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 살에 가까운 여자가 머쓱히 웃었다. 그녀가 걷어 올린 소매와 바짓단 속에 드러난 살갗마다 온통 멍자국이었다.
21시가 넘은 캄캄한 밤. 그녀는 마을에서 나가는 버스를 기다린다고 했다.
마을에서 마주칠 때마다 인자하게 번지던 미소가 그녀의 눈과 입가 어디에나 흔하다. 짐이랍시고 옷가지 몇 벌을 챙긴 손가방과 오직 몸뚱이 하나. 떠나려는 사람치고는 가벼운 차림새였지만 그녀가 말하길 이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했다. 방금까지 나와 함께 평상마루에 앉아 과일을 주워 먹던 우리 할머니의 손이 그녀의 손등을 잡았다.
“아이고. 어이구.”
탄식을 흘리는 우리 할머니를 바라보며 그녀는 또다시 배시시 웃었다.
“이제는 정말 못 참아요.”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걷는 그녀의 뒷모습이 마치 오갈 데 모르는 미아 같았다. 그 뒤에 남은 나와 할머니는 그녀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망연히 바라볼 뿐이었다.
다음 날 우리 식당에 술 한 병을 마시러 태연히 나타난 그녀의 남편에게 나는 줄곧 냉랭한 태도를 유지했다. 사람 좋은 그의 얼굴을 금수보다 못한 듯이 흘기며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켰다. 키도 작고 아내처럼 인상도 좋고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씀씀이도 나쁘지 않은 이였다. 그저 마을의 흔한 어른, 노인, 남자. 하지만 한 여자에게 그는 다신 이곳을 돌아보고 싶지 않게 만든 고통이었다.
하룻밤 사이 그의 실체를 알고 나자 아주 짧게라도 그의 근처에 있는 것이 거북하게 여겨졌다. 그와 대화를 나누며 술잔을 기울이는 이들은 그 난폭한 실체를 알기나 아는지……. 나는 그를 사람처럼 대하는 이들에게도 똑같이 피가 식었다.
“네 외할아버지가 얼마나 무서운 분이었는지 아니. 밤마다 기도했어. 제발 아버지 좀 데려가 주세요. 저 인간 좀 빨리 죽게 해 주세요.”
언젠가 내게 막내 이모는 담담한 목소리로 속내를 고백했었다.
이모와 나 외에 듣는 이는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이모는 할아버지에 대한 여러 기억을 내게 나누어 주었다. 할아버지가 가족에게 무서운 사람이었다는 것은 몇몇 입을 거쳐 귀동냥하듯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런 날것의 속엣말을 처음이었다. 당혹스러운 마음을 갈무리하며 나누었던 다음 대화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오래전 작은 골방에 피신한 이모의 어린 얼굴이 마치 힘주어 그은 연필화처럼 머릿속에 그려졌다. 겁에 질린 얼굴, 굽은 어깨와 꽉 맞잡은 두 손.
‘제발 저 인간 좀 빨리 죽게 해 주세요.’
이모가 겪은 사람은 내 아주 어린 날 기억에 남아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과는 영 달랐다. 허름한 점방 진열장에서 내 손가락이 가리킨 물건이라면 마음껏 갖게 해 주었던 모습과 제발 저 인간 좀 죽게 해 달라 빌게 만든 난폭한 모습은 다른 세계, 다른 극에 서 있다.
술을 사주고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는 호탕한 지인. 살기 어린 말을 뱉고 주먹과 발길질을 서슴없이 날리는 남편 혹은 아버지. 누군가에겐 만만한 지인이 누군가에겐 납작 엎드려야 할 공포의 대상이었다.
1950년 말에서 6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시골에선 남편이나 아내의 얼굴도 모른 채 혼인하는 경우가 흔했다고 한다. 우리 할머니도 혼례 날 가마에서 내린 후에야 남편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부리부리한 인상에 체격도 좋아서 한 인물 하였으나 술과 노름을 좋아한 사람이었다. 생업은 할머니의 몫이었고 줄줄이 낳은 아이들도 일찍 제 앞가림을 할 줄 알아야 했다. 시골 마을 대다수의 집안이 그랬다. 그 집 숟가락 개수까지 아는 작은 마을에서 아내와 아이에게 난폭한 치들의 이야기가 소문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땐 그게 당연했다. 다들 그렇게 살기에 자신도 그렇게 사는 거라고, 소문이야 담장을 넘어도 자신의 감정만은 자기 안에서 쉬쉬해 버리는 게 일상인 세월이었다.
“얘가 말을 안 들으면 씨게 패 버려.”
내가 결혼한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우리 할머니가 내 남편에게 농담 삼아 건넨 말이었다. 할머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왈칵 화를 냈다. ‘제발 저 인간 좀 죽게 해 주세요’ 라던 막내 이모의 기도와 할아버지가 살아 있던 내내 괴로웠다던 할머니의 세월과, 늦은 저녁에 소매와 바짓단을 걷어 멍자국을 보여주며 멋쩍게 웃던 여자의 얼굴이 마구잡이 떠올랐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요즘에 누가, 누가 그런 짓을 해!”
평생 자신이나 주변에서나 고통에 시름하는 이들의 모습을 흔하게 봐 온 사람이라면 누군가 누군가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이 얼마나 괴로울지 잘 알고 있을 텐데, 자신이 각별하게 여긴다던 손주에게마저 그런 농담이라니.
