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살림을 어떻게 하는 거야
우리는 말레이시아에 수건 14장을 갖고 왔다.
2명이 각각 하루에 1장씩 쓰면 일주일을 쓸 수 있는 양이다.
이렇게 되면 수건 빨래는 일주일에 한 번만 하면 된다.
이건 우리가 한국에 있을 때에도 유지하던 집안일 루틴이었는데,
빨래는 토요일 아침에 하기 때문에 속옷, 수건은 7일 이상을 넉넉히 버틸 수 있게 준비되어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한국에서는 한 명이 하루에 수건 2장(아침 1장, 저녁 1장)을 썼는데,
말레이시아에서는 모든 걸 한국처럼 맞출 수 없으니 하루에 수건을 1장씩만 쓰기로 한 점이었다.
초기에 머물렀던 호텔 숙소에서는 매일 수건을 새로 갈아줘서 한국에서 갖고 온 수건을 쓸 일이 없었다.
장기 숙소로 오고 나서야 한국 수건을 꺼내어 놓게 되었는데,
어느새 까맣게 초기 전략(1장/1일)을 잊고, 한국에서와 똑같이 한 사람이 2장씩 수건을 썼다. 둘 다 아무런 인지도 하지 못한 채.
그래서 그 일은 새 숙소로 온 지 약 3일만에 발생했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 샤워를 하려고 하는데, 수건이 없는 것이었다.
- 오빠, 왜 수건이 없어?
- 어, 수건 다 썼더라. 빨아야 돼.
- ???
빨아야 돼?
화가 솟구쳤다.
왜 화가 솟구쳤을까?
내 생각은 이러했다.
첫째, 빨아야 된다고 의연하게 말하는 것을 보니 수건이 이미 동이 나서 빨아야 한다는 상황임을 그는 인지하고 있었고,
둘째, 언제 인지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가 퇴근전에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하여 볼 때, 하루 종일 집에 있는 그는 빨래를 할 시간이 분명히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고,
셋째, 그로 인해 하루 종일 일하고 온 나는 수건도 없이 샤워를 해야 하는 곤경에 빠진 것이었다.
여기서의 핵심은 '하루 종일 집에 있는 그'와 '하루종일 일하는 나'에 있다.
사실 어제 쓰던 수건으로 샤워를 하는 것 쯤은 별 일이 아니다.
다만 나에게는 없는 자유를 탱자탱자 누리면서
본인의 업무인 빨래를 제대로 해 놓지 않는 것에 대한 분노, 질투, 실망, 막막함이 밀려온 것이다.
빨래 하나에 많은 감정이 들어간다.
빨래를 안 해놨어? (분노) 나는 하루종일 일 하고 왔는데 본인은 집에만 있었으면서 (질투) 빨래를 어떻게 안 해 놓을수가 있지? 이거 하나 제대로 안 해놓는데 (실망) 앞으로 같이 살 수 있겠어? (막막함)
글로 써 놓으니 치부라는 생각도 들지만, 실제로 내 생각은 이렇게 흘러간다.
작은 일이 큰 일이 되고 쉽게 화가 난다.
다행인건 내가 이 감정을 다 적나라하게 상대방에게 표출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 아니, 그럼 빨리 빨래를 해야 될 것 같은데...
- 어어, 내일 할게, 오늘은 그냥 쓰던 거 써.
- ... (샤워하러 감)
물론 말로 표출하지 않아도, 상대방은 안다. 내가 화가 났고, 왜 화가 났는지.
같이 지내온 세월이 짧지 않아서 외마디 대답에도 감정을 읽는다.
수건 빨래가 되어있지 않은 것을 보고 퍼뜩 화부터 난 것은 기분 나쁜 경험이었다.
둘 다 맞벌이를 할 때에는 이런 걸로 화가 나지 않았다.
지금은 빨래가 오빠 일인데 제대로 하지 않으니까 화가 나는 것이었는데,
나도 회사에서 일을 제대로 못할 때도 있듯, 집안일이라고 어떻게 완벽할 수 있나 싶다.
그리고 집안일도 '업무'라면, 집에 있는 24시간 계속되는 일일텐데, 그걸 외벌이라고 전업주부가 다 하는 것도 말이 안되기도 하고..
*다만 전업주부와 외벌이의 집안일 분담에 대해 할 말이 있는데, 이건 나중에 다른 편으로 기술해보기로 한다.
무엇보다 한국집에는 수건이 많았다.
그렇다, 한국집에는 수건이 정말 많았다.
수건이 부족해지는 게 싫어서 빨래주기는 일주일이지만,
이주일은 빨래를 못 해도 괜찮을 정도의 넉넉한 수건이 있었다.
우리는 그 이후에 수건을 14개만 가져오자고 했던게 너였느니 나였느니 하며 의미 없는 논쟁을 이어가다가 수건을 14개 더 구입하는 것으로 일치단결을 이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