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프놈펜과 씨엠립, 물의 도시 사원의 도시

압살라 댄스를 추는 무희들

by 꿈꾸는 시시포스

월의 어느 맑은 아침, 인천공항을 출발해 베트남 호찌민을 경유, 프놈펜까지 이어지는 긴 여정에 올랐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가장 먼저 다가온 건, 마치 한국의 한적한 지방 소도시 공항에 내려선 듯한 소박함과 정겨운 공기였다.

비옥한 대지를 적시며 흐르는 메콩강, 톤레삽강, 바사크강 세 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프놈펜(Phnom Penh)은 예로부터 '물의 도시'로 불렸다. 창가에 비친 황톳빛 강줄기들이 마치 핏줄처럼 도시를 적시며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저 강들은 이 땅 사람들의 삶을 보듬고, 물길 따라 시장을 열고, 어부의 손에 은빛 물고기도 안겨 주는 풍요의 물줄기요 생명의 젖줄인 것이다.


호텔 차량에 몸을 싣고 좁은 도심을 지나 톤레삽강 위에 놓인 캄보디아-일본 우호의 다리를 건넜다. 아래로는 황톳빛 강물이 넘실거리며 메콩강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마치 금세라도 다리를 집어삼킬 듯 묵직하게 꿈틀대며 흐르는 물길이, 도시의 지난 역사를 대변하는 듯했다. 호텔에 짐을 풀고 시내로 나섰다.

저녁 무렵 왕궁 주변 강변은 더위를 피해 나온 사람들, 그리고 배낭을 멘 여행자들로 북적였다. 산책로에 앉아 담소를 나누거나, 작은 휴대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춤추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곳의 여유로운 정취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골목 안 게스트하우스 딸린 식당에서 망고 닭고기 카레 수프에 앙코르 맥주를 곁들인 저녁식사는 조촐했지만 특별히 느껴졌다. 싱겁지만 부드럽고 청량한 맥주 맛은 남국의 더위를 식히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 캄보디아 사람들이 이 맥주를 ‘늘 곁에 있는 친구’라 부른다는데, 그 말이 왜인지 쉽게 이해가 갔다.


고요하고 평화롭기만 해 보이는 이 도시는 긴 역사만큼이나 영광과 아픔을 함께 간직하고 있다. 14세기 작은 어촌에서 출발해, 앙코르가 빛을 잃은 뒤 15세기 캄보디아의 새로운 수도가 된 프놈펜. 태국과 베트남 사이에서 번갈아 짓밟히고, 프랑스 식민지를 거쳐 어렵사리 독립했으나, 1975년 집권한 폴 포트 정권이 저지른 끔찍한 학살과 폭력은 이 도시를 ‘킬링필드’로 만들었다. 오늘날의 평온한 풍경은 그 상처 위에 힘겹게 피어난 꽃 같다.

이튿날 저녁, 프놈펜 중앙시장에 들렀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 지어진 노란 돔의 아르데코 건물은 지금도 사람들로 가득하다. 보석과 시계, 옷가지와 향신료, 가짜 금목걸이들이 늘어선 시장 통로에서, 흥정을 하고 손바닥을 마주치며 웃는 짧은 순간이 이곳 사람들과 친구가 되는 시간 같았다.

다음날, 새벽 어스름 속에 작은 프로펠러 비행기에 몸을 싣고 프놈펜을 떠나 앙코르와트(Angkor Wat)가 있는 씨엠립(Siem Reap)으로 향했다. 비행기 날개 밑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평야와 구불구불 흐르는 강줄기가 장대한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저 너머 어딘가에, 수백 년을 묵묵히 버텨온 사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앙코르와트 사원

씨엠립 공항에서 만난 Sopeak은 순박한 미소를 가진 청년이었다. 그의 안내로 곧장 앙코르 유적 일일권을 발급받고, 본격적인 사원 순례에 나섰다. 씨엠립은 도시라기보단 느린 시골 마을 같았지만, 그 안에는 어디서도 만날 수 없는 장대한 시간이 숨어 있다. 앙코르 왕조의 유산, 압살라 전통 무용, 공예품 시장 등 풍부한 문화 콘텐츠 덕분에 '캄보디아의 문화 수도'로 불리는 것이다.

앙코르 유적은 9세기에서 15세기까지 크메르 왕국의 심장이었다. '왕도(Angkor)'의 '사원(Wat)'이라는 의미의 앙코르와트(Angkor Wat)는 12세기 크메르 제국이 힌두교 비슈누 신을 모시기 위해 지은 세계 최대의 사원 복합체였다. 훗날 불교 사원으로 바뀌었고, 현재는 국기에 그 문양을 넣어 캄보디아의 자존심이자 상징이 되고 있다.

무너져 내릴듯한 기둥, 거대한 나무뿌리에 엉긴 채 금이 간 문, 하늘 높이 놓인 계단 등 세월이 내려앉은 석조 건축물 하나하나 옛 숨결을 간직하고 있는 듯했다. 바이욘 사원의 사방을 바라보는 거대한 불상 얼굴들과 눈을 맞추고, 코끼리 테라스를 걸어 바푸온의 돌계단을 올랐다. 프레아칸의 쓸쓸한 회랑에서 부는 바람은 마치 옛 왕국의 탄식 같았다.

사원 내 벽면과 기둥, 사방으로 뻗은 회랑에는 수천 개의 압살라(Apsara) 부조를 비롯해, 인간과 신, 악마가 뒤엉켜 싸우는 장면들이 장대한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 코끼리와 마차, 궁수와 창병들이 빼곡히 새겨진 수백 미터에 달하는 부조는 힌두교 신화 속 전투를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생생히 그려내어, 보는 이를 압도한다.

점심은 사원과 사원 사이 숲길 가 허름한 식당에서 돼지고기 볶음과 밥을 시켰다. 앙코르 맥주를 곁에 두고 숲에서 들려오는 새소리와 함께 밥을 먹으니, 더 바랄 게 없었다. 그러다 어느새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굵은 열대성 소나기가 세상을 순식간에 뒤덮었다. 젖은 흙과 잎사귀 내음을 들이마시며 빗소리를 들었다. 스콜이 멈추고 나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높고 파랗게 열린 하늘에 뭉게구름이 피어오르는 풍경이 동화 속 한 장의 삽화처럼 아름답다.


저녁 무렵에는 씨엠립 올드 마켓을 찾았다. 야시장 특유의 불빛과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골목을 채웠다. 과일과 튀김, 허름한 티셔츠 가판대 사이에서 아이들이 조용히 내 팔을 잡아끌곤 했다.

압살라 춤 공연 관람은 씨엠립 투어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조명을 받은 무대 위, 금빛 장신구를 두르고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무희들이 팽팽히 긴장된 손끝과 발끝으로 천천히, 단호하면서도 느릿한 동작으로 무대를 채웠다.

왕을 위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요정, 압살라.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공연이 끝난 뒤, 일일투어 가이드에게 투어비 잔금을 건네며 팁을 쥐여 주니, 그는 두 손을 모아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늦은 밤 예정된 항공편의 출발이 지연되어 피곤에 절은 몸이 몹시 힘들어한다. 이제나저제나 하던 비행기가 활주로를 박차고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실내등이 꺼지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프놈펜과 앙코르왓트에서 마주했던 풍경과 순간들이 한여름 밤의 꿈처럼 마음속에 살며시 되살아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