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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팥지혜 Oct 15. 2022

잘 살아

시절 인연



조카들을 데리고 키즈카페에 간 날이었다. 2미터를 훌쩍 넘는 미끄럼틀 아래 볼풀공이 가득이었고 트램펄린 구간만 족히 30평은 돼보였다. 고개를 한껏 젖혀야 구조물이 보이는 천장엔 그물로 된 터널이 개미굴처럼 나 있어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술래잡기하듯 달려가 도착할 수 있었다. 조각 퍼즐로 만든 성과 장난감 조립 구간, 미로와 공룡 모형이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간 조카들과 다녔던 키즈카페 중 가장 넓고 사람들이 많은 곳이었다. 낯가리는 아이들이 익숙해질 때까지 같이 놀아주다 이젠 어른 없이도 서먹해하지 않는 모습을 확인하고 보호자 쉼터로 향했다. 치킨, 팝콘, 핫도그, 회오리 감자 따위를 잔뜩 시켰다. 뛰어노느라 붉게 상기된 얼굴에 머리카락이 땀으로 젖은 조카들이 이따금 테이블에 깔린 음식을 허겁지겁 집어먹고는 다시 놀기 위해 뛰어다녔다. 아이들이 소리 지르며 웃고 구르는 소리가 배경음처럼 깔린 한복판에서 나는 줄곧 내가 앉은 건너 테이블의 누군가를 흘끗거리고 있었다.


몇 번이고 얼굴을 확인해도 기억 속 그 얼굴이었다. 나처럼 벽에 기대앉아 먹고 마시며 옆 사람과 수다를 떨다가 실컷 놀다 쉬러 온 아이들을 어르며 짓는 미소가 내 기억에 남아 있는 미소와 똑같았다. 그때와 다른 게 있다면 그녀에게 엄마라 부르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을 다루는 모습이 익숙했다. 이 넓은 곳에 아이들만 풀어놓고도 노심초사하는 모습 없이 여유로워 보였다. 나는 근 20여 년 만에 만난 얼굴을 바라보며 한 번도 잊지 않았던 이름을 입속으로 뇌까렸다.


열네 살 그 애는 작고 왜소한 몸을 지녀 나와 늘 1, 2번을 번갈아 도맡았던 아이였다. 긴 머리카락을 한 올도 빠짐없이 꽉꽉 틀어 묶은 머리에 늘 교복을 단정히 갖춰 입고 말투도 점잖아서 선생님들과 아이들의 신뢰를 받았다. 공부도 얼추 하고 차분한 그 아이는 중학교에 입학해 반 배정을 받은 첫날부터 나와 죽이 잘 맞았다. 서로 만화책을 좋아했고 또 노트에 그림을 그리는 취미도 같았다. 서로 그린 그림이나 만화를 바꿔 보기도 하며 서먹한 중학교 초반 우린 금세 다른 아이들보다 더 친해졌다. 같이 수업을 듣고 쉬는 시간마다 화장실을 가고 체육 시간에도 서로 체육복을 갈아입길 기다렸다 함께 운동장으로 나가고 점심밥을 먹으러 뛰어갔다.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음식이 나오면 바꿔 먹었고 매점에서 간식을 사서 남자애들이 축구를 하고 있는 운동장을 산책 삼아 걷다 도서실에 책을 빌리러 가곤 했다. 많은 순간 감정과 생각이 방방 떠있던 날 마치 풍선 줄 잡고 있듯 꽉 붙들어 주었던 그 애는 중학교 3년 내내 나의 단짝이었다.


졸업 후 서로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계속 연락하자 약속했다. 수시로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새로 사귄 친구들 이야기나 낯선 고등학교 생활에 대해 토로했다. 그 애는 만화 동아리에 가입했고 난 미술부에 가입했다. 그 애는 학교 근처에 자취집을 구해 친구들과 함께 생활했고 나는 매일 부모님이 계신 시골집으로 막차를 타고 돌아갔다. 그 애는 고등학교에서 좋은 친구들을 만났다고 했고 난 아직 모르겠다고 했다. 새로운 시작이 낯설어 힘들어하던 나와 달리 그 애에겐 모든 게 능숙해 보였다. 가끔 약속 장소에서 만날 때마다 나와 다른 교복을 입고 나타난 그 모습이 서먹했다. 우린 점차 서로가 알지 못하는 사람과 공간과 사건에 대해 이야기했다. 대화는 자주 엇나갔다.


