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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치 모아둔 명함을 정리했습니다

'잘 지내시지요? 그간 안부와 새해 인사를 전합니다.'

by 우드코디BJ

새해 첫날이면 일출 명소마다 인파가 북적이며 들뜬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작년 1월 1일, 일출을 보러 상암동 하늘공원에 올랐습니다. 아직 컴컴한 정상에 사람들이 모여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습니다. 추위에 잔뜩 목을 웅크리고 있던 찰나 누군가 외칩니다. "뜬다 떠!' 동이 트기 시작하자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소원을 비는 사람들이 눈에 띕니다. 주위가 점점 훤하게 밝아지면서 뜨는 해를 지긋이 바라보는 이들의 환한 표정도 보입니다.


2025년 새해는 작년 이맘때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입니다. 어느 한 해가 다사다난하지 않았을까만은 그래도 지난해는 우리는 시름이 깊었습니다. 날씨보다 경기에 더 한파가 몰아치는 와중에 국정 운영은 큰 소동을 빚었고, 무안에서 들려온 가슴 아픈 소식에 연말연시도 추모 분위기 속에서 무겁게 흘렀습니다. 굵직굵직한 대기업들도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이어가는 마당에 작은 기업들은 오죽할까 생각이 듭니다. '폐업한 자영업자 100만 명 육박. 내년 더 어렵다"라는 기사 제목에 마음이 영 편치 않습니다.


지난여름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어떤 치킨집에서 매일 인스타에 올리는 것. JPG’라는 게시글이 올랐습니다. 보통 치킨집 SNS(사회관계망서비스)라고 하면 신메뉴나 이벤트 홍보 게시물이 올라오는 게 대부분인데, 전남 광주의 이 프랜차이즈 치킨집 사장님은 매일 장사를 마치고 닭 튀긴 기름통을 깨끗이 씻어 사진을 찍고 인스타그램에 올렸습니다. 이 사진이 온라인상에 퍼지며 청결 상태가 신뢰 간다는 반응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깨끗한 치킨집'으로 입소문을 타 멀리서도 찾아올 정도로 장사가 잘돼, 재료 소진으로 일찍 문 닫는 날도 많았다고 합니다.




회사 컴퓨터에는 목재가 사용된 현장사진이 지역별로 저장되어 있다


경력직으로 입사했던 2008년, 회사 컴퓨터에는 목제품이 설치된 공사현장을 찍어놓은 사진들이 대략 9천 장 넘게 저장되어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신문, 잡지나 인터넷에서도 목재가 쓰인 사진 보기가 힘든 때라, 회사에 방문한 손님과 상담할 때 이 사진들이 아주 쓸모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화 상담은 이야기가 조금 다릅니다. 통화하다 일단 끊고, 사진을 골라 이메일로 보내고, 다시 전화를 걸어 상담을 이어가는 식이라 번거롭기 짝이 없습니다.


회사 컴퓨터에는 다양한 용도로 목재가 사용된 사진이 저장되어 있다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궁리하던 차에 블로그를 알게 됩니다. 블로그는 사진이나 동영상과 더불어 글을 자유롭게 쓴 웹페이지를 온라인에 저장해 둘 수 있는 SNS입니다. '옳거니, 목재가 사용된 사진을 올리고 글로 설명을 덧붙여 블로그 게시물로 만들면 이래저래 요긴하게 써먹겠구나.' 그렇게 블로그에 '블'字도 모르던 30대 중반 직장인의 좌충우돌 글쓰기가 시작됩니다.


회사 컴퓨터에는 목재가 사용된 현장사진이 9천 장 이상 저장되어 있다


고객의 궁금증에 답이 되는 블로그 글이 많아질수록 목재 상담이 수월해졌습니다. 업무 과정을 기록해 두니 상사에게 업무 보고할 일도, 후배들에게 따로 직무교육할 필요도 줄었습니다. 그 사이 스마트폰이 빠르게 대중화되었습니다. 고객 문의가 오면 먼저 도움이 될 만한 블로그 글을 찾아 카카오톡으로 보냅니다. 정보를 주고받는 방식이 바뀌니 예전 같으면 두세 번은 만나야 될 일이 한 번 정도로 줄었습니다.


회사 명함 뒷면에는 포트폴리오 등을 소개하는 QR코드가 있다


해외 출장을 가면 카탈로그를 건네는 대신 회사를 소개하는 내용을 담은 블로그 글을 보여주었습니다. 블로그에 올려둔 업무 관련 사진들은 서로가 국적을 가리지 않고 소통할 수 있는 발판이 돼 주었습니다. 2주 전 공장으로 찾아온 남미 페루 목재회사 관계자들은 건네준 명함에 QR코드를 찍더니 구글 번역 기능을 써서 블로그 게시글까지 다 읽어 보더군요. 참 편리한 세상입니다.




