라 뭇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서원(誓願)을 세우고 깨달음을 얻은 자비심 가득한 이타행(利他行)의 부처, 곧 아미타불이다. 보물로 지정된 후불탱화 ‘영산회상도’를 배경으로 용좌(龍座) 위에 가부좌한 아미타불, 가늘게 뜬 눈에 단아한 코와 입, 원만한 얼굴과 법의를 걸친 넉넉한 양어깨에 인자함과 자비로움이 흐른다.

수다사 아미타불/원각사 대세지보살

상체를 앞으로 약간 구부린 자세는 상념에 잠긴 듯하고, 여느 사찰의 대웅전과는 달리 좌우 협시보살도 없이 홀로 앉아 있는 모습에서는 왠지 모를 외로움과 쓸쓸함이 묻어난다.
지난여름 휴가 때 이곳에서 삼십여 리 떨어진 선산의 비봉산에 올랐었다. 봉황의 형세를 닮았다는 그 산 정상에 올랐다가 오른쪽 날개 죽지격인 능선을 타고 내려선 산자락 끝에 작은 사찰 하나를 만났다.

순간 나도 모르게 ‘이 절이 바로 그 원각사!’ 라고 중얼거렸다. 오래도록 알 길 없던 수다사의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의 조성 연대와 경위가 1968년에 원각사(圓覺寺)의 원통전에 모셔져 있는 대세지보살상의 복장 유물이 발견되면서 밝혀졌다는 얘기를 알고 있던 터였다. 


"순치(順治) 육 년 구월 선산 서부 연악산 수다사에서 아미타불, 관음보살, 대세지보살을 조성했다."

 

바야흐로 백곡이 여물어가는 계절, 하늘은 높고 맑아 밤이면 꽃이 만발한 메밀밭처럼 별들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릴 듯 서로 다투어 빛났을 것이다. 불상 조각에는 수조각승 희장(熙藏)을 비롯한 당대의 이름난 조각승 여덟 명이 함께 참여했다고 한다. 아물지 않은 전란의 상처를 보듬으며 병자년의 치욕을 씻고자 절치부심 ‘북벌’을 벼르던 때, 삼존불 조성 불사에 쏟은 정성과 인근 백성들의 관심은 지극했을 것이다. 서쪽하늘에 뜬 개밥바라기별이 새벽 샛별이 될 때까지 끌과 정을 손에서 놓지 않고 이어갔을 불사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머리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어깨 높이로 든 오른손과 무릎 위에 놓은 왼손으로 연꽃을 미려한 원각사 대세지보살상이 떠올랐다. 몸을 앞으로 약간 구부린 그 모습은 영락없이 수다사 아미타불과 빼 닮았다. 일제 강점기인 1931년 근처 도리사의 주지 하정광 스님이 원각사를 개축했다고 하니, 그즈음 시대의 격랑에 휩쓸려 원각사로 옮겨을 것이다.


대세지보살상 이 홀로 지키고 있던 원각사 원통전에는 언제부터인가 삼존불이 정좌하고 있다. 어느 때인가 주존불과 관음보살상을 새로 조성해서 대세지보살상과 함께 봉안했을 것이다.  내력이 밝혀진 만큼 수다사에서 옮겨 온 대세지보살상은 본래 자리로 돌려보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란으로 가족과 생이별하고 청국으로 끌려간 수많은 백성, 죽지 못하고 돌아온 환향녀(還鄕女), 땔감을 지고 힘겹게 마을로 내려오는 초부(樵夫), 뽕잎이 한가득 든 망태기를 멘 아낙, 꿈을 좇아간 탄광촌에서 꽃상여에 실려 돌아온 순이 삼촌, 아리랑 열 두 고개보다 더 힘들었던 보릿고개,... 궁벽했던 벽촌 민초들의 삶은 고통스럽고 세월은 모질었을 이다.


370여 년 전 어느 가을날 이곳 수다사에서 함께 세상에 온 수다사 아미타불과 원각사 대세지보살, 그리고 행방을 알 수 없는 관음보살은 긴 세월 스스로 이산(離散)의 아픔을 안고 지금껏 삶에 지친 사람들을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따뜻이 품어주지 않았을까.


수다사 대웅전 앞에서 낯익은 아미타불을 다시 마주하고 섰다. 옅고 온화한 미소 뒤에 외로움과 쓸쓸함을 감춘 아미타불은 마치 내 마음을 헤아린 듯, "많이 힘들었지? 너무 아파하지 마라." 라며, 침묵으로 위로의 말을 건네고 있었다. 고향을 찾아올 때면 왜 이곳으로 발길을 옮기게 되는지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지금껏 수다사를 찾아 온 수많은 사람들은 아미타불 앞에서 늘 자신들의 아픔만을 토로하고 위로를 받고자 했을 것이다. 자신을 찾아온 이의 얘기를 귀담아 들으려는 듯 앞으로 조금 구부린 몸체와 쓸쓸함이 묻어있는 얼굴의 아미타불에 문득 측은지심이 느껴졌다. 그러면서 오랜 세월 뿔뿔이 흩어져 숱한 중생들을 위로했을 수다사 삼존불이 다시 한 자리에 나란히 모여 앉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날 한 시에 세상에 나온 수다사 아미타불, 원각사 대세지보살, 그리고 그 어디선가 자비로운 손길로 중생을 구제하고 있을 관음보살이 재회하고 한 자리에 함께할 그날이 언제쯤 올 수 있을까? 


아미타불을 위해 두 손을 가슴 앞으로 가지런히 올려 합장을 했다. 그 합장에 대세지보살과 관음보살의 환향(還鄕)을 기원하는 환향(還香)의 마음을 담았다. 바야흐로 가을이 밀물처럼 우리들 곁으로 다가오고 대웅전 뜨락의 은행나무들은 단풍 들 채비로 분주해 보인다. 발길을 돌려 일주문을 나서는 마음이 왠지 한결 가벼워진 듯한 느낌이다. 

* 환향(還香): 자기를 위하여 향을 피워 준 사람에게 향을 피워 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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