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감고래 Sep 19. 2020

할머니의 꿀

할머니가 꿀에 집착했던 것은 인생의 쓴맛을 잊고 싶었던 까닭이었는지도 모른다.


과거,

지금만큼 자유로울 수 없었던 한 여자의 일생은,

어떤 남자를 만나는가에 따라서, 아들을 낳을 수 있는가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할머니는,

불행하게도 식민지의 백성으로 태어나 가난과 수탈을 경험해야 했고,

설상가상으로 전쟁과 피난까지 겪어야만 했다.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은

어쩌면 그녀에게 비현실적 꿈이었다.


스스로 자신을 지킬 힘을 가져본 적 없던 그녀는,

자신을 지켜줄 것으로 믿었던 남편과 아들의 부재를 통해

인생이 더욱 막다른 곳에 이르는 것을 보면서도 손 쓸 수 없었다.


타인의 손에 내맡긴 인생을 살아오며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공허함을 느꼈던 그 날,

껍데기만 남은 것 같은 거친 살갗을 만지며 할머니는 쓴웃음을 지었다.


옛날부터 꿀이 들어간 음식은 약이라고 했다.


할머니의 역사를 알기 전,

할머니가 달달한 꿀을 무척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그녀의 삶을 위로하는 어떤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나 역시 생의 쓴맛을 경험하며 어른이 돼 버린 후였다.

 

할머니의 꿀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고자 애썼던 한 여인의

삶에 대한 간절한 욕망이었는지도 모른다.


꿀단지를 숟가락으로 떠먹으며

그녀가 손에서 꿀을 내려놓지 않았던 까닭,

삶을 포기하지 않은 한 여인의 강한 집념이었다.  


사랑하는 할머니 그리고
지친 당신에게 드리는 꿀차 레시피

* 첫 번째 꿀의 효능: 속을 따뜻하게 해 주어 편안하게 하고 기를 채워준다.

- 사랑하는 할머니: 꿀의 온기가 세상으로부터 차갑게 외면당한 당신의 삶을 따뜻하게 감싸 안아 주기를 바랍니다.

- 냉정한 세상에서 내면이 공허한 당신께 드리는 레시피: 생강을 담뿍 넣은 꿀차 한 잔 어떠세요?


* 두 번째 꿀의 효능: 거친 피부 장벽과 조직을 보호해 노화를 방지한다.

- 사랑하는 할머니: 꿀의 보호가 껍데기만 남은 것 같은 당신의 거친 살갗을 다시 회복시키고 당신의 두 볼에 생기를 가져다주기를 바라봅니다.

- 거친 인생을 통과하며 불안으로 잠 못 드는 당신께 드리는 레시피: 계피 가루를 뿌린 향긋한 꿀차 한 잔 어떠세요?

  

* 세 번째 꿀의 효능: 묵은 스트레스와 피로를 씻어내는 데 도움이 된다.

- 사랑하는 할머니: 꿀의 달콤함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처와 아픔을 잠시 당신의 기억에서 사라지도록 마법을 걸어주기를 바라봅니다.

- 스트레스 가득한 당신, 인생의 쓴맛을 느끼고 있는 당신께 드리는 레시피: 레몬을 넣은 달달한 꿀차 한 잔 어떠세요?


그림 by 공감고래





할머니가 방 곳곳에 흘린 꿀 때문에

할머니 방에는 개미가 많았다.


오늘은 누가 할머니랑 같이 잘래?

싫어. 난 엄마랑 잘래.

나도 싫어. 언니가 할머니랑 자.


매몰찬 거절.

꿀 때문이었다.

아니, 개미 때문이었다.


할머니가 지금 곁에 계실 수 있다면...

밤새워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함께 꿀차를 마시며 친구가 되어드리고 싶다.


이젠 만날 수 없는 할머니.

꿀차를 마실 때면.. 혼자 조용히 얘기한다.

할머니, 미안해요. 사랑해요.

이전 14화 당신을 닮은, 전복죽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