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엔 소멸 기한이 없다
새로움이 마냥 설레임으로
새 교복을 입고 새로운 학교와 교실에서 새로운 친구를 만나는 일은 학교를 졸업한 지 오래인 내게도 상상만으로 가슴 떨리는 일이다. 올해 고등학생이 된 친척 동생에게 떨리지 않느냐 물으니 혹시 새 친구를 사귀지 못하면 어떡하지란 고민을 토로해왔다. 고민이 무색하게도 동생은 새 학기 첫날 반장이 되었고 새로 사귄 친구 모두 착한 아이들이라 내게 자랑했다. 그 뒤 수시로 동생의 SNS를 살피는데, 친구들과 찍은 친근한 모습에 안도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걱정을 내려놓을 수 없다. 혹시 친구들 사이에서 겉돌지는 않을까, 미움을 사지는 않을까, 그래서 혼자 속앓이 하는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하며.
학창 시절을 겪은 대부분이 그 시절, 학교라는 공간에서 맺은 관계의 불안정성을 인정한다. 맞물렸다가도 한 눈 판 것 같지 않은 사이에 어긋난 관계에 그 시절 많은 아이들이 마음을 졸였다. 둥글게만 보였던 것이 실은 각진 모서리였단 것을 그 모서리에 상처 입은 후에야 깨닫게 된다. 우린 그 사이에서 파생된 괴로움과 어떤 방식으로든 엮여 본 적이 있다.
특히 지난 몇 년 사이 공인들의 학폭 이슈와 마주할 때마다 자연스레 학창 시절의 경험을 떠올리게 된다. 내 십 대에도 그런 애들이 있었다. 마치 계시라도 받은 듯 소외시킬 누군가를 찾아다니고 결국엔 찾아내어 찾아낸 등 뒤에 낙인찍는 아이들이 말이다. 자아가 여물지 않은 혼란한 시기에 일어난 어리숙함 탓이라 치부하기엔 그럴싸한 완성형의 악인 같았던 모습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어제 찍은 사진처럼 선명하다.
내 회상에 선두를 차지한 것은 이지러진 눈이다. 동조를 구하듯 여러 아이와 시선을 나누며 높거나 낮고 또는 소리 없는 웃음만으로 누군가를 질식시키던 아이들. 곁눈질과 웃음으로 공유된 악의를 마치 판사봉처럼 두드리며 저들 나름대로 누군가를 단죄하고는 했다. 그 애들에게 있어서 "그렇게 대해도 되는 사람"에 대한 기준이 무엇이었는진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매번 자신과 자신이 "그렇게 대해도 되는 사람" 사이의 우열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듯 보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즐거움이 어떤 고통이던 그 순간은 악의에 짓눌리던 한 인간을 외면해야 하는 나 스스로의 비겁함을 강제로 확인받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건 내게 일종의 벌이나 다름없었다.
주근깨 가득 난 얼굴, 씨근거리던 숨, 구부정한 어깨. 늘 교복 주머니에 양손을 집어넣고 다니던 S도 낙인찍힌 한 명이었다. S의 손은 음악실을 갈 때나 급식을 먹으러 갈 때나 하교를 하는 캄캄한 밤에도 늘 교복 주머니나 팔짱 깊이 숨겨져 있었다. 나쁜 일 한 번 한 적 없이 조롱당하며 홀로이던 S가 사냥감을 찾던 아이들의 목표물이 된 이유는 선천적인 기형으로 붙고 굽은 열 손가락이었다. 아이들은 자신과 다른 외형과 태도를 결벽적으로 배척하고 말과 눈빛으로 쉽게 돌팔매질하곤 했다. S의 손은 자신을 향한 모욕에 삿대질을 하는 대신 더욱 안으로 숨어들었다. 둘 곳 없이 배회하던 두 눈은 언제라도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준비를 하고 있다.
주저하고 모른 척했던 시간마다 나도 모르게 매듭이 꼬아졌다. 어느 면에선 짧고 어느 면에선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시절 이후의 모든 순간마다 나는 과거 나 스스로 꼬았던 매듭 안에서 버둥거리곤 한다. 거기에 주근깨 가득한 얼굴이 있다. 내가 사람들 속에 있을 때나 홀로 있을 때 상황과 장소와 시를 가리지 않으며 나타나 마음을 매캐하게 만든다. 십 대에서 아주 멀리 달아나 온 지금까지, 살다 예고 없이 떠오르는 그 애의 물기 어린 눈이 날 벌세운다.
"후회되더라. 그 애들이 뭐라고 한 마디도 못해줬을까. 괴롭히는 애들이 제일 나쁘고 이상해. 절대 가만 두지 마. 무서워하지 마. 어차피 다 별 볼일 없는 애들이야."
용기는 뒤늦고 후회엔 소멸 기한이 없다.
철학의 어떤 관점에선 인간에게는 자연적으로 주어진 의무가 있다고 한다. 인간이 다른 인간, 즉 이성적인 존재에게 지는 의무다. 마이클 샌델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에 나온 문장으로 마음을 대변하고 싶다. "인간을 존중하고, 정당하게 행동하며, 잔인한 행동을 삼가는 등의 의무 (중략) 이런 의무는 자율적 의지 또는 가언적 사회계약에서 생기기에, 합의라는 절차가 필요 없다. 내가 당신을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했을 때만 나는 당신을 죽이지 않을 의무가 있다고 말할 사람은 없다."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발췌)
인간에게 주어진 이 보편적인 의무를 저버린 어떤 인간들은 얼마나 많은 순간 많은 괴로움을 양산했는가. 과거에 목격하고 방관했던 폭력의 순간들이 마치 버그처럼 마음을 괴롭힌다. 기본값이 어긋난 까닭이다.
타 존재에 대한 존중 없이 스스로도 존중받길 바라선 안된다. 새로운 것을 맞이할 때엔 그저 새로움에 대한 설렘과 기대가 기본값이 되어야 한다. 두려움이 전제되는 사회는 신뢰가 없다. 신뢰가 깨진 곳에선 마음이 떠난다. 마음이 존재하지 못하는 땅은 폐허다.
겁이 많던 시절 마음속에서만 맴돌았던 관념이 저 짧은 문장으로 이뤄져 각인될 때까지, 나는 얼마큼 침묵하고 외면했던지…….
간혹 과거의 특정한 순간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한다. 괴로워하는 아이 앞에서 비겁하게 우쭐되던 이들과 싸움을 벌인다. 머리채를 잡히면 나도 머리채를 잡고, 팔뚝을 물고, 힘의 우열이 분명해도 꼬집고 발버둥 치면서 결국 상대가 진저리를 치며 도망칠 때까지 드잡이질을 한다. 과거엔 한 번도 일어났던 적 없는 그저 상상일 뿐이지만, 그래도 이 자책과 깨달음이 현재와 미래에 타인으로 인해 괴로운 누군가를 대신한 삿대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