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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평양의 파라다이스 피지

기억의 창고를 들추다

by 꿈꾸는 시시포스


지난 설 연휴기간 중 인천공항 하루 평균 이용객은 21만 8978명으로 개항 이후 최대를 기록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1983년 1월 1일부터 제한적으로 관광 목적의 해외여행이 허용된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해외여행이 일상화되지 않은 시절, 홍콩이나 방콕 등은 환상 속의 나라로만 여겨졌었다.


십이 년 전 초겨울, 그보다 더 아득히 먼 남태평양의 섬나라, 파라다이스처럼 동경의 대상이던 피지를 방문할 기회가 찾아왔다. '엑스퍼트 미션(Expert Mission)' 제하 3일간의 교육프로그램 진행차 4박 5일의 출장에서 피지와 피지인의 일상의 단면을 틈틈이 엿볼 수 있었다.


피지는 남태평양의 멜라네시아 군도의 여러 섬나라 가운데 하나이다. 33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이 나라는 총면적 18,333 km² 경상북도 크기로 인구는 약 90만 명이다. 1643년 네덜란드 탐험가에 의해 서구에 알려진 후, 1874년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1970년 독립하여 영국연방의 일원이 되었다가, 1987년 10월 공화국 수립 선언 후 영국 연방을 탈퇴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피지 전경
나디 공항 입국장에서 여행객을 맞아주는 악사들
수바 항에 정박중인 선박들

일요일 오후, 인천공항 발 피지 행 K 항공편에 몸을 싣고, 열 시간가량의 비행 끝에 피지의 나디(Nadi)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나디 공항에 입국장 안에서 악사들이 기타와 우쿠렐레를 연주하며 여행객을 맞아준다. 옆 좌석에 앉았던 키리바티 국적으로 슬로바키아에서 활동하는 메리(Mary)라는 이름의 수녀와 작별인사를 하고 비행기에서 내려 짐을 찾았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국내선 대합실로 이동하여 44인승 터보플롭 Air Pacific에 탑승했다. 최종 목적지인 피지 섬의 동쪽에 위치한 수도 수바(Suva)의 나우소리( Nausori) 공항까지는 30여 분이 소요되었다.


반도인 나라에서 오는 손님이라 그랬는지, 주최 측은 '페닌슐라 인터내셔널'이라는 이름의 호텔에 우리 일행의 숙소를 잡아 놓았다. 룸은 널찍한데 냉장고는 비어 있고, 헤어드라이어 등도 구비되어 있지 않다. 짐을 푼 후에 환전을 하고 호텔 부근을 둘러보았다. 고층 건물은 찾아볼 수 없는 시내, 야자수 가로수가 줄지어 선 거리, 현지인들로 붐비는 야채 시장, 옅은 구름이 떠있는 코발트빛 하늘과 투명한 바다,... 일행 중 누군가 저녁 반주로 챙겨 온 소주를 꺼냈다. 긴 시간 비행의 여독을 풀고 숙면을 돕는 데는 알코올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다.


손님을 맞이 음료(welcome drink) 카바를 만드는 현지인


다음날, 프로그램 일정 후 저녁쯤에 주최 측에서 우리 일행을 위해 피지의 전통 손님맞이 세리머니인 카바(kava) 만들어 마시기를 한 시간가량 진행했다. 카바라는 식물의 뿌리를 빻아서 얇은 천에 담고 물을 부어서 맨손으로 걸러낸 후, '타노아(Tanoa)'라는 나무 그릇에 담긴 카바액을 손님과 주인이 번갈아 가며 한 잔씩 마시는 형식이다. 주객이 서로 마음을 트고 친근감을 돋우기에 이만한 의식도 없을 듯싶다. 진정작용, 마취 효과, 행복감 등의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 이 음료는, '씁쓸하다’는 뜻의 ‘카바(kava)’와는 달리 별다른 맛은 없지만, 세리머니 자체로 외지인에게는 특별한 경험이자 행복감에 젖어들기(도취되기)에 충분하지 싶다.


