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태세문단세'로 20년을 보낸 당신, 기업은 그 증명서를 찢었다
프롤로그
"AI가 일자리를 대신한다는데, 그럼 앞으로 나는 뭐 해 먹고살아야 하나?"
취업준비생, 직장인, 정년을 앞둔 이들까지 모두를 관통하는 이 질문은 사실상 "어떤 인재가 되어야 하나"라는 더 근본적인 물음으로 환원된다. 2025년 현재, 그 질문은 단순한 진로 고민을 넘어 문명사적 전환의 신호가 되어 있다. 이 질문은 더 이상 청년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 전체가 방향을 잃은 시대의 집단 자문이다.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정답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디렉팅이 아니라 멘토링이다.
정답 중심 교육이라는 유산
지난 수십 년간 한국의 학교는 한 가지 일에만 최적화되어 있었다. '정답을 빨리 맞히는 능력'을 키워내는 것이었다. 초중고를 거쳐 대학에 이르기까지, 학생들은 객관식 문제를 풀고 주관식 정답을 암기해 시험지에 '출력'하는 훈련을 반복했다.
이 체계는 우연이 아니다. 19세기 산업혁명기 유럽에서 만들어진 학교 제도를 일본을 통해 도입받은 한국은,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산업화·공업화 시기에 이를 완벽하게 정착시켰다. 당시 사회가 필요로 한 인재는 분명했다. '빠르고 정확하게 지시를 수행하는 기술자, 사무원, 공무원'이었다. 이 제도는 압축 성장 시대에 유효했다. 하지만 그 대가가 있었다. 사고의 외주화다.
학교에서 20년 가까이 반복한 패턴을 떠올려보자. 교사가 지식을 전달하고, 학생은 그것을 암기한다. 시험에는 이미 정해진 '정답'이 있고, 학생의 과제는 그것을 빠르게 찾아내는 것뿐이다. 생각은 교사에게, 판단은 교과서에, 정답은 시험지에 위탁되었다. 이 과정에서 '왜 그런가?', '다른 방법은 없나?', '이것이 정말 옳은가?'를 묻는 훈련은 사라진다. 오히려 질문하는 학생은 수업 진도를 방해하는 존재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정답 중심 교육에서 자란 세대는 성인이 되었을 때 치명적 한계를 드러낸다. 문제를 푸는 능력은 있지만 문제를 정의하는 능력은 약하다. '주어진 보기 중 고르기'로 훈련되었기 때문에, 현실의 정답 없는 문제 앞에서 사유의 방향성을 잃는다.
더 심각한 것은 '틀림을 실패로 규정'하는 환경이 만든 결과다. 객관식 시험에서 오답은 감점이다. 주관식에서 교과서와 다른 답은 '틀린 답'이다. 창의적 시도·탐색·실패는 억압된다. 창의력은 '정답을 벗어나는 위험한 행위'로 학습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20년을 보낸 사람이 사회에 나와 갑자기 '창의적으로 생각하라',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창의성과 도전 정신은 하룻밤 사이에 생기는 게 아니다. 사고가 외주화 된 인간에게 자율적 판단을 요구하는 것은 수영을 배운 적 없는 사람을 갑자기 바다에 던져놓는 일과 같다.
노동시장이 보낸 신호
사고의 외주화가 만든 결과는 노동시장에서 가장 먼저 감지되었다.
2019년 현대차그룹을 시작으로 SK그룹, LG그룹, KT 등 주요 대기업들이 정기 공채를 잇따라 폐지했다. 현대차는 "제조업과 ICT가 융복합하는 미래 산업 환경에 맞는 인재를 적기에 확보하기 어렵다"며 이유를 밝혔다.
공채는 1957년 삼성물산에서 처음 도입된 이래 60년 넘게 한국 기업의 핵심 인사 제도였다. 학벌이나 인맥 중심 채용을 대체한 이 방식은, 산업화 시기 표준화된 학교 교육과 완벽하게 맞물렸다. 학교가 규격화된 인재를 배출하면, 기업은 공채로 대량 선발해 직무 교육을 시켰다. 19세기 유럽에서 만들어진 학교 제도가 한국에 정착한 것처럼, 공채 제도 역시 산업화 시대 인력 양성 시스템의 완성이었다.
그 시스템이 60년 만에 무너졌다. 디지털 전환으로 직무가 다변화하면서, 정형화된 대량 채용보다 필요한 시점에 특정 역량을 가진 인재를 선발하는 수시채용이 효율적으로 변했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학교가 키워낸 '정답형 인재'와 현장이 필요로 하는 '문제정의형 인재' 사이의 간극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학교는 여전히 정답 중심이고, 입시 중심이었다. 학생은 높은 스펙을 가지고 졸업했지만, 기업이 원하는 건 달랐다. 한국경제인협회가 2024년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기업들의 최대 애로사항은 '적합한 인재 찾기 어려움'(27.2%)이었다. 한국경영자총협회의 2025년 조사에서는 응답 기업의 60.8%만이 채용 계획을 세웠으며, 이는 2022년 이후 최저치였다. 채용 규모를 유지하거나 축소하는 이유 1위 역시 '인재 확보 어려움'이었다.
기업이 원하는 인재상이 바뀐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의 핵심에는 사고의 외주화를 거부하는 시장의 요구가 있었다.
특히 AI가 이 변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한경협 조사에 따르면, AI 채용 기술을 활용하거나 도입을 검토하는 기업이 40.7%로, 전년 대비 1.6배 증가했다. 대한상의 조사에서도 기업 69.2%가 지원자의 AI 역량을 평가 기준으로 삼는다고 답했다.
AI 채용 시스템은 자기소개서 분석, 영상 면접, 챗봇 평가로 초기 필터링을 자동화한다. 하지만 이 시스템이 보는 건 학점이나 자격증이 아니다. 문제 해결 능력과 직무 적합성이다. 정답을 외우도록 훈련된 세대는, AI가 정답을 더 빨리 찾는 시대에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재조명되는 사회성 역량
AI 등 자동화 기술의 발전으로 직무별 노동 수요에 구조적 변화가 일어나면서,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협업할 수 있는 '사회적 능력(social skills)'의 가치가 급증하고 있다. 실제로 개인의 사회적 능력이 1 단위(1 표준편차) 높을 때, 2007~2015년에는 임금이 4.4% 높았으나, 2016~2020년에는 5.9%까지 상승한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인지적 능력(시험 성적으로 측정되는 능력)에 대한 보상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사회적 상호작용은 명문화하기 어려운 '암묵적 지식((tacit knowledge))'에 바탕을 둔다. 예컨대 상대의 미묘한 감정 변화를 읽고 대응하는 능력, 팀 내 갈등을 조율하는 감각 같은 것들이다. 이런 능력은 매뉴얼로 전수할 수 없기 때문에 자동화로 대체하기 어렵다.
이러한 변화는 노동시장 전체의 구조 전환을 의미한다. 단순 반복 업무가 AI에게 점차 외주화 되면서, 인간은 창의와 판단이 필요한 기획의 영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고를 외주화 한 세대가 이제 AI에게 업무를 외주화 당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디렉팅(지시)'이 아니라 '멘토링(지도)'이다. 정답이 사라진 세상에서 인간의 진정한 경쟁력은 기술이 아니라 인성, 효율의 추구가 아니라 의미의 회복, 데이터의 양이 아니라 지혜의 깊이에 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청년은 인재로 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