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_진통제에 대한 오해
마취가 풀리기 시작하자 엄청난 고통이 몰려왔다. 하지만 나는 금요일 거의 마지막 수술이었고, 나를 담당했던 의사는 퇴근을 하였기 때문에 마약성 진통제 처방을 허용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진통제도 없이 수술 후 찾아온 고통을 그다음 날 아침까지 버텨야 했다. 고통을 억지로 참느라고 눈에 압력이 너무 강해져 완전히 빨개졌었다.
약이 눈앞에 있음에도 받을 수가 없는 의사의 처방권한의 함정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여러 후유증을 남긴데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인 것 같다. 우리 몸은 심한 통증을 느끼면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이를 무조건 참을 경우 스트레스로 인한 악영향이 진통제의 위험성 보다 클 수 있다.
나는 내가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수술을 일찍 받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가인가라는 생각도 했었던 것 같다.
다음날 수술 결과를 보러 또 엑스레이 촬영을 하러 가야 했는데, 너무 기진 맥진해서 휠체어를 타고 가야만 했다.
수술 이후 치료과정에서 통증의 강도가 서서히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큰 통증과 작은 통증이 번갈아 오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진통제를 잘 처방해줘야 하는데, 우리는 진통제에 대한 오해가 너무 많다.
무조건 안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무조건 참으려고 할 경우 운동능력 저하와 같은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나는 후유증으로 만성적인 어깨 근육 통증이 있다. 수술 후에 조금만 움직여도 너무 아프니 경직된 자세로 있었던 것이 수술 부위가 회복하면서 이상하게 굳어졌거나 염증이 생긴 것 같다.
내게 정신적으로 큰 스트레스를 준 것은 작은 스테이플러이다.
첫 시술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몸에 물통을 달고 있었는데, 물통의 호스를 뺀 구멍을 스테이플러를 찍어서 막았다.
나는 의료행위의 신속성을 위해 사람 몸에 스테이플러를 찍는 행위를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본드 등 다른 선택지가 있었을 텐데, 울면서 다른 방법이 없냐고 해도 마취도 없이 여린 옆구리 살에 스테이플러를 박는 것은 충격적이었다.
이런 수술을 한 지 1주일도 안되었을 때, 고등학교 교감 선생님은 나를 복단대학교 학교장추천 면접전형으로 접수를 해주셨고, 복단대학교에 면접을 온라인으로 볼 수 없겠느냐고 부탁했지만, 거절을 당했다.
그래도 내게 복단대학교 시험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것에 감사했고, 나는 이 모든 것을 신이 준비했다고 생각했다.
옆에도 엄마가 계속 말했고, 나도 4년 동안 폐쇄된 기독교 학교에서 지냈기 때문에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몸의 회복도 하지 못한 채 나는 또다시 비행기를 타고 상하이로 이동했다. 좁은 이코노미석을 타고 가는 상하이행 비행은 너무 고통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