호텔과 교육장을 오갈 때, 차창 밖 길 가에 럭비 관련 광고판과 잔디밭에서 럭비 경기를 하는 모습이 간간이 눈에 띄곤 했다. 기실 럭비는 피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로 총 600여 개의 럭비 팀 있다고 한다. 특히, 2016 리우 올림픽과 2020 도쿄 올림픽의 7인제 럭비 2연패를 달성한 럭비 강국으로 세계 랭킹 1위에 올라 있다.

이처럼 럭비가 피지의 국민스포츠가 된 것은 럭비 종주국인 영국의 식민지배와 영연방 회원국이었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어떤 논문은 럭비가 식민 통치에 짓눌린 피지 부족 전사의 전통을 완벽하게 대체하여, 물리적 도덕적 가치를 표현하는 스포츠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피지에서 최고 인기 스포츠인 럭비
@photo: cathypacific.com etc.
뉴질랜드 올블랙스 팀의 하카(Haka)에 맞서, 피지 전통춤 시비(Cibi; 피지어로 '딤비')를 추는 피지 럭비 유니온 대표팀(플라잉 피지언)

신체적 접촉이 허용되는 럭비는 매우 난폭하고 격렬하지만, 심판을 존중하고 상대팀과 상대팀 관객을 배려하며, 선의의 경쟁을 펼치는 신사적 스포츠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럭비는 게임 종료를 '게임 오버(Game Over)' 대신 '노 사이드(No Side)'라고 한다. 게임 종료와 함께 팀 구분 없이 선수 모두가 하나이고 친구라는 의미로, 럭비의 핵심 가치를 담고 있다고 한다.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축구는 훌리건들이 하는 신사적인 스포츠이고, 럭비는 신사들이 하는 훌리건 스포츠이다."라고도 했다.


피지는 한국 시간보다 세 시간이 빠르다. 남반구라 한국과는 계절이 정반대로 여름이라 서머 타임제를 시행하여 한국과는 네 시간의 시차가 있다. 한국 시간으로 이른 새벽에 하루를 시작하는 격이라서 오후가 되면 피곤이 몰려온다. 둘째 날 일정을 마치고, 주최 측과 만찬을 가졌다.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를 멀찍이 앞두었지만, 이 즈음이면 식당 잡기가 만만찮다고 한다. 중식당은 흐름해 보였지만 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새우, 게, 생선 등 남태평양 청정 해역에서 건져 올렸을 해산물 특별한 맛이다.


마지막 날, 수바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나디로 가기 위해 시내를 거쳐 공항으로 향했다. 격일로 운항되는 귀국 항공편을 기다리며 나디에서 일박을 했다. 캠프파이어를 하고 있는 외지 젊은이들 한 무리 외엔 인적이 뜸한 해변은 쓸쓸해 보였지만, 인파로 북적이는 것보다는 오히려 더 낭만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디 거리의 카바를 파는 여인들
나디(Nadi) 해변

피지를 뒤로하며, 누부칼루 수로(Nubukalou Creek)에 낚싯줄을 드리운 채 수면을 응시하는 사람들, 길거리에서 야채나 카바를 파는 노점상들, 너른 잔디밭에서 럭비 놀이를 하는 젊은이들,... 눈에 스쳐간 이런 장면들이 떠올랐다. 그 위로 럭비 선수처럼 강인하고 듬직한 신사다운 풍모와 남태평양의 끝없는 바다처럼 온화한 친절과 미소를 잃지 않는 피지인의 얼굴이 오버랩되었다.


모리스 마테를링크(1862-1949)의 동화 <파랑새(L'Oiseau bleu)> 속 주인공 틸틸과 미틸 남매는 그토록 찾아 헤매던 파랑새가 자기 집에서 기르던 비둘기였음을 깨닫는다. 우리가 막연히 동경하던 파라다이스 피지, 아름다운 그 섬을 삶의 터전 삼아 사는 현지인들의 삶은 힘겹고 녹록지 않아 보였다. 어쩌면 우리가 찾아 헤매는 파라다이스는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곳 가까이 있는지도 모른다.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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