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더는 손등이 아리지 않다. 가느다란 펜으로 빗금 치듯 줄 그어진 오래된 상처에선 일말의 열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희미해지고 있다. 빗자루를 들었다. 점심 내내 식당 손님들이 머물다간 평상 아래에선 많은 것이 쓸려 나온다. 부서진 가시와 뼈, 그 외 말라붙은 음식물 조각 따위가 섞여 있다. 고양이가 살던 자리였다.
내가 태어나 본 고양이 중 가장 못생긴 녀석이었다. 주황빛 도는 바탕에 흑백 얼룩이 어지럽게 섞여 있던 뻣뻣한 털이 나를 보자 바짝 섰었다. 깡마른 몸과 구부정한 척추, 어디선가 싹둑 잘리기라도 한 것처럼 뭉툭한 꼬리까지. 불거진 두 눈에 경계심이 가득이었지만 내가 던진 먹이는 아무런 의심 없이 곧잘 받아먹고는 했다.
그게 다였다. 그 애교 없는 고양이는 이후 한 달 동안 일정 거리 이상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먹이를 먹다가도 내가 한 발짝 다가서기라도 하면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괘씸한 마음이 들다 가엾은 마음도 들었다가, 마음은 쓰되 정은 주지 않으려던 나날 간 앙상한 고양이도 점점 살이 올랐다. 통통해진 고양이는 꽤 귀여웠다. 못났을 땐 얄팍하던 배가 미모가 오른 뒤부턴 서서히 부풀었다. 그래도 곁에 두고 챙기는 짝은 없이 홀로 다니던 고양이는 어느 날 식당 앞마당에 있는 평상 아래에 해산을 했다.
아직 새끼 고양이를 낳기 전, 만삭으로 이곳저곳을 노닐던 고양이가 며칠 째 보이지 않았던 날이었다. 밖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 내지른 소리에 나가보니 거기 고양이가 있었다. 짧은 꼬리 옆을 따라 길게 늘어선 것은 미처 다 나오지 못한 채 서로 엉겨 붙어 있는 새끼 고양이 두 마리였다. 고양이는 마치 도움을 바라는 듯 인간들 곁을 서성였다. 나는 재빨리 엉덩이 부근에 축 늘어진 새끼 고양이들을 잡아당겼다. 죽은 새끼 두 마리를 바닥에 놔둔 채 놀란 고양이는 멀리 달아났다. 그러나 그 밤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온 고양이는 아직 뱃속에 있던 새끼 한 마리를 플라스틱 바구니 안에 낳은 것이었다.
사람이 많이 오가는 장삿집에 새끼를 낳은 어미의 고충은 인간이 해결할 일이 아니었다. 항상 예민하게 귀를 세우고 쇳소리를 내면서도 매번 염치없이 음식을 축내는 고양이를 내쫓는 일 또한 우리들 할 일이 아니었다.
마뜩잖은 인간들이지만 그래도 자신과 아이를 해치지 않으리라 여겼던 것일까. 나는 그 마음에 응답하듯이 매일 평상 아래를 기웃거렸다.
세 마리 중 용케 살아남은 새끼 고양이는 흑백 얼룩이였다. 동물과 인간의 보살핌 아래 무럭무럭 자라난 새끼 고양이는 허나 어미에게서 물려받은 경계심으로 인해 영 손을 타지 않았다. 검고 하얀 털을 쭈뼛 세우며 우리를 위협하다가도 그릇을 가득 채우는 음식엔 열심히 코를 박았다. 그러다 조금 만져볼라치면 매섭게 발톱을 세우곤 저만치 달아나고는 했다. 붙임성은 없지만 배가 고프면 문 앞을 서성거리며 당당히 밥을 달라 우는 고양이 두 마리를, 우리는 어이없다가도 흐뭇한 마음으로 대했다.
고된 생업의 현장에 찾아온 작은 즐거움이었다. 거기 있던 늙고 젊은 여자들 입가를 찰나 빙긋거리게 만들었다. 사료와 간식을 사는데 돈을 쓰고, 싸구려 장난감도 장바구니에 담고. 그렇게 우리는 평상 아래 두 고양이가 자신들의 터를 가꿔가는 데 아무 악의 없이 일조해 주었다.
사고는 간밤에 몰래 내린 소낙비처럼 일어났다.
