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잃어버린 아무개의 귀여움

염려되는 마음

by 팥지혜




“너 좀 이상해. 왜 아이를 좋아하지 않아?”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라니까.”

“봐, 이렇게 귀여운데.”


자신의 조카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던 친구가 입술을 비죽였다. 그녀의 말마따나 사진 속 아이는 잘 구워진 분홍색 머랭 쿠키처럼 보드라운 볼을 가지고 있었다. 단발에 통통한 볼을 지니고 새침하게 웃는 3살 여아는 지나가던 누가 보더라도 귀여운 외양이었다.


친구는 조카에게 헌신적인 이모였다. 그녀는 조카가 태어나기 전부터 젖살이 도드라진 아기들을 귀여워했다. 천성이 그러한데 자신의 유전자가 일부 같은 조카가 생겼을 땐 어땠을까. 보드랍고 통통한 볼을 가진 아이가 자신을 보며 방긋 웃을 때마다 친구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신의 전부를 내어줄 수 있을 것 같은 존재의 탄생이었다.


나 역시 조카를 두고 있으나 친구처럼 헌신적인 이모는 될 수 없었다. 세상의 모든 이모는 친구와 같은지, 아니면 나와 더 비슷한지. 어쩌면 친구와 나는 양극단에 속해있으며 끝과 끝에서 왜 나를 이해하지 못하느냔 질문만 서로에게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평소 사람 외의 것에 더 혹하는 편이었다. 개, 고양이, 티브이로나 접할 수 있는 다양한 새끼 동물들을 볼 때면 절로 손가락이 오므라들고 눈매가 휘었다. 반면 인간 아이에겐 동물에게 내어주는 만큼의 마음보다는 약간 위축된 채다.


친구는 나를 분석하려 했다. 왜 사람이 더 귀엽지 않으냐고, 다소 집요한 질문들로 대답을 이끌려고 했다. 구구절절 반박한 적은 없다. 그저 두루뭉술한 말들로 논지를 흐리며 말머리를 돌렸다. 그러나 대화 후 남은 마음은 여전히 많은 시간, 많은 날 동안 내 안에 선명한 물음표를 띄우고 있었다.


왜 인간 아이를 더 좋아하지 않느냐는 친구의 질문에 뒤늦게 변론해보자면, 일단 나는 그들을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앙증맞은 모습에 마음이 흐뭇할 때가 많은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아이보다 동물의 어린 개체를 더 마음 놓고 귀여워하는 까닭은 다름 아닌 인간의 아이가 ‘인간’의 아이라서가 아닐까 싶다. 인간의 아이는 내가 언제고 지켜보며 돌봐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아이는 모든 귀여움의 조건을 가지고 태어난다. 동그란 얼굴형에 통통한 볼과 흰자위보다 커다란 검은 눈동자. 오밀조밀한 코와 입술 등등. 인지 능력이 있는 존재라면 당연히 ‘귀엽다’라고 느낄 만한 조건이 아이들에게 도드라진다. 베이비 스키마. 이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어른 개체가 아이 개체에게 보호 본능을 느끼게끔 만드는 것이라 한다. 자신을 지킬 힘이나 지략이 없는 채로 태어난 아이들이 어른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함이라는 설이 있다. 생존을 위한 유전자의 전략 행위라 볼 수 있다. 특이한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의 어른들은 그 ‘귀여운’ 모습에서 보호 본능을 자극 당한다.


유전자의 전략 행위가 없었다면 세상의 모든 아이 개체는 어른 개체에게 지금보다 더 쉽게 방치당하고 버려졌을지 모른다. 특히 인간의 아이는 다른 동물보다 유난히 약하다. 태어나면서부터 서지도 앉지도 못한 채 오랜 기간 돌봄이 요구된다. 보호자의 도움 없이는 채 이틀도 연명하기 힘든 존재다. 성년이 되어서도 매일이 사투의 연속이다. 긴 수명과 함께 크고 작은 물리적 질환을 얻는다. 관계에서 얻는 심리적 고통도 병의 큰 원인이 된다. 생물의 어느 개체는 탈피의 고통을 겪으며 전보다 단단한 껍질을 얻는다던데, 인간에겐 지금 당장 주어진 고통이 단단했던 마음을 깨트려놓는 퇴행의 과정일 수 있다.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물렁물렁한 인간의 기대수명은 어째서 100년 남짓이란 기나긴 숫자일까. 주어진 수명 안에서 겪는 괴로움은 온전히 본인의 몫이 된다.


인간으로 태어나 겪어내는 십수 년의 어린 시기는 남은 세월에 비해 너무도 짧고 섣부르다. 운이 좋아 생존에 대한 아무 걱정 없이 자라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빈번하다. 평균과 기대수명이 점점 높아지는 요즈음, 통통한 볼을 하고 근심 없이 웃고 자는 아이들을 마냥 귀엽게만 볼 수 없는 이유다.


가만히 있어도 생존을 보장받고 감정의 괴로움도 덜한 ‘귀여움’의 시기가 지나면, 그럼 저 아이는 어떻게 되는 걸까? 주변이나 미디어에서 가슴이 서늘해지는 이야기를 종종 접한다. 아이였으나 지금은 어른인 아무개들의 우울한 소식이 마음을 어지럽힌다.


반면 집에서 길러지는 동물에게선 그런 걱정이 덜하다. 인간보다 수명도 짧고 정성스러운 주인이 있다면 태어나 죽는 순간까지 평온할 수 있을 테니까. 인간 아이에게는 그런 안락은 예측 불가능하다. 반짝 귀엽다가도 앞으로 살아갈 날들 속의 그 애를 생각하면 걱정스러운 마음이 뒤따른다. 또 다른 아무개에 불과한 내가 이런 걱정을 한다 해서 그 애들이 겪어야 할 것들이 사라지진 않는다.


매일 다르게 커 가는 조카들을 볼 때마다 흐뭇함과 서먹함, 심란함이 교차한다. 내 곁의 강아지는 마음 쉽게 귀여워할 수 있다. 네 마지막까지 내가 지켜줄 테니 그저 먹고 자고 싸고 짖고 뛰며 킁킁대라고, 내 손에 마음껏 머리를 기대라 확언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 아이는, 나의 조카는, 내가 언제까지 지켜줄 수 없는 저 아이들은 많은 사람 속에서 고독할 때가 있을 것이고 홀로 눈물을 삼킬 때도 있으며 거듭된 실패에 체념하다 무력감에 주저앉을 때도 많을 것이다. 내가 어찌해 줄 수 없는 개인적인 시련들이 어느 밤 아무도 몰래 아무개가 되어버린 저 애들에게 다가갈 테다.



“조심히! 넘어질라.”


기어코 넘어진 조카가 벌떡 일어섰다. 울어버리고, 그게 끝이다. 다가가 상태를 살펴보는 나를 두고 다시 맹렬히 달린다. 그 모습에 맥이 풀린다.


‘봐, 이렇게 귀여운데.’


조카에 대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친구의 태도가 부럽다. 어찌할 수 없다면 마음껏 귀여워라도 해주는 게 맞다. 주변의 귀여운 존재들에게서 시선을 놓치지 않는 일. 넘어질까 노심초사하다가 정말 넘어지면 ‘아팠구나’라는 말 한마디로 충분한 일…….


나는 앞으로 아무개가 되어 갈 저 애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들을 속으로 뇐다. 그리고 다시 친구를 만나면 꼭 말해줘야겠다 다짐한다. 그저 염려가 지나쳤던 모양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