흔히 조부모와 친밀하게 자란 아이에겐 노인의 언어와 맥락을 이해하는 감각 하나가 더 발달한다 믿는다. 나도 그랬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하는 농담이나 알맹이 없는 시답잖은 말에 그러려니 넘겨버리는 순간이 많았지만 그때 할머니가 한 말만큼은 이해하며 넘겨버릴 수 없었다.
치를 떠는 내 모습에 할머니도 적잖이 놀랐다. 이후 내게 건넨 미안하다는 말은 단지 내 분노를 달래기 위한 임시처방이었다는 걸 안다. 그녀는 내가 왜 그렇게까지 진절머리를 치는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듯싶었다. 그래도 그날 내게 호되게 혼이 난 이후부터 할머니는 다신 그런 비슷한 단어 한 자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 뒤 며칠이 흐른 어느 날이었다. 할머니를 차에 태우고 병원 가는 길에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할아버지에 대한 주제가 나왔다. 내가 먼저 꺼낸 건 아니었었고 대화를 하다 보니 할머니의 옛 기억이 소환된 것이다.
“남한테나 좋았지. 나나 우리 애들한텐 영 못됐어.”
“할머니. 남한테 백날 잘해봤자 나한테 못하면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인거야. 모든 게 내가 기준인거야. 나한테 나쁘게 대하는 사람은 미워해도 돼.”
괴로움이 일상어가 되어버린 자의 마음은 세상에 존재하는 풍경 중 어떤 것과 비슷할까. ‘그러려니’ 넘어가게 둬선 안됐던 일들을 매일 되풀이했던 할머니에게도 떠나고 싶던 21시가 있었을지 모른다. 남 앞에선 태연한 얼굴로 있다가 혼자서 뒤돌 땐 엉엉 울어버리던 어느 밤이.
할머니는 내게 있는 대로 할아버지에 대한 험담을 쏟아냈다. 격앙되었다가 소곤거렸다가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이내 한숨으로 끝맺었다.
“다 지난 일인데. 이제 와 꺼내서 뭣해.”
내 생각은 달랐다. ‘이제 와 꺼내는 말’에는 강력한 힘이 있다 믿는다. 자신에게 닥쳤던 상황과 감정을 객관화해 볼수 있는 힘 말이다. 당시엔 이해 불가한 것들을 오랜 시간 꼭꼭 씹어 다지다 뒤늦게야 삼킬 준비가 된 마음가짐의 한 형태인 것이다.
할머니의 말처럼 이미 지나간 일을 구구절절 나열해 봐야 소용없다 여길 수 있겠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뭐. 한 번도 쏟아낸 적 없어 마음 여기저기에 쌓인 그 해로움을 어떻게 자신 안에서 몰아낼 수 있단 말인가.
병원에서 볼일을 끝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실컷 욕했다. 집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자신이 이곳에 시집온 이래 평생을 떠나본 적 없는 마을 풍경을 차창 너머로 바라보던 할머니가 나직이 되뇌었다.
“지금 다 잘 살면 됐지. 그걸로 됐지.”
마치 오랫동안 틀지 않아 녹물만 콸콸 쏟아내다 어느 순간 맑은 물로 돌아간 수도꼭지의 물줄기처럼. 웃음기 섞인 그녀의 목소리에선 일종의 후련함이 느껴졌다.
나는 할머니에게 굳이 나와 할아버지 사이의 좋은 추억을 꺼내놓진 않았다. 내겐 좋은 사람이 누군가에겐 나쁘다. 내겐 다정했다 해서 누군가의 괴로움이 희석될 일이야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괴로웠던 사람에겐 용서가 무엇보다 쉬운 일이었고 한 번도 괴로운 적 없던 다른 극의 이가 대신 마음이 언다.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이 서로 다른 만큼 나와 할머니는 다른 세계, 다른 극에 서 있다. 우리 둘이 이렇게 가까운데도 사실은 서로 한 번도 맞닿아 본 적이 없다.
이따금 한 밤 중 다신 돌아오지 않겠노라 멋쩍게 선언하며 버스를 타러 떠나던 작은 뒷모습이 아른거린다. 벼를 잠재우느라 가로등을 끈 시골의 밤길을 홀로 걷던 그녀의 마음 한 조각이 속내 어딘가에 박혀 때때로 따끔거린다. 그녀의 얼굴은 이젠 다 상관없다 웃는 우리 할머니의 얼굴도 되었다가 아버지가 무섭고 지긋지긋해 숨바꼭질했던 이모와 엄마의 얼굴도 되었다가 내가 만나본 모든 이름을 알거나 모르는 여자들의 얼굴로 가만히 미소 짓다 사라지고는 했다.
만약 과거와 현재가 한 장 종이에 펼쳐지는 것이라면, 왼쪽과 오른쪽 끝과 끝을 붙잡아 반으로 접고 싶다. 영영 마주 볼 일 없을 것 같던 각각의 면을 가운데서 맞닿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래전 어느 21시, 어두운 길을 보며 혼자 울었을지 모를 할머니의 손을 붙잡고 건너편으로 데려오고 싶다. 지금의 나와 비슷한 또래였을 그녀에게 ‘그러려니’가 쉽지 않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괴로움이 빚어낸 단어와 문장이 일상어로 쓰이지 않는 세계에서, 그럼 그녀는 막연해 도망치고 싶던 캄캄한 21시를 별일 없이 흘려보낼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