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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감고래 Sep 24. 2020

처음, 그리고 이별을 담은 토란국


어느 날 그리 친하지 않던 친구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집에서 숙제 같이 할래?


갑작스러운 제안에 놀랐지만, 친구가 무안할까 봐 표정에 신경 쓰며 대답했다.

그래 좋아. 언제 갈까?


친구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후 6시면... 너무 늦니?


친구의 작아진 목소리가 걱정된 나는, 안심하란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엄마 허락받고 갈게.


친구의 표정이 밝아졌다.

너만 괜찮으면 우리 집에서 저녁도 같이 먹자. 엄마가 밥 차려 준댔어.


가을과 겨울의 중간쯤이었다.

열세 살의 아이들에겐 다소 늦은 약속이었다.


엄마는 내켜하지 않았지만, 끈질김 보챔으로 결국 승낙을 받았다.

그땐 그렇게 친구가 좋았다.




친구네 집은, 친구 부모님이 운영하는 식당 위층이었다.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고추장과 청국장이 뒤섞인 냄새가 났다.

친구는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냄새... 괜찮아?

응? 무슨 냄새?

계단 올라올 때 냄새나지 않았어?

어.. 잘 모르겠던데?


나의 기분을 살펴주는 친구의 배려가 고맙기도, 안쓰럽기도 했다.

내 말을 듣고 친구는 한시름 놓는 듯했다.

 

친구의 방에는 책상이 하나 있었는데,

둘이 같이 공부하기엔 비좁아 보였다.


결국 우리는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린 자세로, 책과 공책을 펼쳤다.  

아래층에서 끓이고 있는 국 때문인지 방의 온도가 유난히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숙제 아닌 수다로 친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

친구 어머니께서 저녁 밥상을 가지고 우리가 있던 방으로 들어오셨다.


우리 딸이 친구를 잘 안 부르는데.....


그래서였을까?

나를 바라보는 친구 어머니의 눈빛과 미소가 무척 자상해 보였다.  




밥상에는 하얗고 뽀얀 국이 있었다.

감자 같기도 하고 새알심 같기도 한 동그란 알이 들어 있었다.


그것이 ‘토란’이라고 했다.

쫀득하게 씹히는 것 같으면서도 미끄덩거리기도 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토란국을 먹었다.


친구의 어머니가 친구를 향해 말했다.

엄마 오늘 학교 가는 날인 거 알지? 늦게 올 거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친구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의 말에 따르면, 아주머니는 어릴 때 못 이룬 꿈을 위해 야학으로 공부를 한다고 했다.


친구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밤길, 나는 몇 가지가 새롭고 신기했다.

어른이 되어도 학교를 다니는구나......

늦은 밤에도 학교를 가는구나......

토란은 쫄깃하구나......




다음 날 아침,

어제의 추억을 공유한 친구와 나는

서로 더 반갑게 인사했다.


종이 울렸고,

곧 수업이 시작됐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교실문을 두드렸다.


잠시 교실을 나갔던 담임 선생님은,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잠시 나와보라고 했다.

친구가 선생님을 따라 복도로 나가자 교실이 술렁거렸다.


무슨 일일까.


몇 분이 흐르고 선생님이 돌아왔다.

하지만 친구는 돌아오지 않았다.


무슨 일일까.

 

교탁 앞에 잠시 서 계시던 선생님은

이윽고 입을 떼며 말했다.


친구의 어머니가... 어젯밤...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고......

......


머릿속이 하얘지고 주변의 모든 것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친구의 어머니...

어젯밤 나에게 토란국을 끓여주셨던... 친구의 어머니......


엄마의 상실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괴롭고 잔인한 고통이 아닐까.


엄마의 존재는, 아이가 살아가는 땅이고 터전인 까닭에,

아이들에게 닥친 갑작스러운 엄마와의 이별은, 세상의 전부를 잃은 끔찍한 재난과 마찬가지 아닐까.

 

나는 머릿속으로 몇 번씩 시간을 되돌렸다.

친구와 친구 어머니가 함께 앉아 밥을 먹던 그 시간, 그 날의 마지막 식탁으로.


엄마 오늘 학교 가는 날인 거 알지? 늦게 올 거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상상 속에서, 친구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나는 외쳤다.

아주머니, 오늘은 가지 마세요!... 제발요......




친구도 토란을 보면 엄마를 떠올릴까?


나에겐 단 한 번뿐인 친구 어머니의 밥상이었지만,

십삼 년 동안 엄마의 수많은 밥상을 마주했던 친구에겐, 그 날의 토란은 잊힌 기억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마지막 토란국만큼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인지도 모른다.


이별의 아픔과 슬픔의 크기는 추억의 양과 비례한다.

되돌아갈 더 이상의 과거가 없는 나의 아픔은 짧았지만,

친구에겐 엄마와의 오랜 기억만큼이나 감당해야 할 아픔이 길었다.


핼쑥해진 몸이, 창백해진 피부가, 누구와도 눈을 맞추지 않는 모습에서,

나는 친구의 아픔과 고통의 크기를 느낄 수 있었다.


친구와 함께 어머니의 마지막을 배웅했던 나는,

어떤 말로도 친구를 위로하지 못했다.




두 달 후,

초등학교 졸업을 한 달 앞두고

나는 전학을 가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학교에 갔던 날,

전날 밤 내린 눈으로 운동장이 온통 하얬다.


떠나는 나를 배웅하던 친구들 사이에서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던, 눈조차 마주치지 않던 친구가

내 이름을 부르며, 내가 걸어가고 있던 운동장으로 달려 나왔다.

 

친구는 말없이 나를 안고 울었다.

나도 울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동안 못했던 말을 모두 나눴다.


그림 by 공감고래




토란은 언제나 나에게 타임머신이 된다.

맛있는 토란국을 끓여주셨던 친구 어머니의 밥상에 둘러앉는다.

입가에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는 아주머니의 마지막 식탁을 떠올리며 생각한다.  


토란의 거친 표면을 맨손으로 다듬으면 가려움증이 생기는 것처럼,

때로는 과거의 상처가 다시 덧나서 우리를 괴롭히는 순간이 있다.


그러나 토란의 거칠고 단단한 껍질처럼,

삶이란... 상처를 극복하고 이겨낸 흔적들이 퇴적층처럼 쌓여서 이루어가는 것임을,

거칠지만 단단한, 위대한 산물인 것을.


 


하얗고 뽀얀 토란국 만드는 법


1. 토란의 껍질을 벗기고 썰 때, 알레르기가 생기지 않도록 반드시 장갑을 낀다.

2. 껍질을 벗겨낸 토란을 반나절 이상 물에 담가 둔다. 그 물은 모두 버린다.

3. 무를 도톰하게 썬다. 무의 양은 토란과 비슷한 그람으로 준비하면 된다.

4. 소고기는 적당한 크기로 썰고, 물에 담가 핏물을 빼준다.

5. 끓는 물에 소금을 넣고 토란을 데친다. 데친 물은 모두 버린다.

6. 끓는 다시마 육수에 준비한 무와 소고기를 넣고 끓인다. 이때 고기에서 생기는 거품을 모두 걷어낸다.

7. 소금, 국간장(또는 참치액)으로 간을 하고, 다진 마늘 약간, 토란을 넣는다.

8. 토란이 잘 익을 때까지 보글보글 끓여준다.

9. 토란이 익으면 마지막 간을 본다. 간이 부족한 경우 소금으로 맞추면 뽀얀 토란국 완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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