2019년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세상을 휩쓸기 시작했습니다. 팬데믹이 무엇인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회사는 두 가지 큰 위기에 맞았습니다. 먼저 업무가 마비됐습니다. 간단 업무는 통화나 메시지로 처리했지만, 복잡한 프로젝트는 회의 없이 진행하기 어려웠습니다. 몇 개월 갈팡질팡하는 사이 동료들이 하나둘씩 SNS에 업무 내용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일기 처음 써보는 아이들의 글처럼 쑥스럽고, 쭈뼛쭈뼛한 느낌이 물씬합니다. 그래도 일은 해야 하니 다들 꾸역꾸역 씁니다.


영업팀장 우드코디HB의 블로그


몇 년이 흘렀습니다. 저마다 자신의 업무를 SNS에 올리니 예전에 비해 대면 회의는 줄었지만, 업무 소통은 오히려 질박해졌습니다. 새카만 결재 화일철 대신 개성껏 꾸민 동료들의 SNS 화면이 정감 있고, A4라는 크기 제약 없이 마음껏 올린 사진과 동영상을 보면 글쓴이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입체적으로 다가옵니다. 펜을 들어 결재란에 서명하는 대신 '좋아요' 버튼을 누르고, 피드백은 게시물 아래 댓글로 답니다.


관리부 대리 우드코디EK 블로그


방문객이 공장을 셀프 투어할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우드코디KW는 오늘도 목재에 붙일 QR코드와 매칭할 온라인 콘텐츠를 만듭니다. 관리행정업무를 담당하는 우드코디EK는 '김대리의 재직증명서'라는 블로그를 운영합니다. 요즘 대관업무가 많아 글 한 줄 올리지 못하는 날이 길어지고 있네요. 최근 명함을 새로 판 공장장은 구독자 수가 늘지 않는다며 주름이 깊어진 듯 보입니다.



영업파트로 부서를 옮긴 우드코디SH는 공부하는 목재를 수종별로 정리해서 매주 목요일마다 본인 블로그에 연재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자기는 목재 상담기를 연재하겠다던 영업팀장 우드코디HB는 말로는 쉬운데 막상 쓰기가 어렵다는 푸념을 요즘 입에 달고 삽니다. 그 마음 저도 잘 압니다. 지금껏 10년 넘게 블로그에 업무 관련 글을 썼지만 늘 부족한 글솜씨가 아쉬울 따름입니다.




코로나19는 직원 간 소통뿐 아니라 방문객과의 왕래도 끊어놓았습니다. 코로나19 이전에는 건축 내외장재로 쓸 목재를 알아보려 오는 분들뿐 아니라, 칼 손잡이 만들 나무 구하려 오는 취미 목공(木工) 분들도 자주 공장 문턱을 드나들었습니다. 가구 제작자가 주문자와 함께 들려 목재 수종을 고르기도 하고, 건축 관련 전공 학생들이 견학을 오기도 합니다. 가게 오픈을 준비 중인 사장님이 인테리어 도면을 들고 오고, 데크길 조성 공사 담당 공무원 분들이 목재 설명 들으러 올 때도 있습니다.


2017년 대수선 공사 시작 당시 본관사무동 전경


그러다 2017년 덕은동 공장부지가 국가에 수용되며 공장 이전이 시작됩니다. 이전할 김포 부지에는 허물 수도 없는 낡고 오래된 공장이 있었습니다. 결국 대수선공사와 생산설비 및 목자재 이전을 병행하느라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사가 마무리되던 그 해 12월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됐습니다. 회사 안은 그야말로 망연자실한 분위기였습니다. 멈춰 선 시간 동안 계속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터라 하나둘씩 정리를 시작합니다. 집기도, 비품도, 자재도, 기계설비도. 거의 이삼십 년 분량에 달하는 고객 명함 정리도.


2019년 말 대수선 공사를 마친 본관사무동 전경


명함 정리를 마치고 보니 이메일 주소가 남았습니다. 못쓰는 글이라도 누가 볼지 모르는 SNS에 계속 쓰다 보니 없던 용기가 생겼나 봅니다. 그래서 그간의 안부를 담아 이렇게 연하장을 띄웁니다. 지나는 길 있으면 들려서 차 한잔하고 가셔요. 뵌 적 있는 식구라면 반가이 맞이해 드릴 거고, 처음 만난 식구라면 반갑게 인사드릴게요. 때때로 목재소 사람들 사는 이야기를 안부 삼아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말입니다

해마다 이맘때쯤 텅 빈 가슴을

또 드러내어도 내년에는

더 나을 것 같은 마음이 드는데 어쩝니까?


오광수 시인이 쓴 <12월의 독백>에 나오는 시구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을사년(乙巳年) 새해에는 우리 모두에게 '더 나은' 세상이 열리면 좋겠습니다. 2025년 내내 좋은 일 많으시길 두 손 모아 기원합니다.



유림목재&데일리포레스트 연구기획실장 우드코디BJ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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