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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감고래 Sep 29. 2020

당신을 닮은, 전복죽

그와 헤어지기로 마음먹은 후,

몸이 다시 아팠다.


몸은 마음의 결정을 따르지 않는 걸까...

아니면 마음의 상태를 공감하기에 아픈 걸까...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미열과 메슥거림으로 정신이 아득했다.

전화벨이 울렸다. 그였다.

받지 않았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다.

혼자 있던 방의 정적을 깨고 다시 벨이 울렸다.

이번엔 전화가 아니었다. 현관에서 벨이 울리고 있었다.


그가,

문 밖에 서 있었다.


아직,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 만나기 어려울 것 같아. 몸이 안 좋아요.'

그에게 문자를 보내 놓고... 내 마음을, 그 사람을 회피하고 있었다.





그는 늘 같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다.


아침에 모닝콜을 하기로 약속한 후,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었다.

잠들기 전에는 어김없이 전화가 왔는데, 전화하기 힘든 상황일 땐 문자를 보냈다.


식당도 자주 가던 곳, 늘 앉던 자리에 앉았다.

그는 세 살 적부터 살았다는 집에서 삼십 년 동안이나 살고 있었다.


반대로, 나는 셀 수 없이 여러 번 이사를 했다.

삼 년이란 시간은 내가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데 충분한 이유일 수 있었다.


자신의 모든 선택이 오로지 자기 자신으로부터 결정되지는 않는다.

나이가 어릴수록 더 그렇다. 부모로 인해, 사회문화적 환경으로 인해,

우리는 선택을 강요받기도, 나의 뜻과 상관없이 모든 것이 정해진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여하튼 많은 선택의 차이, 환경과 문화의 차이가

결국 한 인간에게는 성격의 차이를 만든다.  


그와 나의 성격은 정반대였다.


그는 말이 별로 없었지만, 나는 말하기를 좋아했다.

그의 첫마디는 나의 안부를 묻는 것이었고, 주로 내 이야기를 들었다.

이따금 중요한 결정이나 고민이 있을 때에만 그는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성격의 차이는 이따금 오해를 낳았다.


그의 진지함과 조심스러움이

나를 위한 배려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그를 위한 자기 방어처럼 느껴질 때면 자존심이 상했다.


나는 확실한 싸인을 원했다.

평범한 일상 같은 만남이 아닌 설레는 데이트를 바랐다.

그리고 공식적이고 분명한 고백을 기다렸다.


그는 마음은 통한다고 생각했다.

일상처럼 함께하는 모든 순간으로 충분하다 생각했다.

사랑은 오랜 시간으로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를 왜 만나요?

(어리둥절한 표정)

우리 사귀는 거 맞아요?

(웃는다), (고개를 끄덕인다)


이런 대화의 끝은 언제나 원점으로 돌아왔다.

우리 관계에 대한 나의 불평과 쓴소리는

그의 얼굴을 보면 언제나 말이 막혔다.




문을 열자,

그가 현관으로 들어왔다.


바람을 뚫고 왔는지,

평소 단정하던 머리칼이 흩날려 있었다.


많이 아파?

응.. 컨디션이 안 좋네.. 어떻게 왔어?  

이거.. 먹어봐.


그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나에게 내밀며 말했다.

전복죽이야.


내가 사는 동네에 죽 파는 가게가 보이질 않아,

가게를 찾느라 오랜 시간 거리를 헤맸다고 덧붙였다.  


그는 잘 쉬라는 말을 남기고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내 속 타는 마음은 모른 채...


그와 헤어지기로 마음먹은 것과 상관없이,

우리 관계도 원위치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가 남기고 간 전복죽을 먹으며...

헛헛한 속을 위로했다.




성격의 차이는 관계의 오해를 빚는다.

그러나 관점을 넓혀 자신의 경계를 넘어서게 되면,

너와의 관계에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성격 차이만큼이나, 그와 나는 관점이 달랐다.

그의 관점은 우리의 미래에 두고 있었기에, 그는 긴 호흡으로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나의 관점은 현재(here and now)에 머물고 있었기에, 난 오감으로 느끼고 경험하기를 원했다.


그에게는 여유로움이, 나의 관점에선 모호함, 답답함이었다.

상대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나의 자연스러운 마음이,

그에게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괜찮은 자연스러움이었다.

 

그날,

그에게 문자를 보내고 그로부터 도망치려 했던 날,


혹시 그가 눈치챘던 것일까?

