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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가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을 불러 본 이유

패, 경, 옥 이런 이국소녀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루.

by 열무

물론 지금 나의 현 상황에 윤동주가 그 이름들을 소리 내어 부른 까닭을 빗대는 것이 조금은 민망하지만, 굳이 한국소설을 읽고 있는 김에 아련함을 한 스푼 보태어, 어슴푸레 그 마음이 어떤 것이었을지 나의 마음을 톱아보며 따라가보고자 한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 전형적인 한국 영어 교육을 받고 자란 나는,

그래도 아예 언어 감이 없지는 않은 덕에 지금 타국에서 일을 하고 있다.

다만 내가 하는 말은 대개 업무를 처리하기 위한 말 -

즉, 이 부분은 내가 처리하기 어렵고, 이것까지는 내가 흔쾌히 처리할 수 있으며,

정확한 미팅 일정을 확인하고 명확한 의사표현을 하는 정도의 수준인데,


한가지 예를 들어 말하자면,

최근 대통령이 탄핵되고 진보 진영에서 새 대통령이 선출됐으며, 그의 기조에 따라 우리나라의 대외 정책에도 약간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는 정도의 사실 전달을 하면서,

그래, 이 정도면 꽤 잘 말했군- 하며 자위하는 정도랄까.


그래서 문득 여기서 읽게 된 양귀자 작가의 원미동 소설을 읽으면서, 한글자 한글자 또박또박 소리내어 읽은 그 한글의 맛은 최근 그 어떤 경험보다 더 큰 쾌감을 주었던 것이다.

아래는 내가 곱씹어 읽은 부분의 발췌본이다.


그것보다는 봄가뭄에 시들어가는 밭작물이 더 걱정되는 그였다. 고추 모종을 내고 나서 연약한 줄기를 지탱해주느라고 개나리 가지를 꺾어 젓가락만한 크기로 꽂아두었더니 고춧잎은 그만한데 꽂아둔 가지마다에 노란 개나리 꽃잎이 손톱만큼씩 돋아나 있었다. 이른 봄의 아욱국 맛이 좋아서 한 고랑에다 비닐 씌워 아욱을 키워봤더니 봄가뭄 속에서도 푸르게 잎이 올라 강노인은 비닐에 구멍을 내주면서 그 여리디여린 이파리에 손을 대보았다. 내다 팔 것은 못 되고 아들네 집으로 해서 두루 나누어 먹으면 그뿐, 뽑아낸 뒤에 이 고랑에는 다시 상추와 쑥갓씨를 뿌려서 두고두고 솎아 먹으면 좋을 것이었다. 그래서 이 자리에는 짚 썩힌 거름이나 넉넉히 넣어두었을 뿐, 인분은 뿌리지 않았다. 깔끔한 성미의 둘째며느리는 똥구덩이 위에 심은 호박은 잎사귀는 물론 늙은 열매까지도 손내지 않는 것을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고춧잎, 개나리, 쑥갓씨, 아욱국, 호박, 이런 아름다운 이름들을 소리내어 음미해 본다. 외국에 나와 발견한 새로운 즐거움이다.


가끔 언어의 감옥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퍼뜩 생각이 떠올랐다고 할 때에 suddenly를 쓰고 싶지 않고,

너 오늘 해사하다고 말 할 때에 bright를 쓰고 싶진 않은데,

그게 나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의 전부라니 그 빈약함에 답답함을 느낀다.

(아- 영어공부를 더 열심히 할 생각은 없다...)


그래도 가끔은 비언어적 요소로 상대방에게 나의 진심이 전달될 때도 있을진데-

여기서도 영어로 말하게 된다면 나는 어쩔 수 없이 있을진데-를 있는데-로 바꿀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예전에 어떤 수필 중에,

'저벅거리다' 와 '질벅거리다*' 는 다른 말이고, '질벅거리다*'라는 단어를 모르는 사람은 그렇게 걷는 사람을 볼 수 없다라고 하며- 내가 구사하는 언어에 따라 내가 보고 인식하는 것이 제한될 수 있다고 말한 글이 기억이 난다.

*질벅거리다는 생각이 안 나서 내가 그냥 써놓은 말. 원문이 아님.


혹시 이 글이 닿아 여기까지 읽게 되신 분들 중에 저런 구절을 읽어보신 분이 있을까요..? (급 질문)


사실 저 위의 '질벅거리다*'는 내가 생각이 잘 안 나서 비슷하게 쓴 말인데,

저 구절을 다시 읽고 싶은데 정확한 단어가 기억이 안 나서 도대체가 검색이 안된다.

내 부하* 지피티도 찾아주지 못했다..

*내가 언제 그의 부하로 전락할지 모르므로 될 수 있을 때에 부하로 삼아보기로 한다.



언어의 감옥을 나가진 못하겠으나, 그 평수를 조금은 늘릴 수 있을까?

한글과 영어가 만나는 그 지점 어딘가에 새로운 차원의 감옥이 나올 수 있을까?

어쩌면 감옥이 아니라 그저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일 뿐인데,

넓은 한글의 세상에서 좁은 영어의 세상으로 오니 내가 그것을 감옥이라 칭하는 것일까?


감옥이 아니라 세상이라면,

다른 사람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노오란 개나리도 피고 푸르른 아욱도 자라,

봄이면 아욱국을 보글보글 끓여 먹을 수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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