중학교 3년 동안 붙어 다니며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 여겼던 아이가 갑자기 한 순간도 알았던 적이 없는 타인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내가 느낀 낯섦을 그 애라고 느끼지 않았을 리 없다. 누가 먼저라 할 순 없다. 가까운 곳의 사람과 생활이 급급해 서서히 연락이 뜸해지고 그러다 끊기고 그렇게 십 대 시절이 다 갔다. 대학교에 진학하면서는 가끔 건너 건너 들려오던 소식마저 알 수 없었다. 어느 날 우연히 그 애의 근황을 접한 건 SNS 사진을 통해서였다. 꽉꽉 틀어 올렸던 긴 머리카락은 굵은 웨이브를 넣은 긴 파마머리가 되어 있었고 몸매를 드러낸 옷과 액세서리가 멋을 더했다. 사진으로만 접한 근황을 마지막으로 우리 사이의 시간은 긴 침묵과 먼지만이 쌓여갔다. 그래도 그 애와 보냈던 중학교 시절은 마치 먼지를 툭툭 털어 펼치면 언제든 추억을 소환할 수 있는 선명한 컬러 사진첩 같았다. 살다 문득 지치는 순간마다 그날들이 떠오르고는 했다. 함께 해 본 가장 큰 일탈이라고는 시골 애들 둘이 버스를 타고 시내에 있는 만화방에 가 몇 시간 동안 만화책을 읽었던 일이 다인, 흥미로운 모험기 하나 없는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에게 그 애와의 추억을 나열한다면 상대는 지루함에 입술을 쩍 벌리고 언제 이야기가 끝나나 시계 초침만 헤아릴 것이다. 그래도 어떤 모험기보다 그날들이 생생한 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웃고 먹고 나누는 것만으로 더 바랄 것 없었던 까닭이다. 그 애와 놀던 그때보다 곱절은 더 나이 먹어서야 그런 날들의 값짐을 깨달았다.


종종 상상해본 적이 있다. 다시 만나게 된다면 옆에 찰싹 붙어 온갖 호들갑을 떨며 그간 못 봤던 시간만큼의 수다를 떠는 상상을. 그 상상 속에서 반갑고 자연스럽게 이어졌던 해후는 그러나 실제 그 애를 마주친 당장 맥없이 흩어졌다. 영영 기억에만 머물까 했던 사람이 겨우 1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다. 두세 걸음 내딛으면 좁혀졌을 거리인데 지난 20여 년 간 그 애와 나 시이에 쌓인 시간만큼 멀게 느껴졌다. 좀처럼 엉덩이와 말문이 떼어지질 않았다. 머뭇거리는 사이 그 애는 아이들과 떠났다.  


그 뒤로 계속 그날의 모습이 머릿속에 남아있다. 말을 걸어볼걸 하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크게 후회되지 않았던 이유는 어릴 적처럼 '그럴 수도 있지'란 듯 미소 짓던 그 얼굴 덕이었다. 우리 처음 만났던 때처럼 여전히 어떤 시름이건 한 숨에 소화시켜버릴 듯한 여유로운 미소였다. 멀지 않은 거리에 앉아 그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 애와 있을 때면 자주 그랬다. 내게 무얼 주거나 한 것 없이도 단지 함께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여기게 했었다. 비밀을 쉽게 털어놓았고 하고 싶은 말이나 행동도 눈치 보지 않고 할 수 있었다. 방방 떠올라 어리석은 행동을 한대도 그런 날 질린 눈으로 바라보는 대신 씩 휘어지던 두 눈과 느리고 낮지만 또박또박 이어지던 목소리가 선명하다. 내 기억 속에서 늘 열네 살인 그 애는 서두르는 법이 없다. 서툰 것 없이 조용한 몸짓으로 내게 팔짱을 낀다. 때론 살아 오면 겪은 어떤 시절이 살아가는 동안의 주력이 되며, 한 시절의 인연 덕으로 여러 날의 해로운 관계가 희석되기도 한다. 그 애와 맺었던 한 시절이 내겐 그랬다. 별 일 없이 흐르고 어긋남 없었던 조그만 완벽의 순간은 이후 온통 지진처럼 흔들리던 시기의 나를 엉망으로 넘어지지 않게 해 준 주춧돌의 일부였다.

 

그래서 나는 그 애가 잘 살았으면 좋겠다. 다음에 또 우연히 만나도 다 별 일 아니란듯 여유롭게 미소짓는 얼굴이길 바란다. 친구여서 다행이었던 시절이 네게도 살아 오며 힘이 되는 주력이었어라. 별 일 없고 무탈하게. 그러니까 잘 살아라 정숙아. 잘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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