그래서 전복죽을 사 가지고 부랴부랴 내게로 왔던 것일까?...

아니.. 아녔을 것이다. 그는 몰랐던 것 같다.


그날,

그가 건넨 전복죽을 먹으며

보이지 않던 그의 마음이 조금은 선명하게 들어온 탓이었을까?...

늦은 밤 기력을 회복한 나는, 문자를 보냈다.


전복죽, 고마워.

응.. 얼른 자.


휴. 안도의 한숨.

나의 것이었을까.

그의 것이었을까.




명절을 앞두고,

여러 인터넷 쇼핑몰에서 재빠르게 할인 상품들을 내놓았다.


전복 다섯 개를 만원에 판매한다는 팝업 광고를 봤다.

무심결에 클릭해 싱싱해 보이는 전복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새벽 배송으로 집 앞에 도착한 전복을 보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이걸로 뭘 해 먹지?......


아무도 나무라지 않았는데도,

스스로에게 충동구매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환절기 기력도 보충할 겸... 그래 싸게 잘 산거야!


전복 손질법 알아?

아니.

전복을 껍질에서 떼어낼 때 내장이 상하면 안돼.

내장? (괜히 끔찍했다!)

그리고 이빨도 잘라줘야 해.

이빨도 있어? (오 마이 갓!!!)


남편과의 대화 끝에,

전복 손질은 남편의 몫이 되었다.


퇴근 후,

나보다 먼저 도착한 남편이 주방에서 전복을 손질하고 있었다.

식탁 위에 놓인 남편의 핸드폰에선, ‘전복 손질법’ 유튜브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나와의 약속을 잊지 않고,

주방에서 전복을 다듬고 있는 그를 보면서

십 년 전, 그가 사다 주었던 전복죽이 생각났다.


그때는 그의 예측 가능함이, 길고 긴 호흡이 왠지 모르게 힘들었다.

결혼하고 바뀐 것이 있다면, 나 역시 긴 호흡을 가지고 그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가 한결같은 자리에 있어주는 것이 고마웠다.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은, 그 사람과 추억이 담긴 음식을 닮는다.


 

그는 전복죽처럼,

속을 따뜻하고 편안하게 해주는 사람이다.


비법 소스, 화려한 부재료 따윈 들어있지 않지만,

전복 그 자체만으로 충분한 가치를 갖는다.


육류의 기름진 맛은 아니더라도,

전복의 삼삼함으로 깊게 우려낸 바다향이 진국 같은 사람이다.


전복죽은... 조리법이 단순하고 쉬워 보여도,

시간을 넣어야 맛이 난다.  


당신의 사랑이 나에게 편안한 이유도

정성껏 시간이 들어간 까닭이다.  


그에 대한 고마움이 번지는 저녁,

긴 호흡으로 전복죽을 끓인다.




그림 by 공감고래



긴 호흡으로 만드는 전복죽 레시피


0. 전복을 손질하여 살과 내장을 따로 떼어 구분한다. 손질하는 방법은 유튜브 영상으로 검색 :)

    (전복의 식도에는 독성이 있다고 한다. 잘 제거하여 준비한다.)


1. 찹쌀(또는 맵쌀) 두 컵(종이컵 기준) 분량을 물에 불린다.

2. 다시마 육수를 1~1.5리터 정도 만든다.

3. 불린 찹쌀을 참기름을 넉넉히 두른 냄비에서 중간 불로 충분히 볶는다.

4. 전복 내장을 냄비에 넣고 주걱을 이용하여 잘 으깨가며 볶는다. 불을 살짝 더 줄여도 괜찮다.

5. 내장이 충분히 고루 익어가며 찹쌀과 함께 뒤섞이면, 다시마 육수를 조금씩 부어가며 끓인다.

    육수는 한 번에 다 붓지 않도록 하고, 여러 번 나누어 넣는다.

6. 긴 호흡으로 중약불에서 이따금 저어가며 끓인다. (최소 20분 이상 소요된다.)

7. 마지막 육수를 넣을 때, 도톰하게 썰어놓은 전복살을 함께 넣는다.

8. 쌀알이 퍼지고 죽의 농도가 원하는 만큼 걸쭉해지면 불을 끈다. 

9. 냄비 뚜껑을 닫고 약 3분 정도 뜸을 들인다.

10. 그릇에 담고, 깨, 부추, 김가루 등을 잘게 썰어 고명으로 올려도 좋다. 

- 깊은 맛을 음미하며 긴 호흡으로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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