"논두렁에 죽어 있지 뭐야. 가슴이 벌렁거려서..."
어미가 죽었다는 사실도 모른다는 듯 새끼 고양이는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수십 번 더 해가 뜨고 저물어야 완전한 성체가 될법한 아직은 한참 작은 몸이었다. 두리번거리며 우는 소리에선 어미가 곁을 봐줄 때의 자신감이 없었다.
혼자선 먹이를 구해먹지 못할 만큼 어린 고양이를 우리가 거두어 키우자는 말이 오갔다. 의견이 모아질 즈음, 이름은 무엇으로 지을까 홀로 고민하던 그날... 어린 고양이는 돌진하던 차 앞바퀴에 깔려 절명했다. 바쁘게 일하던 중 먹이를 달란 듯 유리문 너머를 서성이던 모습이 살아서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어미가 있었다면 사람들이 몰리는 바쁜 시간대를 피해 있다 이곳이 한가해질 때 다시 돌아와 배고프다 기척을 내었을 텐데, 요령 없는 이 고양이는 갑작스레 몰려든 사람들을 피해 달아나다 눈먼 차에 치이고 만 것이다.
"마지막 인사를 하러 들린 모양이지."
차는 달아나고 거기 덩그러니 남은 몸을 거두었던 엄마가 다음 날 넋두리하듯 하는 말에 우리 모두 동감했다.
일상은 느린 물살처럼 흘러간다. 고되고 바쁜 와중 시선은 이따금 고양이들이 살던 평상 아래에 멈춘다.
고양이가 있었던 자리.
인간과 고양이. 두 종이 공존하는 풍경은 이분법으로 나뉘지 않는 하나의 세계였다. 모두 그 시간대를 살아가며 하루의 시와 분과 초를 똑같이 나눠가졌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그래도 종종 눈빛을 건네며, 인간과 고양이는 그 하루를 사는 데 저마다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했다. 있는 힘껏 일하고 먹고 말하고 다투고 즐거워하며. 내가 혈육을 사랑하는 일은 어미 고양이가 새끼 고양이의 눈과 털을 핥아주는 일과 비슷했다.
정을 주었던 무언가가 사라진 자리에선 간혹 거기 살던 흔적들이 빗자루 질에 쓸려 나온다. 깨끗이 모아 쓰레기통에 버린 것 같아도 다음날, 또 다음날마다 한 조각 이상이 굴러 나온다. 나는 그럼 또 쓸어 담고, 또 담고, 또 버린다.
빗자루를 움켜쥔 손등을 따라 팔뚝으로 길게 이어진 상흔은 언젠가 새끼 고양이를 억지로 들다 생긴 상처였다. 바짝 약이 오른 놈이 마구잡이로 휘두른 발톱에 기어코 피도 보고 살도 파였다. 고양이가 모두 죽은 후에도 오래 남아있던 상흔은 이제 고심히 눈여겨보지 않으면 찾지 못할 만큼 매끄럽게 변했다. 상흔이 사라진 만큼 마음의 자국이 대신 짙어졌다.
정을 줄 때의 애정은 그 존재의 부재가 명확해질 때 슬픔으로 돌변한다. 애초 정을 주지 않았다면 얻지 않았을 애잔함은 한 때 무언가를 사랑하여 남은 진한 흔적이다. 문지르다 닳아져 이내 피부 속으로 숨어버린 상처는 마음을 한 뼘 파고든다. 그 깊이를 만드는 것은 기쁨만으로는 충분치 않기에, 일상은 비극에게조차 기꺼이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다. 매일의 기쁨과 슬픔은 마치 두 마리의 고양이처럼 서로의 몸을 비비고 핥으며 내 눈을 빤히 쳐다보곤 배가 고프다 운다. 그럼 난 고놈들 참 뻔뻔하다 하면서도 마음 한 귀퉁이를 선뜻 떼어준다.
사람들 뜸한 시간마다 평상 위에 널브러져 햇볕을 쐬던 두 마리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애교도 없고 성깔도 못됐지만 참 예뻤던 녀석들이 금방이라도 발밑에서 팔딱 뛰쳐나올 것만 같다. 풍경 하나를 잃은 자리마다 남은 것은 헤프게 떼어주었던 마음들이다. 그 마음, 빗자루로 쓸기에는 무거워 계속 거기 웅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